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품회사들은 원자재 가격 상승과 이자 비용 증가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계속 사업해 봤자 적자라서 접을까 싶어요.”
13일 인천 미추홀구 기계산업단지에서 만난 한귀득 태성티아이엠 대표는 앞으로의 경기 전망을 묻는 질문에 이같이 대답했다. 태성티아이엠은 2004년 설립된 자동차·전기전자 부품 전문 회사다.
올해 극심한 경기 한파에 시달렸던 국내 중견·중소기업들은 좀처럼 상황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 내년을 어떻게 버틸지 막막하다고 했다. 물가 상승에 따른 수익성 악화와 고금리, 인력난, 투자 경색까지 각종 악재가 계속되며 생존에 대한 확신이 점차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22일 본보가 대한상공회의소와 함께 전국 73개 지역상의 회장들을 설문한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 71명 중 44명(62.0%)이 내년 경기를 부정적으로 봤다. 그중 15명(21.1%)은 ‘2∼3년 후부터 좋아질 것’이라고 봤고, ‘만성 장기 침체에 빠진 것 같다’는 평가도 7명(9.9%)이나 됐다. 22명(31.0%)은 ‘워낙 변수가 많아 알 수 없다’고 답변했다.
이보영 평택상의 회장은 “반도체, 자동차, 조선 등 글로벌 경쟁력을 가진 1% 대기업은 반등하겠지만 나머지 99% 중견·중소기업들은 인력난 가중에 투자도 막히고 전망이 어둡다”며 “내년을 생각하면 앞이 정말 깜깜하다”고 말했다.
전국상의 99% “지역 투자여건 어려워”… 올 상반기 자금조달 급감
“담보 한계로 추가 대출 막혀 성장 가능성 따져 금융지원을” “금리인하-금융지원 가장 절실” 저금리 대출 대폭 확대 요청
부산 지역 경제의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중소 조선업계는 심각한 유동성 위기에 처해 있다. 원자재 가격 상승, 일손 부족 탓에 선박 건조 일정이 차질을 빚고 비용만 불어나는 상황이다. 수익성 악화로 기존 수주 물량들이 모두 적자로 돌아오고 있다. 여기에 중국 업체와의 경쟁도 갈수록 치열해지며 불확실성은 커지고 있다. 부산 대표 중소 조선업체인 대선조선은 9월 말 부채비율이 549%에 달하며 지난달 주채권은행인 한국수출입은행에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을 신청했다. 부산상의 관계자는 “조선업계 사정이 어려워지니 부품, 장비, 조립 등 조선기자재 업체들까지 연달아 힘들어지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 암울한 전망 탓 투자 움츠러들어
기업들이 다시 일어서려면 재원 마련이 시급한데, 고금리로 자금을 빌리는 것조차 쉽지 않다. 전국 지역상의 회장 73명 중 71명(98.6%)은 “우리 지역 기업들의 투자 여건이 어렵다”고 응답했다. ‘매우 어렵다’가 25.0%, ‘다소 어렵다’는 73.6%였다. 전국 대부분 지역에서 투자 활력을 잃고 있다는 것이다. 이재하 대구상의 회장은 “기업들은 어느 때보다 어려운 대내외 여건에 놓여 있다”며 “전쟁, 유가 급등에 더해 미국 기준금리 인상 등 금융부문의 불확실성이 큰 변수”라고 했다. 그러면서 “현재의 위기가 단기간에 추세 전환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라고 전망했다.
향후 전망에 대한 불확실성은 당장 투자를 움츠러들게 한다. 투자를 저해하는 주요 요인(복수 응답)으로 상의 회장의 65.3%가 ‘경제 불확실성 증가로 인한 기업 활동 위축’을, 30.6%는 ‘금융시장 불안 및 자금 조달의 어려움’을 꼽았다. 한 지방 기업 사장은 “지금은 사업을 정상화하는 것이 시급한데 금리 부담을 안고 다른 일을 벌이긴 어렵다”며 “투자라는 게 3∼4년 뒤에야 결과가 나오는데 자칫 큰 위험으로 돌아올까 다들 엄두를 못 내고 있다”고 전했다.
실제 올해 기업들의 자금 조달 규모는 급격하게 축소됐다. 대한상의에 따르면 상반기(1∼6월) 비금융 민간기업의 자금 조달 규모는 80조7000억 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의 285조3000억 원에서 72% 급감했다. 주요 자금 조달 방식인 은행 대출 등 금융기관 차입 규모는 작년 상반기 120조5000억 원에서 올해 상반기 37조4000억 원으로 3분의 1 토막이 났다.
● 금리 부담 완화, 노동개혁 등 시급
지역상의 회장 중 가장 많은 56.9%는 ‘금리 인하 및 기업 금융지원’을 현 시점에서 가장 필요한 과제(복수 응답)로 꼽았다. 특히 저금리 대출 프로그램을 대폭 확대해 줄 것을 요청했다. 지방 기업의 한 관계자는 “대부분 기업들의 담보가 한계까지 와서 추가 금융지원을 받을 여력이 안 된다”며 “앞으로 성장 가능성 등을 살펴보고 정책적으로 대출을 풀어줄 수 있는 곳은 과감하게 풀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고용 유연성 증대 등 노동개혁’(43.1%) 및 ‘법인세·상속세 등 기업 세제 개선’(40.3%)도 시급하다는 의견이 많았다. 구자천 창원상의 회장은 “날이 갈수록 커지는 수도권과 비수도권 간 격차를 해소하려면 기업이 지역에 투자하고 싶게 여길 만한 파격적인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며 “지방 기업의 법인세와 근로자 소득세를 차등 적용하는 등 수도권의 경제·금융·인적 인프라를 상쇄할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
김대종 세종대 경영학부 교수는 “적어도 내년 상반기(1∼6개월)까지 현재의 고금리가 유지될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중견·중소기업들은 절벽 앞에 서 있다”며 “정부 정책자금 및 세제 지원뿐만 아니라 은행들도 기업들의 이자 부담을 낮추는 데 동참한다면 보다 빠른 경기 회복을 기대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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