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저출산(출산율 0.7명)이 14세기 유럽 흑사병보다 더 심각한 인구감소를 초래할 수 있다는 뉴욕타임스 칼럼이 최근 화제였죠. 2일 로스 다우섯 칼럼니스트가 쓴 ‘한국은 소멸하나(Is South Korea Disappearing)?’ 칼럼인데요. 읽다 보면 19세기 프랑스 사회학자 오거스트 꽁트가 남긴 유명한 말이 떠오릅니다. ‘인구통계는 운명이다(Demography is destiny)’. 정말 한국은 소멸의 운명을 맞이하게 될까요.
비관론에 빠지는 대신 먼 과거 이야기에서 단서를 찾아보려 합니다. 뉴욕타임스 칼럼 속 문장-‘어느 시점엔 북한(현재 출산율 1.8명)이 침략할 가능성이 크다’-이 상상력을 자극했는데요. 인구 감소로 전쟁에서 지고 결국 멸망한 고대 국가, 스파르타의 저출산을 들여다봅니다.
스파르타 하면 무엇이 떠오르나요? 아마도 용맹한 용사들이 수십만의 페르시아군 대군과 맞서 싸운 기원전 480년 테르모필레 전투를 담은 영화 ‘300’이 아닐까 싶은데요.
‘스파르타식’이라 불리는 무자비한 군사훈련 과정은 유명하죠. 인권 유린과 아동 학대로 범벅돼있었는데요. 체격이 왜소하거나 장애가 있어서 전사가 되기에 부적합하다고 판단되는 아기들은 버려졌습니다. 스파르타의 지배계급인 자유시민에 속한 남자아이들은 7살이 되면 집을 떠나 공동생활을 하면서 20살까지 교육프로그램인 ‘아고게(Agoge)’를 의무적으로 받아야 했습니다.
훈련은 혹독하기 짝이 없었죠. 가시 박힌 쐐기풀에서 잠을 자야 하고, 맞아도 소리를 지르지 못하게 하는 데다, 일부러 밥을 적게 줘서 훔쳐 먹게 했습니다. 지옥훈련이 따로 없는데요. 이 훈련을 위한 모든 비용(공동 식비와 교육비, 갑옷·방패 비용 등)은 개인이 부담해야 했다는 점도 놀랍죠. 사교육비로 부모들 등골이 휘는 요즘과 비슷한 점이 있달까요.
스파르타는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31-404년) 승리로 그리스의 주도권을 잡고 호황기를 누렸습니다. 하지만 좋은 시절은 잠시뿐. 기원전 371년 신흥국인 테베와의 레욱트라 전투에서 대패하고 몰락하게 됩니다.
한때 최강의 군대를 지녔던 스파르타는 왜 무너졌을까요. 학자들이 꼽는 가장 큰 이유는 인구감소입니다. 오죽하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저서 ‘정치학’에서 스파르타의 인구 감소 문제를 지적했을 정도이죠.
‘페르시아 전쟁사’를 쓴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기원전 479년 스파르타 자유시민 중 성인 남자 인구는 약 8000명이었는데요. 100여 년 뒤 레욱트라 전투 땐 약 1000명 수준이었다는 당대 역사가 크세노폰의 기록이 있습니다. 원래 스파르타는 전투에서 항복하는 걸 수치로 여겨 도망자를 사형에 처하는 법률이 있었는데요. 레욱트라 전투 땐 시민 수가 너무 적어서 도망자를 처형하지 못했을 정도라고 합니다.
100년 만에 인구가 8분의 1로 줄어들다니 대재앙 탓일까요. 기원전 464년 대지진이 일어나긴 했습니다. 하지만 일시적 충격이 아니라 이후 100년 가까이 꾸준히 가파르게 인구가 감소한 건 단순히 지진 탓으로만 돌리긴 어려운데요. 여러 학설이 있지만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스파르타 군대를 세계 최강으로 만든 요인이 인구학적 붕괴를 초래했다는 겁니다. 아래와 같이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①완벽함을 추구하는 순혈주의 티모시 도란 미국 UCLA 역사학 교수는 스파르타의 특이한 생식 메커니즘이 인구학적 재앙을 초래했다고 봅니다. 지나치게 순혈주의에 집착했다는 건데요.
스파르타는 전체 인구의 10~15% 정도인 자유시민이 절대다수의 나머지(중간계층과 노예)를 지배하는 카스트 구조였습니다. 이 엘리트 계급이 되려면 우선 부모 양쪽 모두가 자유시민이어야 했습니다. 또 위에서 언급한 혹독한 훈련(아고게)을 반드시 거쳐야 했죠. 둘 중 하나라도 충족하지 못하면 스파르타 자유시민이 될 수 없습니다.
지배계급 진입을 위한 기준이 상당히 높았던 건데요. 이는 강력한 전사를 기르는 데는 효과적이었을지 모르지만, 전투로 인한 전력 손실을 메우기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특히 대지진에 이어 장기간의 펠로폰네소스 전쟁까지 거치면서 사망자 급증으로 인한 타격이 컸죠. 그런데도 이 까다로운 기준을 포기하지 못한 탓에 지배계급 인구는 형편없이 쪼그라들고 맙니다. 도란 교수는 “스파르타의 극단적인 경쟁 정신은 최고의 전사를 배출하기 위해서였지만, 이 시스템은 최고의 제국주의자를 배출하진 못했다”고 지적합니다.
②늘어나는 부, 불평등의 심화 전체주의 사회인 스파르타를 떠받친 건 평등주의였습니다. 스파르타 시민이면 거의 같은 크기의 영지를 소유하고 있어 빈부차이랄 게 거의 없었죠. 남성시민은 군인 이외의 직업을 선택하는 것이 법적으로 금지돼있었고요. 따라서 다들 고만고만하게 살고 있었는데요.
안정적이던 스파르타 경제를 뒤흔드는 일이 발생합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승리로 돈바람이 불어온 겁니다. 각종 전리품과 금화, 동맹국의 세금이 스파르타로 대거 밀려들었죠.
시민들이 돈에 눈을 뜨자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스파르타에도 빈부 차이라는 게 생깁니다. 돈을 벌려고 대대로 내려온 영지를 팔았다가 영영 가난해진 사람이 있는가 하면, 땅을 넓혀가는 부자도 생깁니다. 결국 약 100개 가문이 전체 영지를 차지하며 소수가 부를 독점하는 결과로 이어지는데요.
이렇게 가난해진 스파르타 시민은 공동식사비와 무기 비용을 내지 못할 지경이 됩니다. 결국 이들은 시민권을 상실하고요. 상당수는 스파르타를 아예 떠납니다. 스파르타가 펠로폰네소스 전쟁 승리로 전성기를 구가했는데도 오히려 인구가 급격히 꺾이게 된 이유이죠. 미국 사학자인 조시아 오버 스탠퍼드대 교수는 “스파르타는 지대를 더 생산적인 방식으로 재분배하지 못했다”며 “지배계급에서 가장 성공하지 못한 스파르타인들이 정기적으로 강등되면서 인구학적·군사적 붕괴를 초래했다”고 설명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지배계급의 폐쇄성과 빈부격차 심화가 결합하면서 스파르타 시민 인구는 급격히 쪼그라들었습니다. 스파르타 군대는 자연히 하위 계급이 대다수를 차지하게 됐죠. 하지만 계급 간 통합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지배계급은 끝까지 아고게 훈련과 토지 소유권을 다른 계급과 공유하지 않았죠. 차별받는 하위 계급 군인들이 이전 스파르타 전사들처럼 용맹하고 충성심 넘칠 순 없었습니다. 결국 기원전 371년 벌어진 레욱트라 전투에서 스파르타군은 수적으로 우세했음에도 대패했고, 스파르타는 역사 속으로 사라집니다.
미혼·무자녀엔 세금! 로마제국 출산장려책
지배계급으로 살아남기 위한 치열한 경쟁, 갈수록 커지는 빈부 격차, 이질적 존재에 대한 배타성. 스파르타 멸망의 기록을 보다 보면 현재 우리가 처한 상황과 오버랩 되는 부분이 적지 않은데요. 스파르타를 이야기한 김에 몇백 년을 뛰어넘어 이 제국의 저출산 이야기도 해볼까 합니다. 바로 로마제국입니다.
로마제국의 멸망도 저출산 탓일까요.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인과관계가 스파르타처럼 뚜렷한 것은 아닙니다. 기근과 질병, 게르만의 침략과 반복되는 내전, 인플레이션과 세금 인상 등. 제국을 몰락으로 이끈 요인이 워낙 많고 서로 얽혀있어서 딱 잘라 말하기 어렵기 때문인데요.
확실한 건 로마제국 인구는 전성기(팍스 로마나, 기원전 27년~서기 180년) 7000만명에서 후기엔 5000만명으로 줄었습니다. 인구 감소는 여러 면에서 제국 멸망에 기여했죠. 노동력 부족으로 농업 생산량이 감소하면서 식량 부족은 심화됐고, 병력 감소로 로마군대가 약화하면서 게르만 용병을 모집해야 했습니다. 납세자가 줄면서 세금 부담은 한층 커졌고요.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건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가 폐위된 476년이지만, 이는 수백 년에 걸쳐 조금씩 쇠락한 결과라고 봐야겠습니다.
로마제국은 일찌감치 인구 규모와 출산율을 걱정해왔습니다. 이 시절엔 인구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여성 1인당 6명 이상의 출산이 필요했습니다. 여성이 출산 중 사망할 확률이 꽤 높은데다(약 2%), 유아 사망률도 높았기 때문이죠(첫해 사망 확률 30%). 하지만 서기 79년 화산폭발로 묻혔던 헤르쿨라네움에서 발견된 여성 해골 분석에 따르면 상류층 여성에게서 태어난 평균 자녀 수는 2명 미만이었습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당시 상류층엔 저출산 풍조가 만연해 있었습니다.
로마의 출산 장려 정책은 역사가 꽤 깊습니다. 기원전 403년에도 결혼하지 않은 노총각에게 벌금을 부과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이죠. 이른바 ‘독신세’를 매긴 건데요. 이런 강력한 결혼·출산 장려정책의 절정은 로마제국의 최전성기를 이끈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절(재위 기원전 27년~서기 14년)이었습니다.
군주제를 확립한 아우구스투스는 엄격한 도덕법을 제정합니다. 25~60세의 모든 로마 남성은 반드시 결혼하게 했고요. 20~50세의 여성은 남편이 사망하면 2년 이내에 재혼하게 했죠(안 하면 상속 받은 재산을 뺏김). 결혼제도를 무력화하는 간음은 공공범죄로 엄격히 취급했고요. 또 세 자녀 이상을 두면 금전적, 직업적 보상을 줬습니다. 예컨대 여성은 셋째를 낳아야 납세 의무를 면제 받을 수 있었고요. 관료를 채용할 땐 자녀가 많은 사람을 우대했죠. 결혼하지 않았거나 자녀가 없는 사람은 상속권을 제한받는 등 경제적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우리가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를 갖지 않는다면 국가가 어떻게 보존될 수 있겠습니까”라고 아우구스투스는 강조했다는데요.
어떤가요. 미혼·무자녀를 경제적으로 차별하는 건 요즘에도 종종 출산 장려책으로 얘기되지 않나요. 그렇다면 이런 강력한 규제로 로마제국의 출산율은 반등했을까요. 아니요. 심지어 아우구스투스 본인 가정에서도 이 법은 별 효과가 없었습니다. 본인도 친자녀는 딸 하나뿐이었는데다, 그 딸이 간통죄를 저질러 로마에서 추방됐으니까요. 결혼과 출산을 장려하는 법은 이후 서기 2, 3세기에도 다시 제정됐다고 하죠. 그때까지도 문제가 전혀 해결되지 않았단 뜻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투스와 로마제국이 남기는 교훈은? ‘당근과 채찍’식 정책만으로는 출산율 제고에 성공할 수 없더라는 겁니다. 리처드 프랭크 UC어바인대 교수는 관련 논문에서 “아우구스투스 법이 시행된 뒤에도 (로마제국) 상류층은 계속 결혼과 출산을 기피했다”면서 “그 깊은 원인, 즉 상류층 남성과 여성 사이의 심오한 심리적 갈등은 더 널리 퍼졌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지적했죠. “상류층은 점점 도시적·개인주의적으로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아우구스투스 법안은 개혁과 복원을 목표로 했지만, 옛 가치에 대한 향수와 새로운 현실에 대한 경멸을 조장하는 데만 성공했습니다.”
출산율을 높이자면서 알게 모르게 향수와 경멸을 조장하는 경우. 사실 지금도 종종 보이지 않나요. 2000여 년 전 로마제국 이야기가 2023년 대한민국 상황과도 어쩌면 크게 다르지 않을지 모릅니다. By.딥다이브
미래를 예측하는 건 어렵습니다. 영국 사회학자 존 맥니콜은 저서 ‘신자유주의적 노년기’에서 “(인구를) 예측할 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내재된 불확실성으로 인해 인구구조 예측이 잘못된 것으로 판명될 것이라는 점”이라고 밝혔죠. 종말론적 인구통계학에 사로잡히는 건 비합리적이란 뜻에서 한 말인데요. 저출산은 분명 큰일이지만, 이대로 국가가 소멸하진 않을 거라 믿고 길을 찾아보시죠. 주요 내용을 요약하자면
-14세기 흑사병 못지않은 인구 감소세로 대한민국이 소멸할까요. 저출산 경고음이 커지고 있습니다.
-인구감소로 멸망한 국가 하면 떠오르는 곳은 스파르타입니다. 배타적 순혈주의에 기반해 지배계급을 구축했지만, 너무 까다로운 기준과 빈부격차 심화까지 겹치면서 100년 만에 인구가 8분의 1 수준으로 쪼그라들었습니다.
-로마제국 역시 멸망하기 전 인구 감소를 겪었죠. 수백 년에 걸쳐 결혼과 출산을 장려하기 위한 강력한 법률을 시행하기도 했는데요. 결과적으로 이런 정책은 다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이미 시대가 바뀌었는데, 옛날로 다시 돌아가자고 외치는 건 소용 없다는 사실을 역사가 말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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