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 꺼지는 지역 산단… “금융위기때보다 악화”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11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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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황에 갇힌 기업들]〈상〉 전국 산단경기 진단
반도체 등 일부 반등 신호 있지만
중소업체들, 고금리-고물가에 허덕
산단 입주사 “역대급 불황” 하소연

인천 미추홀구 기계산업단지 내 한 폐공장. 공장 입구를 막은 녹슨 쇠사슬을 통해 문을 닫은 지 꽤 시간이 지났음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인천=송은석 기자 silverstone@donga.com
인천 미추홀구 기계산업단지 내 한 폐공장. 공장 입구를 막은 녹슨 쇠사슬을 통해 문을 닫은 지 꽤 시간이 지났음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인천=송은석 기자 silverstone@donga.com
지난해 147억 원의 매출을 올린 자동차부품사 코르텍은 지난달 11일 법원에서 파산 선고를 받았다. 코르텍은 2021년 15억6000만 원의 당기순손실을 내며 자본 총계가 ―7억6200만 원으로 자본잠식에 빠졌다. 지난해도 6억3000만 원의 순손실을 기록해 자본은 ―13억8900만 원으로 더 악화됐다. 경영난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법인 재산을 채권자들에게 분배하기 위한 절차에 들어간 것이다.

13일 인천 미추홀구의 6층 높이 코르텍 본사는 모든 불이 꺼진 채 입구는 굳게 닫혀 있었다. 매물로 나온 공장 문 앞에 붙은 부동산 매매·임대 홍보물만 바람에 나풀거렸다. 바로 옆 회사의 한 직원은 “하루아침에 갑자기 문을 닫더니 저렇게 방치돼 있다”며 “건물에서 사람들이 빠져나간 지는 두세 달 정도 된 것 같다”고 했다. 반도체 등 일부 산업계에서 ‘경기 반등’ 신호가 나오고 있음에도 국내 전반의 기업 경기는 여전히 불황 터널을 지나고 있다. 특히 지역경제를 떠받치는 중소기업들은 생존을 걱정하는 곳도 많았다.

21일 본보가 대한상공회의소와 함께 전국 지역상공회의소 회장 73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 72명 중 28명(38.9%)이 “지금이 2008년 금융위기 때보다 더 나쁘다”고 답했다. 비슷하다는 응답도 33.3%였다. 글로벌 금융위기는 주가 폭락, 환율 급등, 국내총생산(GDP) 하락, 실업률 상승 등 온갖 악재가 쏟아졌던 시기다. 그런데도 10곳 중 7곳이 당시와 비슷하거나 더 나쁘다고 본 것이다.

전국 73개 지역상의에 가입한 기업 수는 약 20만 곳이다. 상의 회장단 조사는 일부 대기업의 상황이 아니라 전국에 있는 기업들의 체감 경기를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이재하 대구상의 회장은 “대구의 미분양 아파트는 9월 말 기준 전국에서 가장 많은 수준인데, 이런 부동산 위축이 실물 경기를 더 악화시키고 있다”고 우려했다.

“공장 돌릴수록 적자, 접을 날 고민”… 파산신청 1363건 10년새 최대


산단 업체들 “주문 줄고 재료값 올라
이대로라면 내년에 줄줄이 망해”
지역-업종 관계없이 ‘생존위기’ 호소… “中企 붕괴, 대기업에도 타격” 우려

인천 미추홀구 기계산업단지는 총면적 35만 ㎡ 규모에 전자부품, 정밀기기, 금속·플라스틱 가공, 자동차 부품 등 180개 업체가 입주해 있다. 13일 오전 이곳에서 만난 제조사들은 하나같이 “역대급 불황에 시달리고 있다”고 토로했다. 플라스틱 사출 전문업체 A사 직원은 “최종 소비재 기업들로부터 주문이 들어와야 우리 같은 가공업체들도 먹고사는데 살아날 기미가 영 보이질 않는다”며 “올해 매출은 작년보다 30%는 줄어들 것으로 전망된다”고 했다. 또 다른 기업 B사 관계자는 “다들 언제 사업을 접을지 타이밍을 보는 중”이라며 “공장을 돌릴수록 적자만 쌓여 이대로면 내년엔 줄줄이 망한다”고 전했다.

수출이 지난달부터 증가세로 돌아섰고 반도체 경기도 반등 기미가 보이지만 전국 곳곳의 산업 경기는 여전히 ‘빨간불’인 상태다. 특히 중소기업들은 줄도산 우려까지 하고 있다. 중소기업계가 붕괴될 경우 중견기업과 대기업들도 연쇄적으로 기반이 흔들릴 가능성도 있다.

● “상황 개선 안 되면 내년 생존 장담 못 해”


인천 기계산단에서 차로 40분 거리의 뷰티풀파크(옛 검단산단) 내 표면처리 및 목가공 업체들도 “앞이 안 보인다. 내년을 어떻게 버틸지 막막하다”고 전했다. 뷰티풀파크 표면처리단지는 수도권에서 가장 큰 규모로 110개의 도금·도장 업체가 입주해 있다. 단지 운영을 맡고 있는 장석복 인천표면처리협동조합 전무는 “엊그제도 한 곳이 문을 닫고 떠났다”며 “주문은 줄어드는데 원재료 값은 오르고, 특히 전기료 인상의 타격이 크다”고 말했다. 장 전무는 “가뜩이나 어려운데 정치권에서는 노란봉투법이니 중대재해처벌법이니 규제만 계속 만들어대 사업주들이 기력을 잃고 있다”고 덧붙였다.

인근 목재 업체들도 공장 마당에 재고만 산더미처럼 쌓아두고 있었다. C목재업체 직원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유행 이후 건설업 불황에 시달린 지 3년이 넘었다”며 “주변에서 문 닫기 시작한 업체 소식이 하나둘 들리는데 지금보다 상황이 개선되지 않으면 내년은 대부분 생존을 장담할 수가 없다”고 했다.

기업들의 우려는 이미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21일 법원통계월보에 따르면 10월 말 기준 전국 법인파산 신청 건수는 총 1363건으로 이미 지난해 연간 1004건을 넘어섰다. 파산 통계를 집계하기 시작한 2013년 이후 최대다. 파산 신청이 가장 많았던 때는 2020년으로 1069건이었다. 한편으론 올해 10월까지 회생 신청은 1287건이었다. 다시 일어서려는 회생보다 사업을 포기하는 파산이 많은 이른바 ‘데드크로스’다.

영업이익으로 이자비용을 감당하지 못하는 한계기업도 계속 불어나는 추세다. 한국경제인협회가 비금융 외감기업 2936곳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2개 분기 연속 영업이익보다 금융비용이 큰 기업의 비중은 올 2분기(4∼6월) 기준 35.2%로 전년 동기(29.0%)보다 6.2%포인트 늘었다.

● 지역, 업종 가리지 않는 불황


불황은 지역과 업종을 가리지 않고 있다. 부산의 경우 지역 경제를 떠받치는 유통, 물류, 조선·기계 산업이 고금리·고물가·고환율의 구조적 문제에 빠져 총체적 난국에 빠져 있다. 심재운 부산상의 경제정책본부장은 “최근 부산 기업 전반을 점검해봤더니 유통·물류는 매출이 작년과 비교해 반 토막 났다”며 “지금까지는 대부분 건설업 위주로 기업들이 회생절차를 밟았는데 이제 제조업 전반에 위기가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해외 수출입 의존도가 높은 지역의 타격도 크다. 글로벌 경기 침체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데다 공급망 리스크에도 노출돼 있기 때문이다. 구자천 창원상의 회장은 “창원은 중국과 중간재 및 원자재 거래를 하고 미국에는 내구소비재 수출을 주로 한다”며 “두 국가 간 분쟁이 길어지면서 그 사이에서 사업하는 지역 산업의 피로감이 누적되고 있다”고 호소했다. 중국이 제1위 교역국인 대구도 중국의 내수경기 침체, 재고 과잉 등으로 인한 수출 감소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반도체, 자동차, 배터리 업체가 많은 경기 평택, 화성이나 석유화학 업체가 밀집한 울산, 전남 여수, 충남 서산 등의 체감경기도 바람이 차다. 반도체 경기는 터널 끝이 보인다고 하지만 지방 현장에서는 재고 누적으로 체감 경기는 한겨울이었다. 배터리는 상대적으로 업황이 나았다지만 기업마다 해외 사업 비중에 따라 희비가 엇갈렸다. 석유화학 업계도 경기 침체에 더해 최대 수출처였던 중국 시장의 불확실성이 커지며 직격탄을 맞았다. 중국 수요도 부진한데 중국이 자체적으로 석유화학 해외 의존도를 낮추고 자립에 속도를 내고 있기 때문이다. 여수상의는 “수익성 악화와 그에 따른 공장 가동 중단 등 연쇄 타격이 우려되고 있다”고 했다.

한국 경제의 발목을 잡는 해외 리스크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전국 상의 회장 50.0%는 ‘고금리 장기화’를, 26.4%는 ‘중국 경제성장률 저하’를 꼽았다. 국내 리스크에 대해서는 41.7%가 ‘고물가 지속’을 위협이라고 봤고 30.6%가 ‘산업별 인력난 문제’를, 20.8%가 ‘노동시장의 경직성’을 지적했다.

이경묵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는 “중견·중소기업은 국내 기업 수 99%, 고용의 88%를 차지할 만큼 경제 전반을 떠받치는 중요한 생태계”라며 “중견·중소기업이 무너지면 최종 제품을 생산하는 대기업의 경쟁력도 떨어지고 결국 새롭게 해외 공급망을 찾아야 하는 비용까지 낳기 때문에 심각한 손실”이라고 말했다. 이어 “고금리가 장기화되며 높은 이자비용 때문에 투자를 중단한 기업들이 상당하다”며 “경기가 점차 반등한다고 하지만 중견·중소기업들의 회복은 이보다 더딜 것으로 보인다”고 내다봤다.


인천=박현익 기자 beepark@donga.com
곽도영 기자 now@donga.com
#지역 산단#불황#하소연#파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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