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서 유독 거센 ‘빵플레이션’
원유-설탕-소금 등 안 오른게 없어… 복잡한 유통과정도 가격 끌어올려
韓 식빵 1덩이 가격 세계 6위… 정부 압박 느슨하자 인상 눈치싸움
부산에 사는 직장인 이지은 씨(25)는 한 유명 빵집의 마늘빵이 4000원에서 최근 5000원으로 오른 것을 보고 2개를 사려다가 1개만 골랐다. 이 씨는 “빵 가격이 너무 많이 올라 빵 두세 개만 골라도 웬만한 밥값을 가뿐히 넘는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원유(原乳), 설탕, 소금, 생크림 등 제빵에 쓰이는 원자재 가격이 급등하면서 ‘빵플레이션’(빵+인플레이션)이 나타나고 있다. 한국 빵이 국제적으로도 비싼 가운데 최근 가격 인상까지 이어지며 소비자 불만도 커지고 있다.
최근 빵값은 동네 빵집과 프랜차이즈를 가리지 않고 줄줄이 오르고 있다. 서울 관악구 A제과점은 단팥빵 가격을 지난해 2200원에서 2400원으로 약 9%, 서울 마포구 B제과점은 맘모스빵 가격을 5800원에서 6700원(16%)으로 각각 올렸다. 스타벅스는 베이글 3종을 지난달 재단장(리뉴얼)해 내놓으며 빵 가격을 300∼500원씩 올렸다.
이는 원유 가격이 오르면서 버터, 생크림, 설탕, 소금 등까지 연쇄 상승한 영향이 크다. 매일유업은 이달 치즈 가격을 6∼9%, 대형마트와 할인점의 생크림 출고가를 평균 5∼9% 인상했다. 남양유업도 치즈 등을 평균 7% 인상했고, 서울우유도 국산 원유를 쓰는 버터와 치즈 값을 올리기로 했다. 낙농진흥회는 10월부터 원유 가격을 L당 88원(8.8%) 올린 1084원, 가공유용 원유는 87원 올린 887원(10.9%)으로 인상했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에 따르면 지난달 설탕 가격지수는 162.7로 2010년 11월 이후 13년 만에 최고 수준이다.
소비자들의 불만은 크다. 한국 빵값이 일본 등 다른 나라보다 유독 비싸고, 가격 인상 폭도 크다는 이유에서다. 소금빵이 대표적이다. 소금빵을 처음 만든 것으로 알려진 일본 빵집 ‘팡 메종’에서는 소금빵 1개를 110엔(약 990원)에 팔고 있지만 파리바게뜨에서는 2700원에 파는 등 국내에서는 3000원 안팎으로 형성돼 있다. 최근 엔저(円低) 현상을 감안해도 2배 이상 비싸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베이글도 미국 뉴욕에선 플레인 기준으로 1∼2달러 안팎이지만 한국에서는 3000∼4000원대다.
글로벌 물가 통계 사이트인 넘베오에 따르면 올해 한국의 식용빵 1덩이(500g) 가격은 2.83달러로 세계 6위 수준이다. 미국(3.56달러)과 스위스(3.45달러), 덴마크(3.03달러) 등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우리나라의 2배 이상인 나라들이 상위권을 차지했다. 반면 일본(1.43달러)은 40위다.
국내 빵 가격이 높은 것은 임차료와 인건비가 비교적 높은 데다 제빵 원재료 유통 과정도 복잡하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40년 경력의 한 제빵사는 “수입사-도매상-소매납품업체로 이어지는 유통 단계마다 마진이 붙다 보니, 영세한 동네 빵집은 원재료를 저렴하게 납품받기 어렵다”고 했다. 제과업계에서는 삼립과 파리바게뜨 등을 거느린 SPC그룹이 국내 제빵 시장의 약 40%를 차지해 소비자 가격에 영향을 미치고 있고, 동네 자영업자들도 이를 기준 삼아 빵값을 정한다는 분석도 나온다.
아울러 버터, 크림 등 고가 재료가 들어간 빵을 좋아하는 한국인의 입맛과 생산비가 오르면 우유가 남아돌아도 가격이 오르는 ‘원유가격연동제’ 여파도 원인으로 꼽힌다. 제주시에서 케이크 가게를 하는 김모 씨(25)는 “생크림 500mL가 연초 4600원에서 이달 5200원, 크림치즈 1kg이 1만7600원에서 2만400원으로 오르는 등 재료값이 10∼20% 상승해 빵값 인상은 불가피했다”고 말했다.
정부가 가격 인상을 자제해 달라는 추석 연휴가 지나고 압박이 느슨해지자, 미뤄왔던 가격 인상을 단행하는 업체가 늘어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식품업계 관계자는 “원유값뿐만 국제 경기 침체와 전기료 등의 상승으로 추가 가격 인상이 불가피한 상황”이라며 “누가 먼저 가격을 올리느냐 눈치싸움을 하고 있다”고 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