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 종류의 브릭으로 세상 만물을 빚어내는 아티스트 진케이와 반트
창간 90주년 맞아 천경자, 문학진 등 한국 대표 화가가 그린 표지화 재해석에 도전
‘여성동아’는 창간 90주년을 기념해 표지화 전시 ‘외출감행: 1933 신여성 여기, 오다’를 기획했다. 11월 3~12일 서울 성동구 성수동에서 열리는 전시에는 1967년 11월 ‘여성동아’ 복간호부터 1981년 3월호까지 150여 점의 표지화 중 40여 점이 공개된다. 트렌드를 이끄는 성수에서 진행되는 만큼 현대적인 시각으로 재해석한 작품 20여 점도 볼 수 있다.
이 중 브릭 아티스트 진케이(김학진·48)와 반트(김승유·37) 작가가 8점의 작품을 재해석한다. 김기창(1970년 2월호), 천경자(1974년 2월호), 문학진(1973년 5월호) 등 한국 미술계를 대표하는 작가들의 작품은 브릭으로 다시 쌓아 올려지는 중이다. 작업에 매진하고 있는 두 작가를 경기 성남에 있는 김승유 작업실에서 만났다.
진케이 김학진 “방망이 깎는 노인처럼, 브릭을 쌓는 노인이 되는 게 꿈”
게임업계에서 14년간 커리어를 쌓은 진케이 작가는 우연한 기회에 브릭 아티스트가 됐다. 예전부터 취미 삼아 브릭으로 많은 창작물을 만들어왔고, 블로그에 작품 사진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2014년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린 ‘스팀펑크 아트전’에 작품 ‘코끼리’가 초청받으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스팀펑크는 산업혁명이 벌어지던 빅토리아시대를 무대로 당시 기술에 환상적 요소를 도입한 SF 장르를 말한다. 차가운 금속에 깃든 상상의 감성, 이는 각진 플라스틱으로 세상의 모든 걸 만들어내는 브릭 아트와 절묘한 조화를 이뤘다. 전시에서 함께 초청된 다양한 예술 분야의 작가와 만날 기회를 가지면서 진케이는 전업 브릭아티스트의 길로 들어섰다.
회사를 그만두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처음의 목표를 다시 생각한 거죠. 저는 건축학을 전공했는데 IMF 외환위기 이후 취직을 해야해서 게임업계로 갔거든요. 일이 재밌어서 그곳에 오래 있었지만, 다시 현실 공간에 물성이 있는 걸 만들고 싶은 욕구가 솟았어요. 게임 회사에서 기획자로 일하며 디지털 공간에서 해보고 싶은 건 어느 정도 다 해본 것 같아요(웃음). 그러는 와중에 전시 제안이 들어왔고 물꼬가 확 트여버린 거죠.
당시엔 브릭이라는 소재가 생소하게 여겨졌을 것 같습니다.
컬래버를 한다고 해도 작품을 의뢰받으려면 기업 내부에서 먼저 아이디어가 나와야 하잖아요. 그런데 브릭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모르면 그 발상 자체가 나올 수 없죠. 그래서 초반에는 우선 브릭이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게 먼저였습니다. 간단한 일이 들어왔을 때도 그 기획이 되고 안 되고를 떠나서 무조건 담당자를 만나서 브릭으로 뭘 할 수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전달했죠. 그렇게 1년이 지나고 CJ ENM 상암 사옥에 브릭 월을 만들어달라는 요청을 받았어요.
그의 노력은 빛을 발했다. 2017년에는 태국 방콕에 있는 대형 몰의 벽에 BTS 멤버 7명의 전신이 수놓아졌다. 리바이스, 넥슨 등 다양한 기업과의 컬래버 작품도 활발히 진행했다. 2019년에는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해 백범 김구 선생을 브릭으로 재현하기도 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뭔가요.
모든 작품에 애정이 크지만 하나를 꼽자면 이 일을 시작하게 해준 ‘코끼리’(2014)를 빼놓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또 ‘Dive’(2019)라는 작품이 있어요. 11만 개의 브릭으로 작업한 대형 작품인데 음향과 조명을 합쳐 복합적인 연출이 들어갔죠. 이 작품은 천장에 매다는 게 관건이었는데 다양한 시도를 한 작품이라 기억에 남습니다.
영감은 어디서 얻나요.
오히려 브릭과 관련 없는 일에서 구상이 시작됩니다. 일생생활을 하면서 이런저런 것에 관심을 가지죠. 뉴스를 보거나 길을 가다가 어떤 장면을 보거나. 그렇게 표현하고자 하는 뭔가가 떠오르면 거기에 맞는 형상을 구체적으로 그려내죠. 간단한 스케치에서 출발해 3D 모델링 작업으로 이어져요. 혹은 디지털 공간에서 레고 브릭을 조립해보기도 합니다. 서랍에서 브릭을 꺼내 조립한 듯, 그걸 가상 공간에서 하는 거죠.
작가로서 목표가 있나요.
‘방망이 깎는 노인’처럼 브릭 쌓는 노인이 되는 게 목표예요. 예술 작품을 만드는 사람이니 미술계의 흐름을 좇아야 하나 생각하기도 하지만 흔들리지 않고 제 길을 가는 게 목표입니다.
반트 김승유 “조바심 느끼지 않고 즐겁게 작업하고 싶다”
김승유 작가의 활동명 반트(Vant)는 영어 단어 want(원하다)에서 따왔다. 원하는 걸 모두 브릭으로 만들겠다는 야심일까. 그의 작업실에는 형형색색의 브릭으로 재현된 운동화, 자동차, 타자기 등 일상 제품부터 조각이나 추상미술을 떠올리게 하는 다양한 작품이 전시돼 있다.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뒤 가구·제품 디자이너로 일하다 전업 브릭 작가가 된 그는 “어릴 때부터 만드는 일에 매료됐다”고 말한다. 대표작으로는 아모레퍼시픽과 협업한 ‘동백꽃’(2018), ‘브릭코리아’ 전시회에서 선보인 ‘고흐의 해바라기’(2019) 등이 있다.
브릭 아트에 도전한 계기는 뭔가요.
성남에서 어릴 때부터 살았는데, 학교 끝나면 브릭으로 뭔가를 만들어가지고 모이는 공간이 있었어요. 동네 슈퍼 앞이었는데, 매주 우주나 로봇 같은 주제를 정해서 모였어요. 참여하는 연령대도 다양했어요. 브릭을 진짜 잘 쓰는 형이 있었는데 한번은 형이 너무 잘하니까 분해서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웃음).
그 뒤로는 브릭을 잊고 살았나요.
10년 전쯤 짐 정리를 하다가 보따리에 싸인 브릭을 다시 발견했어요. 옛 생각이 확 났죠. 어머니에게 이걸 왜 안 버렸냐고 물었는데 “네가 아기를 낳으면 물려주려고 갖고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만약 어머니가 그걸 버리셨다면 제가 브릭 아티스트가 되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끔 해요(웃음).
2023년 ‘브릭토피아’전의 ‘REBORN’이라는 작품에 담긴 의미가 흥미로웠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저를 포함해 많은 예술가가 어려운 시기를 보낼 때 만든 작품이에요. 저는 그게 영원할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걸 겨울나무로 표현했습니다. 겨울나무는 가지만 남았지만 죽은 것은 아니잖아요. 꽃을 피우기 위해 잠깐 쉬고 있을 뿐이죠. 그리고 관람객에게 이 나무가 죽은 것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서 새집을 만들었어요. 새는 죽은 나무엔 집을 짓지 않는다고 하더라고요. 작품을 보시는 모든 분이 위로를 받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만들었습니다.
작업의 영감은 어디서 얻나요.
가끔은 브릭 부품 하나로 시작되기도 해요. 재밌는 모양의 브릭을 발견하면 이걸로 뭘 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는 거죠. 완성품의 형태만 보면 그 브릭의 모양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저는 속으로 ‘이 부품이 없었으면 저게 만들어질 수 없었어’라고 생각합니다(웃음). 길을 걷다 흥미로운 구조물을 보면 이걸 어떻게 재현할 수 있을까 머릿속으로 구상해보기도 합니다.
어떤 작가가 되고 싶나요.
평생 이 일을 한다고 생각할 때 제일 중요한 건 조급함을 내려두는 거였어요. 우선 제가 즐겁고 원하는 걸 해야 그다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브릭 아트는 예술과 과학의 조화”
각각의 커리어를 쌓아가던 진케이와 반트는 ‘외출감행: 1933 신여성 여기, 오다’에서 만나게 된다. 진케이는 “처음 표지화 재해석 제안을 받았을 때는 재밌을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원작과 화백님들의 무게를 생각하다 보니 부담감이 커졌다”고 말했다. 반트는 “90년의 헤리티지를 재현할 수 있는 기회를 얻어서 좋았고, 평소 ‘브릭의 아버지’라 부르는 진케이 작가님과 함께 작업하게 돼 영광”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작업하면서 어려운 점은 없었나요.
진케이 | 다양한 작품을 만들어오면서 힘들 때는 원작이나 사진을 두고 이를 재현하는 일입니다. 그게 얼굴일 때 가장 어렵죠. 특히 저는 BTS 작업을 할 때 아미들이 걱정됐어요. ‘우리 스타의 얼굴이 저렇게 생기지 않았다’는 평가를 들을까 봐요(웃음). 재해석할 표지화는 다 인물이라 쉽지 않은 작업이었습니다. 픽셀을 하나하나 찍듯 컬러 브릭으로 점을 찍어야 하는데, 쓸 수 있는 브릭의 컬러는 20~30가지로 한정돼 있어요.
반트 | 브릭을 떠올리면 누구나 각진 모양을 생각하잖아요. 브릭으로는 유기적인 흐름을 표현하기가 쉽지 않아요. 특히 인물을 브릭으로 재구성한 사례는 많지 않고요. 최대한 어색하지 않게 보일 수 있게끔 노력하고 있습니다.
브릭의 색과 모양이 한정적인데 어떻게 곡선으로 이뤄진 인물화를 재현할 수 있나요.
진케이 | 간단히 말하면 디지털의 원리와 비슷하다고 보면 될 것 같아요. 사진 해상도를 낮추면 네모 픽셀이 드러나잖아요. 그걸 역으로 이용하는 거죠. 어떤 색을 주변에 배치하느냐에 따라 색이 다르게 보이는 착시를 이용할 수도 있고요. 그래서 작품을 가까이서 볼 때, 멀리서 볼 때, 실눈을 뜨고 볼 때 모두 다른 작품처럼 느껴질 것 같아요.
반트 | 점과 점 사이에 여백을 두면 눈으로 볼 때 이를 그러데이션으로 인식하기도 해요. 브릭 아트는 예술과 과학의 조화인 셈이죠.
이번 전시에서 어떤 포인트에 주목하면 좋을까요.
진케이 | 원작과의 비교 분석보다는 그림이 그려졌을 당시의 시대상을 상상하면서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잡지의 표지는 당대의 핫한 트렌드와 시대상을 반영하잖아요. ‘여성동아’ 표지화 주인공들은 어떻게 보면 당대의 ‘뉴진스’인 거죠. 그 당시의 풍경을 상상하면서 작품을 감상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반트 | 멀리서 볼 때는 브릭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가까이서 보면 “어, 브릭이구나!”라고 반전을 주는 작품을 만들고 있습니다. 누구나 알고 있는 익숙한 소재로 새로움을 전달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관람객들이 직접 작품을 완성할 수 있는 코너도 준비됐으니 즐겁게 참여해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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