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입자의 전세보증금을 상습적으로 돌려주지 않는 악성 임대인 대신 주택도시보증공사(HUG)가 갚은 전세금(대위변제액)이 1조7143억 원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HUG는 이 중 1674억 원만 돌려받아 회수율이 9.7%에 그치며 1조5469억 원을 떼였다. 국민 세금을 재원으로 하는 전세보증이 악성 임대인의 ‘불법 재산 증식’에 악용되고, 이로 인한 HUG 손실을 다시 정부가 세금으로 막아주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HUG가 18일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홍기원 의원실에 제출한 ‘전세보증금 반환보증 실적 및 대위변제 현황’에 따르면 2013년 1월부터 올해 8월까지 악성 임대인에 대한 대위변제액은 1조7143억 원으로 나타났다.
전세사기가 이어지며 HUG 대위변제액도 급증하고 있지만 회수율은 바닥을 기면서 올해 HUG 순손실이 3조4000억 원에 이를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정부는 내년까지 HUG에 1조 원이 넘는 공적자금을 투입해 HUG 보증 여력을 높일 계획이지만,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크다. 이창무 한양대 도시공학과 교수는 “집주인이 갚아야 할 전세금을 공공이 사실상 책임지는 현행 전세보증 체계 전반을 손보는 게 시급하다”고 했다.
주택 800여 채를 보유한 ‘슈퍼 다주택자’ A 씨는 세입자의 전세보증금을 상습적으로 떼먹어 ‘악성 임대인’으로 지정됐다. 주택도시보증공사(HUG)는 A 씨 주택 571채의 세입자들에게 지금까지 보증금 1067억8000만 원을 대신 갚아줬지만, 그는 현재까지 4700만 원만 HUG에 갚았을 뿐이다. HUG는 세입자나 집주인이 전세보증보험 상품에 가입하면 전세보증(전세보증금 반환보증)을 발급해주고, 세입자가 전세금을 못 받으면 HUG가 먼저 세입자에게 갚아주고 이후 집주인에게서 회수한다. 회수율로 따지면 0.04%에 그친다. 악성 임대인 단 1명에게 1000억 원이 훌쩍 넘는 돈을 말 그대로 사기당한 셈이다.
전세사기 급증세가 이어지면서 A 씨와 같은 ‘다주택 악성 임대인’이 국민 세금을 재원으로 하는 공기업인 HUG의 재정을 갉아먹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HUG가 다주택 악성 임대인 대신 세입자에게 갚아준 전세금(대위변제액)이 1조4860억 원에 이르지만 회수율은 7.9%에 그친 것으로 조사됐다. HUG의 대위변제액은 급증하고 있지만 회수율이 바닥을 기면서 HUG의 부실 우려까지 커지고 있다. 정부와 HUG가 전세보증을 확대하는 데만 치중해 부실을 자초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 전세보증, 악성 임대인 재산 증식에 악용
18일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홍기원 의원실이 HUG로부터 제출받은 ‘전세보증금반환보증 실적 및 대위변제 현황’ 자료에 따르면 올해 8월 누적액을 기준으로 HUG가 지금까지 주택 10채 이상을 보유한 다주택자 대신 세입자에 대위변제한 금액은 1조5120억 원이었다. 특히 악성 임대인 대신 돌려준 금액이 1조4860억 원으로 98.3%에 달했다.
통상 전세사기 사건에서 집주인들은 전세보증을 “보증에 가입됐으니 안전하다”며 세입자를 안심시키는 수단으로 삼는다. 악성 임대인이 수십 채의 주택을 사들이는 자금으로 세입자의 전세보증금을 활용했고, HUG의 전세보증은 그런 세입자들을 유치하는 수단으로 악용됐다는 의미다. HUG는 전세금을 3번 이상 대신 갚아준 집주인 중 연락이 끊기거나 최근 1년간 보증 채무를 한 푼도 갚지 않은 사람을 악성 임대인으로 분류해 관리한다.
더 큰 문제는 이렇게 떼인 돈을 악성 임대인으로부터 받아 내기가 쉽지 않다는 것. 일반 임대인 대상 대위변제액은 260억 원으로 이 중 20.4%(53억 원)를 회수했다. 하지만 다주택 악성 임대인 대위변제액의 회수율은 7.9%(1171억 원)로 일반 임대인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악성 임대인 지정 후 2년을 훌쩍 넘길 때까지 회수율은 0%로, 한 푼도 못 받은 사례도 적지 않다. HUG는 지금까지 임대인 B 씨의 보증금을 총 75억9800만 원이나 대신 갚아줬다. 그가 악성 임대인으로 지정된 것은 3년 전인 2020년이지만, HUG는 대위변제액을 한 푼도 회수하지 못했다. 비슷한 시기 악성 임대인으로 지정된 C 씨 역시 HUG가 15억4600만 원의 보증금을 대위변제했지만, 회수율은 여전히 0%다.
● “HUG 눈덩이 손실 막는 근본 대책 시급”
설상가상으로 HUG의 전세보증금 대위변제액은 매년 급증하고 있다. 올해 들어 8월까지의 대위변제액은 2조48억 원으로 전세보증 상품이 처음 나온 2013년부터 지난해까지 10년 동안의 총 대위변제액(2조2177억 원)에 육박한다.
악성 임대인도 빠르게 늘고 있다. 악성 임대인을 처음 분류하기 시작한 2020년 83명에서 올해 8월 374명으로 4배 이상으로 늘었다. HUG 관계자는 “보증금 미반환 사고와 동시에 이뤄지는 대위변제와 달리 이를 회수하는 것은 2년 정도가 걸린다”며 “2020년부터 악성 임대인을 대상으로는 채무 상환 유예 없이 즉시 강제집행에 착수하고 있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정부와 HUG가 전세보증을 방만하게 운영하면서 악성 임대인들에게 전세사기 판을 깔아준 것이라고 지적한다. 2013년 전세보증이 처음 생긴 뒤 2018년 집주인 동의 없이 가입이 가능하도록 하고, 2020년 다가구주택도 기존 보증료 그대로 가입할 수 있도록 하는 등 보증 대상 확대, 요율 인하 등에만 주력했다는 것이다. 우병탁 신한은행 압구정역 기업금융센터 부지점장은 “악성 임대인에 대한 구상권 청구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 ‘바지사장’을 앞세운 전세사기의 경우 은닉재산을 찾을 수 있도록 정부 차원의 지원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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