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엔데믹(풍토병화) 이후 다시 붐비고 있는 강원랜드가 올해로 창립 25주년을 맞았다. 지금까지 폐광 관련 기금에 낸 돈만 2조 원이 넘고 지역 일자리를 만드는 데도 톡톡한 역할을 하고 있지만 ‘도박장’ 꼬리표를 떼는 건 여전히 숙제다.》
“블랙잭이 제일 인기가 많아요. 게임을 할 수 있는 자리를 30만 원 정도에 사고팔기도 하죠.”
17일 오전 9시 30분. 10시에 문을 여는 강원랜드 카지노 입구엔 손가방을 든 남녀 1200여 명이 긴장한 얼굴로 모여 있었다. 원하는 게임의 좋은 자리를 선점하기 위해 개장을 기다리는 이들이었다. 입구 밖에 놓인 현금자동입출금기(ATM) 앞에도 현금을 뽑으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대다수가 5만 원권을 꽤 두둑하게 뽑아 옆구리에 낀 손가방에 담았다.
오전 9시부터 개장을 기다린 60대 A 씨는 오전 5시에 경기 의정부 집을 나섰다고 했다. A 씨는 “일주일에 3번 정도 온다”며 “올 때마다 200만∼300만 원 정도 쓴다”고 말했다. 그는 “주말에는 사람이 몰려서 블랙잭이나 바카라 같은 인기 게임을 하는 게 쉽지 않다. 그래서 자기 자리를 넘기고 돈을 받는 거래도 종종 이뤄진다”고 덧붙였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한산했던 강원랜드 카지노가 다시 붐비고 있다. 지난해 연간 입장객 수는 이미 208만4000명으로 1년 전보다 147% 급증했다. 한 달에 평균 17만4000명이 강원랜드를 방문한 셈이다. 이날도 행운을 좇아 전국에서 모여든 입장객들이 카지노 입구가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 사전 입장 신청자만 1700여 명
오전 10시. 카지노 입구에 있는 거대한 모니터에 번호가 표시됐다. 입장 순서였다. 전날 자동응답전화(ARS)로 사전 입장 신청을 받고, 그들 가운데 추첨을 통해 순서를 정한다. 1∼20번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빠른 걸음으로 입구로 향했다. 입장권과 신분증, 소지품 검사가 진행됐다. 마치 공항 입국장같이 꼼꼼한 검사가 이어졌다. 강원랜드 관계자는 “술을 마셨거나 가방에 흉기 등을 넣어두면 절대 입장이 불가능하다”며 “안에서 어떠한 일이 벌어질지 몰라 예방하는 차원”이라고 설명했다.
이날 사전 입장을 신청한 사람은 1700여 명이었다. 이들은 저마다 원하는 게임장에 자리를 잡고 본격적으로 베팅을 시작했다. 현재 강원랜드 카지노 안에는 블랙잭, 바카라 등의 테이블 게임이 193대, 전자 테이블 게임이 7대, 슬롯머신 1360대가 운영되고 있다. 가장 빠르게 모든 자리가 차는 곳은 베팅 한도가 30만 원으로 가장 높은 블랙잭 자리였다. 2층에 마련된 테이블 게임장은 빈 테이블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사람들이 꽉 들어찼다. 전남 고흥에서 온 B 씨는 “베팅 한도가 너무 작다”며 “블랙잭이 그나마 베팅한 칩의 두 배를 딸 수 있어 인기가 가장 높다”고 했다.
시끄러울 줄 알았던 카지노 내부는 생각보다 조용했다. 한 테이블에서 작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본인이 받은 카드에 적힌 숫자의 합이 21이 되면 승리하는 블랙잭 자리였다. 딜러가 처음 건네준 카드 두 장에 적힌 숫자의 합이 21이 된 사람이 한 번에 2명이나 나온 것이었다. 함박웃음을 지으며 본인이 딴 칩을 가져온 사람들은 또다시 신중하게 베팅을 이어갔다.
늘 즐겁고 차분한 상황만 있는 건 아니었다. 개장 후 한 시간 남짓 지났을 때 한 블랙잭 테이블에서 중년 여성과 남성 사이에 고성이 오갔다. “왜 막말하냐” “왜 게임을 그렇게 하냐”며 두 사람의 목소리가 더욱 커지자 입장객들과 딜러는 게임을 멈추고 두 사람을 바라봤다. 좀처럼 다툼이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자 직원이 이들을 데리고 나갔다. 두 사람은 자리를 뜬 지 5분 만에 차분한 모습으로 다시 테이블 앞에 앉았다. 강원랜드 관계자는 “카지노 내부에서 입장객들끼리 심하게 싸우면 출입이 정지될 수 있어 의외로 다툼은 쉽게 정리가 되는 편”이라며 “사람들이 이곳에 오는 가장 큰 목적은 돈을 많이 따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선 최대한 많은 게임에 참여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 “문경에서도 지점 개설 요구”
국내에서 유일하게 내국인이 이용할 수 있는 강원랜드가 올해 창립 25주년을 맞았다. 강원랜드는 탄광 산업이 쇠락하면서 태백시와 정선군의 지역 경제가 크게 휘청이는 시기에 만들어졌다. 김영삼 정부 때인 1995년 12월 ‘폐광지역개발지원에 관한 특별법’을 만들어 설립 근거를 마련했고, 이후 1998년 설립됐다. 현재 정선과 태백 지역 경제에 미치는 강원랜드의 영향은 절대적이다.
카지노가 영업을 시작한 2000년부터 지난해까지 강원랜드가 낸 세금과 폐광 관련 기금에 출연한 금액을 모두 합치면 9조 원이 넘는다. 국세로 낸 금액만 4조 원에 육박하고, 폐광지역개발기금과 관광진흥개발기금에 낸 누적액은 각각 2조 원이 넘는다. 강원랜드 관계자는 “강원랜드가 지역 경제에 지원하는 금액이 적지 않아 대표적인 폐광 지역인 문경에서도 카지노 지점을 개설해 달라는 요구가 있다”고 말했다.
폐광 지역의 일자리 창출에도 큰 몫을 하고 있다. 지난해 말 강원랜드 및 협력업체 직원 5632명 중 고향이 강원도이거나 현재 강원도에 사는 사람은 전체의 72.8%(4102명)였다. 전체 직원 가운데 63.2%(3562명)가 폐광 지역 출신이다.
강원랜드 언론팀 인정권 과장도 아버지가 정선에 있던 동원탄좌 광부였다. 평생 광부로 살았던 그의 아버지는 동원탄좌가 2004년 10월에 폐광되자 다른 탄광까지 가서 일을 했다. 인 과장도 정선에서 초중고를 나와 강원도에 있는 대학을 졸업했다. 인 과장은 “아버지가 평생 광부를 하시며 자식들을 키웠는데 지금 내 직장인 강원랜드도 광부였던 아버지의 유산”이라며 “아버지도 본인이 평생 몸담았던 정선에서 아들이 근무를 하고 있다는 걸 상당히 좋아하신다”고 했다. 강원랜드는 현재 동원탄좌가 있던 위치에 탄광문화공원과 탄광박물관을 조성 중이다.
● ‘도박장’ 이미지 지우려는 강원랜드
강원랜드는 이달 초 강원랜드에 덧씌워진 부정적인 이미지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안에 대한 연구용역을 발주하기로 했다. 강원랜드 관계자는 “25주년을 맞아 카지노의 건전한 게임 문화를 조성하고 빙고 같은 오락형 게임을 도입해 가족 레저 공간으로 발돋움하기 위한 연구가 목적”이라며 “내년 초에 발주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도박장 이미지에서 벗어나 가족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레저로 강원랜드를 새롭게 자리매김하겠다는 것이다.
강원랜드는 도박 중독을 줄이기 위한 조치들도 이미 시행 중이다. 1년에 100일 이상 카지노를 출입하면 ‘고위험 입장객’으로 분류해 출입을 제한한다. 코로나19가 확산하기 전인 2019년 100일 이상 출입자는 1599명으로 전체 입장객의 0.29% 규모였다. 코로나19 영향으로 입장객이 급감한 2020년 이 비율은 0%(3명)로 떨어졌다. 하지만 2021년 0.19%, 2022년 0.25%로 다시 코로나19 이전 수준으로 되돌아가고 있다. 지난해 중독예방을 위한 부담금으로도 18억3100만 원을 냈다. 또 다른 사행 사업인 경마를 담당하는 한국마사회가 낸 부담금은 5억8900만 원이었다.
그러나 일각에선 강원랜드가 도박 중독자 관리에 소홀하다는 지적도 여전히 나온다. 감사원은 지난해 강원랜드 정기감사에서 중독자의 입장 제한 조치가 실효성이 없다고 평가했다. 감사원에 따르면 2016년 감사에서 중독자 예방을 위해 출입 가능 일수를 월 15일에서 7∼8일로 줄이도록 요구했다. 하지만 강원랜드는 2개월 연속 15일 출입자, 2분기 연속 분기별 30일 초과 출입자에게만 출입 제한 조치를 하고 있다. 감사원은 “카지노 내국인 전체 이용객은 2016년 이후 감소 추세지만 연간 100일 이상 출입하는 고위험 고객군은 더 늘어나 과다출입 제한 조치의 효과가 없다”고 했다.
감사원은 또 강원랜드가 도박 중독자 예방과 치유에도 힘을 기울여야 하는데도 이용객이 스스로 상담을 요청한 경우에만 지원 프로그램을 제공한다고 지적했다. 강원랜드 관계자는 “고위험 입장객의 전화번호 등 인적사항을 수집할 법적 근거가 없어 적극적으로 중독 예방 정책을 시행하는 데 한계가 있다”며 “문화체육관광부에 고객 데이터 수집을 위한 관련 법 개정을 요청해 놓은 상태”라고 설명했다.
강원랜드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정선군 사북읍에는 전당사가 30여 개 모여 있다. 전당사 인근에는 입장객이 맡긴 차들이 드문드문 세워져 있었다. 15년째 이곳에서 전당사를 운영하는 C 씨는 “하루에 한두 명꼴로 차를 맡기는 사람이 찾아온다”며 “예전만큼 중독자들이 보이진 않지만 강원랜드에 빠져 재산을 탕진하는 사람이 사라지진 않는다”고 했다. 또 다른 전당사 사장 D 씨는 “과거에는 강원랜드에서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강원도를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정말 많았다”며 “지금도 재산 탕진 후 인근 모텔을 전전하며 카지노를 기웃거리는 사람이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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