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더쿠’는 한 가지 분야에 몰입해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가는 ‘덕후’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자신이 가장 깊게 빠진 영역에서 나만의 브랜드를 만들어 내고, 커뮤니티를 형성해 자신과 비슷한 덕후들을 모으고, 돈 이상의 가치를 찾아 헤매는 이들의 이야기에 많은 관심 부탁합니다.
치즈와 와인은 기원전 로마 때부터 페어링해 먹었을 정도로 오래된 궁합을 자랑한다. 프랑스에서는 음식과 술의 어울림을 중시하는 식문화 ‘마리아주(Mariage)’의 대표 사례로 치즈와 와인을 꼽을 정도다.
하지만 이 둘의 만남이 매번 최고의 만족감을 가져다 주진 않는다. 치즈와 와인 모두 각자의 풍미를 뽐내는 발효식품이기에 서로 어울리는 스타일과 만나야 맛이 조화롭기 때문이다. 자칫 잘못하면 치즈의 쿰쿰함이 와인의 산뜻함을 저해시킬 수 있고, 반대로 와인의 지나친 단 맛에 치즈의 고소함이 묻혀버리기도 한다.
찰떡궁합인 치즈와 와인을 찾고 싶은 입문자들을 위해 국내 최초 아티장* 치즈 레스토랑 ‘치즈플로’의 조장현 셰프가 페어링 가이드를 준비했다. 실천할 엄두조차 안 나는 복잡한 이론들을 제외하고 실용적인 필수 팁들만 정리했으니 유용하게 활용하길 바란다.
*아티장: 장인 정신으로 소량만 빚어낸 음식
강한 자들끼리 붙어야 하는 법
흔히 코스 요리에선 자극적인 메뉴 이후엔 슴슴한 메뉴가 나오듯 맛의 강약 조절이 필요하지만 치즈와 와인을 페어링할 땐 다르다. 오히려 맛의 강도가 비슷해야 그 케미가 폭발한다. 맛 세기에서 양측의 편차가 심하면 한쪽의 매력은 반감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는 치즈와 와인이 개성 뚜렷한 발효식품이라는 점에서 더욱 고려해야 할 요소다.
원래는 맛의 무게감과 지속성 등 세부 기준들을 하나씩 체크해서 그 세기가 유사한 상품들을 선택하는 게 정석이다. 하지만 매우 번거로운 데다 전문가가 아니고서야 이런 요소들을 정확히 평가하는 것도 쉽지 않다. 따라서 입문자들에겐 대략적인 맛의 강도를 고려하길 추천한다. 예컨대 치즈의 맛이 세다면 와인도 그에 걸맞게 강해야 하고, 은은한 치즈를 먹을 땐 섬세하고 산뜻한 와인이 적합하다. 참고로 이렇게 페어링할 땐 확실한 주연을 정하고 시작하는 게 편하다. 오늘은 치즈 맛에 더 집중하고 싶다면 원하는 치즈를 고른 후, 그 강도에 맞춰 와인을 선택하는 식이다.
고향이 같을수록 친한 사이
치즈와 와인을 둘 다 잘 모른다면 패키지에 적힌 원산지를 확인하는 것도 방법이다. 같은 지역에서 생산된 제품들을 페어링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는 점에서다. 여기서 ‘떼루아’란 개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떼루아란 땅, 물, 기온, 습도 등 식재료 맛에 영향을 주는 재배지의 기후 특징을 일컫는다. 이는 각각 치즈와 와인의 원재료인 우유, 포도에도 반영되기 때문에 떼루아가 같은 제품들을 조합하는 것이 가장 쉬운 페어링 팁이다.
추천 조합으로는 프랑스 알사스 지역의 게부르츠트라미너 와인과 뮌스터 치즈, 프랑스 르와르 벨리의 상세르 와인과 크로탱드샤비뇰 치즈가 있다.
짭짤한 치즈엔 새콤달콤한 와인
냉장고에 묵혀놓은 짭짤한 치즈가 있다면 신맛 또는 단맛이 강한 와인을 추천한다. 짠 치즈와 새콤한 와인의 궁합부터 살펴보자. 화학적으로 염분은 산을 일정 부분 중화시킨다. 미식 측면에서 보면 무작정 신 맛을 없앤다기보단 입 안에서 서로 융화된다고 보는 것이 알맞다. 짜고 새콤한 맛이 따로 놀지 않고 한 데 어우러진단 뜻이다.
또한 단짠단짠이라는 맛의 진리는 치즈와 와인에도 적용된다. 짠 치즈와 당도가 높은 디저트 와인*이 잘 어울리는 이유다. 예컨대 토카이 및 소테른 와인에 로크포르 같은 블루치즈는 황금궁합이라고 할 수 있다.
*디저트 와인: 식사를 마친 후 디저트와 함께 마시는 달콤한 와인
[치즈 덕후가 추천하는 세트] 앞서 언급한 3가지 방식에 의거해 치즈 종류별로 어울리는 와인을 정리했다. 와인 목록에 적힌 맛의 특징과 포도 원산지 또는 포도 품종을 참고해 와인숍에서 관련 와인들을 보여달라고 문의해도 좋다.
자고로 모든 음식은 그 이면의 이야기를 알고 먹으면 더 맛있는 법! 앞서 소개한 치즈별 추천 와인 중 괴짜들이 만들어서 인기 있는 3가지 브랜드를 소개한다.
안드로메다 피노누아 : 와인을 모르는 예술가가 만들어서 성공했다?
1942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난 션 태커리는 와인계의 반항아로 이름을 알렸다. 현대 양조법을 따르지 않고 집 뒷마당에서 자신만의 실험적인 맛을 완성한 와인 메이커였기 때문이다. 본래 예술가였던 그는 1970년대 집 마당에서 수확한 포도로 와인을 만들며 양조에 빠졌다. 급기야 자신의 이름을 본따 Thackrey and Co 와이너리까지 설립한 후, 캘리포니아 나파밸리의 유명 와인 산지 '페이 빈야드'와 협업해 와인을 출시했다.
데뷔작이었지만 샌프란시스코 와인 전문가들에게 호평을 받았다. 1980년대 와인 황제로 불리던 로버트 파커가 "션 태커리는 캘리포니아에서 가장 신비롭고 아이코닉한 와인 메이커"라고 극찬할 정도였다. 당시 현지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메를로와 시라 등의 품종을 섞은 것이 맛의 비결! 와인용 포도 종류를 제한적으로 쓰던 당시에 태커리의 시도는 파격 그 자체였다.
그는 집 뒷마당의 연구실에서 와인 실험을 이어갔다. 업계에서 등한시되던 품종들을 혼합하고, 별자리를 차용해 와인명을 짓는 등 이색적인 아이디어를 실현한 곳이다. 2022년 5월 태커리는 세상을 떠났지만 "와인 메이커로서 나의 유일한 목표는 즐거움을 만드는 것"이란 그의 말은 여전히 업계에서 회자되고 있다.
'안드로메다 피노누아'는 션 태커리 특유의 실험정신을 내포한다. 샌프란시스코 내에서 포도 재배지로는 부적합하다고 여겨지던 마린 카운티의 품종을 활용했다는 점에서다. 16년간 숙성시킨 와인으로 딸기와 체리 같은 과일향이 돋보인다.
알바로 팔라시오스 페탈로스 : 스페인 개척자가 산 속에서 만든 와인
350년 역사의 와인 가문에서 태어난 알바로 팔라시오스는 스페인의 프리오랏과 비에르조를 세계적인 와인 산지로 도약시킨 주역이다. 대학에서 양조학을 전공한 그는 1980년대 후반 와인 산지로 인식되지 않던 프리오랏에 관심을 보였다. 과거에는 포도 재배지였지만 험난한 산악 지대인 탓에 등한시되던 모습을 안타깝게 여긴 것. 이곳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싶던 팔라시오스는 험난한 지역에서도 자랄 수 있는 국제 포도 품종을 심고 직접 연구한 농법으로 가꿨다. 끝내 고품질의 포도를 수확하는 데 성공, 이때부터 그는 '포도밭의 모험가'로 불렸다.
다음 개척지는 스페인 북서부의 비에르조. 해발 500~900m 사이에 자리한 이곳의 밭을 매입한 후 지역의 토착 품종인 멘시아를 재배했다. 계단식 논 구조를 차용해 경사가 가파른 탓에 포도를 심을 수 없다는 문제를 보란 듯이 해결했다. 적정 수확량을 제한할 정도로 품질 관리에 진심을 다했고, 팔라시오스의 멘시아는 풍부한 상쾌함과 시트러스한 향으로 유명세를 떨쳤다.
'알바로 팔라시오스 페탈로스' 한 잔이면 그 멘시아의 매력을 오롯이 느낄 수 있다. 60~100년에 이르는 나무에서 수확한 멘시아로 양조한 와인으로 최상의 맛을 내려면 약 6년간 숙성해야 하며 강렬한 블루베리 내음과 완숙한 과실의 단 맛이 특징이다.
카네로스 샤도네이 : 와이너리들의 러브콜 받는 포도밭
키슬러, 콩스가드, 오베르 등 캘리포니아의 유명 와이너리들과 함께 자주 언급되는 포도밭이 있다. 바로 나파 밸리 최고의 샤도네이 재배지로 알려진 '허드슨 랜치'다. 이곳의 주인은 리 허드슨. 1981년 그는 나파 밸리 남단에서도 가장 서늘한 로스 카네로스에 터를 잡고 허드슨 랜치를 일궈냈다.
허드슨은 최대한 자연 친화적인 방식 속에서 포도를 재배하기로 유명하다. 그래야만 자연스럽게 포도가 떼루아와 동화되기 때문이다. 재배 과정에서 인위적인 요소를 줄이기 위해 트랙터용 작업로 면적도 최소화할 정도다. 수확량을 늘리는 데 급급했다면 실천할 수 없는 부분이다. 포도를 향한 그의 진심 때문일까? 패키지에 '허드슨'을 각인하고 싶다며 별도 라이선스 계약을 제안하는 거래처도 수두룩하다.
2004년부터 허드슨 랜치는 자사의 대표 품종인 샤도네이, 비오니에, 쉬라 등으로 와인을 직접 생산해왔다. 그중 '카네로스 샤도네이'는 부드러운 과일의 풍미와 적정량의 산미가 조화롭기로 유명하다. 점도가 높아 입안에서 맛이 지속된다는 점 역시 와인 덕후들이 호평하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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