성별을 구분 지어 옷을 입는다는 말은 이제 구시대적이다. 남자 모델이 스커트에 하이힐을 신고 런웨이를 누비는 모습이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성에 대한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 각자의 방식대로 스타일을 즐기는 ‘젠더 플루이드(Gender Fluid)’ 열풍은 여전히 거세다. 이번 시즌에는 여성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발레슈즈마저 남성복 컬렉션에 흡수되는 모양새를 보이며 새로운 트렌드를 예고했다.
가장 먼저 움직인 건 발렌시아가. 2023년 봄여름 컬렉션에서 낙낙한 품의 후디와 데님 팬츠에 매치한 새틴 리본 장식의 플랫슈즈에 눈길이 닿았을 때 관객들은 생경함과 동시에 강력한 존재감을 느낄 수 있었다. MM6 역시 발렌시아가와 같은 행보를 보인 예다. 2023년 봄여름 컬렉션에서 남성 무용수를 연상시키는 우아한 발레복 스타일에 베이지, 핑크, 블랙 등 다채로운 컬러의 발레슈즈를 조화롭게 매치하며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들도 발레슈즈를 충분히 멋지게 소화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을 들게 했다. 작년 미우미우가 쏘아 올린 발레코어 트렌드를 시작으로 시몬 로샤, 몰리 고다드 등 여성성을 기반으로 전개하는 패션하우스에서 발레슈즈를 신은 남자 모델을 더러 목격하기도 했으나, 남성적인 성격의 패션하우스에서 대놓고 발레슈즈를 내놓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내년 봄여름 시즌 컬렉션에서도 남자들을 위한 발레슈즈가 속속 등장하며 발레코어 트렌드가 금방 사라져 버릴 한시적 트렌드가 아님을 증명하고 있다. 로에베는 2024년 봄여름 컬렉션에서 둥근 코와 스터드 장식으로 한층 업그레이드된 플랫슈즈를 선보이며 컬렉션을 지켜보는 뭇 남성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그런가 하면 뉴욕 패션위크 맨즈웨어 컬렉션 무대에 오른 최초의 여성 디자이너 브랜드 보디는 2023년 가을겨울 컬렉션에 이어 2024년 봄여름 컬렉션에서도 깔끔한 실루엣의 재킷과 슬랙스에 귀여운 T스트랩 슈즈를 신는 등의 스타일링으로 페미닌한 무드를 더했다. 쨍한 색감의 고무 페블 밑창 디테일을 더한 남성용 발레슈즈를 선보인 써네이, 테디베어의 포근한 질감을 살린 폴리스 소재의 발레슈즈로 보온성을 더한 더블렛까지 다양한 시도로 남성들의 선택의 폭을 넓혔다.
남성복과 양극단에 있는 듯한 여성적인 발레슈즈에 선뜻 손이 가지 않는다면 60대 거장 디자이너 마크 제이콥스의 노련한 스타일링을 참고해도 좋다. 자신의 이름을 내건 마크 제이콥스와 세컨드 브랜드인 마크 바이 마크 제이콥스에 이어 10대의 저항 정신이 가득한 1990년대 유니섹스 레트로 스타일의 해븐 바이 마크 제이콥스로 라인을 확장하며 여전히 건재함을 과시 중이다. 185만 명의 팔로어를 보유한 그의 인스타그램 게시물에 등장하는 발레리나 플랫슈즈는 남성들의 발레코어 스타일링의 지침서가 되어 준다. 실제로 그는 2023 가을 컬렉션 전반을 굽이 없는 납작한 플랫슈즈로 장식하며 발레 사랑을 드러내기도 했다. 일상 의상으로는 정갈한 슈트에 발레슈즈를 과감히 더하는 식. 포멀한 스타일과 발레슈즈의 묘한 조화는 스타일의 분위기를 아방가르드(전위 예술)하게 바꾸는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좀 더 워크웨어 분위기를 내고 싶다면 클래식한 빅백과 선글라스를 더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캐주얼한 무드를 원한다면 산뜻한 컬러감의 재킷이나 코트에 데님 팬츠를 활용하는 것도 이 계절에 맞다. 다만, 바짓단은 발등을 덮는 긴 길이를 선택해 발레슈즈의 앞코만 슬쩍 드러나도록 연출해 이질감을 최소화하는 게 좋다.
남성용 발레슈즈는 생경하게 연출할수록 멋진 아이템이다. 최근 패션계는 남녀 불문, 다양한 연령대를 과감히 아우르며 아름다움의 기준을 재창조해 나가고 있다. 발레슈즈의 유행 신호탄을 알린 여러 패션하우스를 보며 발레슈즈가 남성 로퍼를 대신할 하나의 아이템으로 각광받는 미래를 상상해본다. 트렌드를 따라가는 데 필요한 건 언제나 자신감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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