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더쿠’는 한 가지 분야에 몰입해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가는 ‘덕후’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자신이 가장 깊게 빠진 영역에서 나만의 브랜드를 만들어 내고, 커뮤니티를 형성해 자신과 비슷한 덕후들을 모으고, 돈 이상의 가치를 찾아 헤매는 이들의 이야기에 많은 관심 부탁합니다.
가을 바람이 불면서 독서의 계절이 돌아왔다. 책을 읽고 싶은 요즘,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도련님>을 꺼내 들었다. 일본 최초의 근대 문학가로 불리는 그는 작가이기 전에 일본 에히메현 마쓰야마시의 중학교 영어 교사였다. 나쓰메 소세키는 이 작은 도시를 배경으로 <도련님>을 집필했는데 그러다보니 도시 곳곳에 책과 관련된 이야기가 살아 숨쉬고 있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조각상, 벤치, 그리고 그의 또 다른 작품인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라는 작품을 떠올리게 만드는 수많은 고양이들까지.
나는 몇 년 전 마쓰야마시를 찾은 적이 있다. 길을 가다 만난 프린트 광고 한 장을 통해 나쓰메 소세키가 일본 문학사에서 얼마나 큰 영향력을 갖고 있는지 실감했다. 나의 이목을 끈 것은 마쓰야마에서 매년 또는 격년으로 이뤄지는 신인 작가 발굴 행사 <도련님 문학상>의 포스터였다.
바른 말만 하는 저 사람은,
어떤 글을 쓰는 걸까?
나를 꺼내/제출해/드러내!
<제 15회 도련님 문학상>
나는 이 포스터의 카피를 읽자마자 여러 상념에 휩싸였다. 입바른 소리만 하는 이들은 문학의 가치를 알 길이 없다는 냉소인가. 아니면 정론만 말하는 사람이 쓰는 글은 어떤 풍인지 알고 싶다는 호기심을 나타낸 건가. 아마도 작품 모집을 권유하는 목적일 테니 후자에 가까울 것일 테다. 이처럼 카피는 항상 궁금증을 낳고 상상력을 자극한다.
인상적인 카피를 마음에 두고 도련님 문학상에 대해 검색했다. 마음에 와닿는 카피를 또 발견할 수 있을지 기대됐다. 검색하던 중 역시나 더욱 놀랄 만한 카피를 발견했다. 네 명의 인물이 나쓰메 소세키와 같은 포즈를 취한 채 생각에 잠겨 있는 사진 위의 딱 세 구절, 짧고도 탁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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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 콘셉트가 한 눈에 들어왔다. 마치 ‘생각을 문장으로 만들면, 누구나 나쓰메 소세키가 될 수 있다’고 말을 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여고생, 샐러리맨, 주부, 노인이 생각하는 배경의 하늘에 각각의 심상을 나타낸 문장이 이처럼 잘 표현될 수 있을까? 각 포스터 하단에는 ‘테마는 당신에게 있다’ 문구가 동일하게 인쇄돼 있다. 하나의 주제를 다양한 인물과 카피로 변주한 이 광고물 자체가 옴니버스 소설이 아닐지 모르겠다.
💬포스터에 대하여 덴츠라는 일본 내 유명한 광고 대행사가 마쓰야마시를 클라이언트로 두고, 기획한 이 광고는 사단법인 일본 어드버타이저스협회(JAA)에서 주관한 제 51회 <소비자를 위한 광고 콩쿨> 잡지 부문에서 은상을 탔고 K-ADC 어워드라는 다른 광고상에서도 2012년 포스터 부문 동상을 수상했다.
독자 여러분은 네 가지 광고 가운데 어떤 광고가 가장 기억에 남는가?
나는 네 장 가운데 평범한 매일을 글로 쓰라는 두 번째 카피가 와닿았다. 청춘이 지난 지도 오래고 에너지가 달리는 탓에 직장에 대한 불만이나 푸념도 입 밖에 잘 꺼내지 않게 된 지금. 맥이 빠진 얼굴로 바깥을 내려다보는 저 여성에게서 30대 후반의 내 모습이 겹쳐졌다. 그럼에도 ‘평범한 매일도 글로 쓰면 문학’이라는 마법 같은 문장을 보니 기운이 샘솟았다.
다음으로 나의 이목을 끈 건 노인이 등장하는 마지막 포스터였다. 율곡 이이는 격몽요결에서 “말이 간결한 자는 도에 가깝다”고 하지 않았던가. 다른 사람이 원하지 않는 조언, 충고, 비판, 설교를 하고 싶어지면 이 포스터를 떠올려야겠다고 다짐했다.
누구나 나쓰메 소세키가 될 수 있다. 결국 이 광고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그 누구라도 도련님 문학상에 출품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문학은 특별한 누군가의 전유물이 아니기에 누구든지 문학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시점은 제각각 다를 수 있다는 메시지도 함께 전한다. 여기에, 문학가가 되기 위한 첫 시도가 도련님 문학상이면 좋겠다는 바람까지 인쇄 광고에 꾹꾹 눌러 담았기에 더 큰 울림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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