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경제 고금리 후유증]〈4〉 생활고에 번지는 포퓰리즘
스페인 등 국민 달래기 정책 남발… 네덜란드, 反이민 정당 총선 승리
EU 3분기 성장률 ―0.1%로 뒷걸음
“美와 1인당 GDP 차 계속 벌어질것”
“최근 스페인 연립정부는 내년까지 2년간 한시 도입한 횡재세의 적용 기간을 연장하기로 했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대출금리, 에너지 가격이 올라 취약계층에 대한 도움이 절실한 상황입니다.”
앙헬레스 산초 마르티네스 스페인 경제디지털전환부 차관보좌관은 지난달 28일 동아일보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이같이 밝혔다. 마르티네스 보좌관은 이 정책이 법인세를 내는 기업에 이중과세 부담을 지우는 것이란 지적에도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현재의 국면에서 은행과 에너지 회사가 큰 수혜를 봤기 때문에 이들에게 횡재세를 부과하는 것은 정당하다”며 “주요 유럽연합(EU) 국가들도 이미 횡재세를 도입한 바 있다”고 설명했다.
● EU 회원국 89% “횡재세 걷겠다”
팬데믹 이후 이어진 고물가와 고금리로 국민 부담이 가중되면서 유럽을 비롯한 주요 선진국에선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을 좇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그중에서도 각국이 만지고 있는 1순위 대책이 ‘횡재세(windfall tax)’다. KPMG와 미국 조세재단에 따르면 EU 회원국 27곳 중에서 약 89%(24곳)가 자국 은행과 에너지 기업 등에 횡재세를 부과했거나 부과할 계획을 밝혔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금리 인상이 본격화된 지난해 초 이후 유럽 전역에서 횡재세가 도입, 제안된 사례만 30건이 넘는다.
경기 침체로 세수가 줄어들자 유럽 각국에선 이를 만회하기 위한 보다 과격한 정책들이 등장하고 있다. 이탈리아의 관광도시 베네치아는 내년부터 하루만 머무는 당일치기 여행객들을 대상으로 5유로(약 7000원) 입장료를 부과한다. 입장료를 내지 않을 경우 최대 300유로(약 42만5000원)의 벌금을 내야 한다. 이탈리아는 앞서 6월 파스타 가격 상승률이 물가 상승률보다 높아 시민들의 반발 움직임이 거세지자 정부 차원에서 ‘파스타 가격 상한제’를 검토하기도 했다.
극우 포퓰리즘도 득세하고 있다. 지난달 22일 네덜란드 조기 총선에서는 ‘반(反)이민’을 앞세운 자유당이 압도적 승리를 거뒀다. 헤이르트 빌더르스 자유당 대표는 네덜란드의 주택난이 난민·이민자 유입 때문이라 주장하며 국경 통제 강화, 미등록 이민자 구금 및 추방 등의 강력한 반이민 공약을 내걸었다. 영국과 프랑스, 독일 등 주요국에서도 난민 포용이나 기후변화 대응에 반대하는 포퓰리즘 정책이 정치권에서 득세하고 있다.
● 극단적 포퓰리즘에 멍드는 유럽 경제
유럽 국가들이 이런 ‘반시장 정책’도 마다하지 않으며 각자도생하는 건 그만큼 경제 상황이 녹록지 않기 때문이다. 고물가와 에너지 가격 상승으로 국민들의 생활고가 커지자 여론을 달래고 민심을 얻기 위해 무리한 정책들이 남발되고 있는 것이다.
고금리·고물가 국면이 장기간 지속되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잇따르면서 유럽 경제는 그야말로 멈춰 선 상태다. EU의 올해 1분기(1∼3월)와 2분기(4∼6월) 경제성장률은 각각 0.0%, 0.1%였는데 3분기(7∼9월)엔 ―0.1%로 뒷걸음쳤다. EU 집행위원회는 지난달 15일 경제성장 전망치를 하향 조정하며 “고물가로 소비자 구매 심리가 위축됐고, 유럽중앙은행(ECB)의 기준금리 인상으로 기업이 대출·투자를 꺼리면서 유로존 경제가 성장 동력을 잃었다”고 진단했다. 벨기에에 있는 비영리 연구기관 유럽국제정치경제센터(ECIPE)는 보고서에서 “지금 같은 추세가 2035년까지 이어진다면 미국과 유럽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 격차는 오늘날 일본과 에콰도르의 차이만큼 벌어질 것”이라고 예상하기도 했다.
이창민 한양대 경영학부 교수는 “고금리, 고물가 국면에서 생계가 어려워진 시민들의 분노를 잠재우는 데 급급한 상황”이라며 “유럽에선 복합위기에 대응할 리더십이나 경제 정책이 보이질 않는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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