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전 세계적으로 원자력 발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기후 위기로 탄소배출을 줄이는 게 시급한 과제가 되면서 원자력의 필요성이 부각되는데요. 하지만 방사능 사고 위험을 생각하면 걱정스러운 것도 사실입니다.
만약 치명적인 사고 발생 가능성을 없앤 원자로를 만들면 어떨까요. 중국에 이어 미국도 4세대 원자로 중 하나인 용융염 원자로 건설에 본격적으로 나섰다고 합니다. 약 70년 전 ‘핵 추진 항공기’ 구상에서 유래한 기술인 용융염 원자로(MRS, Molten Salt Reactor)를 알아보겠습니다.
잠시 옛날이야기부터 해볼게요. 몇 주 동안 계속 하늘을 날 수 있는 전투기가 개발된다면 얼마나 강력할까요. 냉전시대엔 실제 이런 항공기를 개발하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바로 미국이 개발을 추진했던 ‘핵 추진 항공기’입니다.
인류 최초의 핵 추진 잠수함 노틸러스호(1954년 진수)엔 물로 냉각하는 가압경수로 원자로가 장착됐죠. 이 가압경수로 방식은 이후 전 세계 원자력 발전의 표준이 됐고요. 하지만 비행기에 들어가려면 훨씬 더 작고 가벼운 새로운 방식의 원자로가 필요했습니다. 미국이 고체 대신 액체연료를 쓰고, 물 대신 용융염(고온에 녹아 액체가 된 소금)이 냉각재 역할을 하는 ‘용융염 원자로’ 개발에 나선 이유입니다. 1954년 미국 오크리지국립연구소는 용융염을 이용한 소형 원자로 개발에 세계 최초로 성공했죠.
미 공군은 정말 원자력 항공기를 개발하려는 의지가 있었습니다. 1955~57년 ‘NB-36H’ 폭격기에 소형 원자로를 싣고 수십 차례 시험비행을 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죠. 꼬리에 방사선 마크가 박힌 이 폭격기는 실제 원자력 에너지로 구동되진 않았습니다. 대신 원자로를 싣고 다녀도 비행 시스템과 승무원들은 안전하다(납과 고무로 방사선을 차폐)는 건 확인했죠. 하지만 이 핵 추진 항공기 계획은 논란 끝에 1961년 케네디 대통령에 의해 취소됐습니다. “약 10억 달러를 투자했지만 가까운 미래에 군사적으로 유용한 항공기를 개발할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이유였는데요. 그 후에도 한동안 미국의 용융염 원자로 실험은 계속됐습니다. 오크리지국립연구소는 1965~69년 실험용 용융염 원자로를 가동하기도 했는데요. 그게 끝이었습니다. 1969년 12월 이 원자로는 폐쇄됐고, 미국 정부는 프로젝트를 중단했죠.
시험가동 시작한 중국, 건설 허가 내준 미국
그리고 수십 년이 지난 지금, 잊혀진 기술이었던 용융염 원자로가 다시 살아나고 있습니다. 가장 앞서 나간 건 중국입니다. 2018년부터 고비사막에 용융염 원자로를 건설해온 중국은 지난 6월에 드디어 이 원자로의 시험 가동을 승인했습니다. 중국 상하이응용물리연구소가 시험 운영을 맡았죠.
기술 원조인 미국도 다시 뛰어들었습니다. 다만 정부가 아닌 민간이 개발을 주도하고 있는데요. 이달 12일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는 용융염 원자로 스타트업인 카이로스파워(Kairos Power)의 시범 원자로 건설을 허가했습니다. 미국 테네시주에 건설될 이 1억 달러짜리 프로젝트는 2026년 완공될 예정인데요. 카이로스파워 측은 “미국이 수냉식(물로 냉각)이 아닌 원자로 건설을 승인한 건 50년 만에 처음”이라고 설명합니다.
카이로스파워 외에도 용융염 원자로 개발에 뛰어든 스타트업은 미국과 유럽에 약 25곳이나 있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 빌 게이츠가 설립한 테라파워(TerraPower)도 그중 한 곳이죠.
수십 년에 걸쳐 원자력 시장은 물로 냉각하는 수냉식(경수로, 중수로)이 평정한 상태이거든요. 그런데 왜 이제 와서 다시 액체소금 냉각 방식(용융염 원자로)에 여러 국가와 기업들이 주목하는 걸까요.
멜트다운 없는 안전한 원자로
용융염 원자로의 뚜렷한 장점 때문입니다. 치명적인 사고가 발생할 위험이 거의 없다는 거죠.
원전 사고 중 가장 위험한 게 노심용융(멜트다운, Meltdown)입니다. 냉각수가 제대로 공급되지 못해 내부 온도가 급격히 올라가서 핵연료봉이 녹아내리는 걸 뜻하는데요. 역사상 중대한 원전사고, 즉 1979년 미국 스리마일섬 원전 사고와 1986년 소련 체르노빌 원전 사고, 그리고 2011년 후쿠시마 제 1 원자력 발전소 사고 모두 노심용융이 원인이었습니다.
우라늄원자로는 핵반응을 중단해도 남은 방사선 원소들이 붕괴열을 냅니다. 그래서 며칠 동안 계속 냉각수를 공급해서 열을 식혀줘야만 하는데요.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당시 후쿠시마 제 1 원전은 정전으로 냉각수 주입 펌프의 가동이 중단됐죠. 냉각수 순환은 멈췄고, 원자로 안에 있던 냉각수가 증발해버리면서 핵연료봉이 공기 중에 노출됐고요. 연료봉 온도가 1200도까지 상승해 노심용융이 발생하면서 방호벽이 녹아내리고 수소폭발까지 일어납니다. 만약 끓는 점이 매우 높아서 증발할 일 없는 냉각재를 쓰면 어떨까요. 그럼 냉각재를 보충해줄 필요가 없고요. 사고로 전력이 끊겨도 냉각재가 계속 남아서 열을 식혀줄 테니 훨씬 안전하죠. 바로 이런 장점을 지닌 게 용융염입니다. 용융염의 끓는점은 대기압에서도 1500도 이상으로 매우 높죠. 만약 어떤 사고가 발생해서 용융염 원자로에 전기 공급이 끊긴다면? 그냥 두면 저절로 냉각될 겁니다. 퍼 피터슨 버클리대 원자력공학과 교수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용융염은 끓어오르지 않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매력적입니다. 이것이 바로 원자력 에너지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기술 중 하나로 떠오르는 이유입니다.”
우라늄핵연료봉을 묶은 커다란 다발인 ‘핵연료 집합체’를 쓰지 않는다는 것도 용융염 원자로의 큰 특징입니다. 보통은 액체 핵연료를 쓰고요. 카이로스 파워 경우엔 탁구공만 한 크기의 작은 고체연료를 씁니다.
핵연료 집합체를 쓰지 않으면 좋은 점이 참 여러가지인데요. 일단 원자로 크기를 줄일 수 있고요(핵연료 집합체는 길이가 4m에 달함). 또 지금처럼 18개월에 한 번씩 연료를 교체하기 위해 운전을 정지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계속 가동하면서 연료를 보충해주면 되죠. 아마 온라인으로 연료를 추가하는 식의 무인 운전도 가능할 겁니다. 또 연료봉 폐기물도 덜 생기게 되고요. 용융염은 고온에 강하기 때문에 원자로 운전온도를 기존보다 더 높일 수 있는데요. 작동 온도를 높이면 열효율(시스템에 투입된 열 대비 생산되는 유용한 에너지양)은 높아집니다. 기존 수냉식 원자로의 열효율은 약 32%이지만 용융염 원자로는 45%에 달한다고 하죠.
정리하자면 용융염 원자로는 더 안전하고 편리하고 효율적입니다. 하지만 상용화에 이르려면 실증도 거쳐야 하고, 갈 길이 먼데요. 특히 가장 큰 걸림돌은 이겁니다. 부식.
소금은 여러 금속에 부식을 유발할 수 있죠. 자칫 원자로 용기나 배관이 부식되기라도 하면 방사성 물질이 누출될 수 있으니, 여간 큰일이 아닙니다. 이 때문에 부식에 강한 소재 개발이 중요한 과제입니다.
한국의 MSR 개발 현황은?
이쯤에서 궁금하실 겁니다. 우리나라는 이 새로운 원자로 기술에서 얼마나 와있는지 말이죠. 그래서 한국원자력연구원의 용융염원자로원천기술개발사업단을 이끄는 이동형 단장과 전화로 인터뷰했습니다.
-한국원자력연구원도 용융염 원자로를 몇 년 전부터 연구해오셨죠? “네. 다만 정부의 공식적인 국가연구개발 사업이 된 건 올해 4월부터라서 조금 늦긴 했습니다. 중국은 약 10년 전부터 개발에 나섰고요. 미국과 유럽에선 2018~2019년부터 정부 지원뿐 아니라 민간 자본이 엄청나게 투입되고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 연구원이 설계기술이나 용융염 관련 기술을 어느 정도 확보해놓은 상태에서 시작하는 거라서요. 이제 우리가 좀 더 분발하면 따라잡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중국과 미국을 보면 상업화까진 멀었고, 이제 시범 운영을 막 시작하려는 단계인데요. 우리나라는 아직 그 시범가동 단계까지 가기에도 시간이 좀 걸리겠죠? “저희 사업은 일단 2026년까지 원천기술을 개발하는 것이고요. 이후 실증을 위해서는 다시 계획을 세워 재원을 투입해야 할 겁니다. 다만 고무적인 건 연구원 단독으로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민간 기업들, 현대건설·삼성중공업·HD한국조선해양·센추리가 들어와서 같이 연구개발하고 있습니다. 연구개발에 그치지 않고 상업 목적의 개발을 서두른다는 게 정부 방침입니다.”
-개발할 용융염 원자로의 사용처가 혹시 정해져 있나요? 선박 추진용일까요, 일반 내륙 전기 생산용일까요? “현재는 해양플랜트, 그리고 선박 추진용을 우선 타깃하고 있습니다. 용융염 원자로를 활용해 해양에 적용하려는 노력이 미국·중국·덴마크에서 이미 많이 시도가 되고 있어서, 저희도 그쪽을 목표로 잡았죠. 그런데 해양플랜트이든 선박추진이든 결국 모두 전기를 만드는 것이라서요. 해상에서 실증이 되면 그걸 내륙으로 들여오는 것은 문제가 없을 겁니다.”
-조선사가 용융염 원자로에 특히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동안 조선사가 암모니아·수소·메탄올을 친환경 에너지로 보고 개발해왔는데, 이제는 원자력이 또 하나의 옵션으로 떠올랐습니다. 아무래도 연료탱크가 크면 화물을 많이 싣기 어렵잖아요. 그런 점에서 원자력에 메리트가 있습니다.” -용융염 원자로는 핵폐기물 발생을 크게 줄일 수 있는 게 큰 장점이라고요? “최근 모든 원자로가 핵연료 교체 주기를 매우 길게 가져가는 것을 목표로 기술 개발 중입니다. 지금처럼 18개월마다 교체하는 게 아니라 12~20년 이상 연료를 배출하지 않는 방향으로요. 사용 후 핵연료 발생량을 줄이는 거죠.
또 우리 연구소가 민간과 함께 개발하고 있는 기술이 있는데요. 사용 후 핵연료 안에 플루토늄이 많이 쌓이거든요. 그걸 재처리하지 않고 그 안에서 태울 수 있는 원자로를 개발 중입니다. 그렇게 하면 폐기물 발생량을 더 줄일 수 있죠.”
-그 기술은 어느 정도 개발된 건가요? “개념적으로는 오래전, 그러니까 60년 전부터 나와 있던 기술입니다. 물론 설계에 여러 방법이 필요하겠지만, 가장 중요한 건 실증이죠.”
-용융염 원자로를 만들기 힘든 이유가 부식이라는데요. 아직 해결책을 찾아 나가는 중인가요? “저희뿐 아니라 각 나라의 연구용 원자로 개발회사들이 부식에 강한 물질로 코팅해서 보호하는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자금과 인력을 많이 투입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 솔루션들이 하나씩 발표가 되고 있죠. 물론 핵심 내용은 공개하지 않지만요. 그 부분이 원자력에서는 가장 큰 토픽 중 하나입니다.”
-부식을 막는 건 어렵지 않은 기술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업계에선 훨씬 중요한 이슈이로군요. “안전을 담보해야만 하니까요. 또 선박의 경우엔 수명이 30년인데, 가급적 중간에 교체하지 않는 것이 폐기물이나 모든 측면에서 좋기 때문에 이를 안전하게 보호하려는 노력을 많이 진행하고 있습니다.” By.딥다이브
요즘 소형모듈원자로(SMR, Small Module Reactor)에 대한 관심이 높습니다. SMR이 국내 주식시장에서도 테마로 자리잡았을 정도인데요. 오늘 설명드린 용융염 원자로(MSR) 역시 이런 SMR의 종류 중 하나에 속하죠. 우리가 아는 기존 원자로와는 다른 점이 많아서 재미있는 주제입니다. 주요 내용을 요약하자면
-중국이 올해 6월 용융염 원자로 시험가동을 시작한 데 이어, 미국도 스타트업 카이로스파워의 시범 원자로 건설을 승인했습니다. 액체상태의 소금, 즉 용융염을 이용한 차세대 원자로 개발 경쟁이 본격화됩니다.
-용융염 원자로는 1950년대에 이미 나온 기술입니다. 애초엔 ‘핵 추진 항공기’의 동력원으로 쓰기 위해 개발됐는데요. 이 계획이 취소된 뒤 추진력을 잃고 프로젝트가 중단됩니다.
-수십 년 만에 다시 용융염 원자로가 주목 받는 건 뛰어난 안전성 때문입니다. 소형화, 무인화가 가능하고 열효율이 높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한국도 올해부터 국가개발사업으로 이를 선정해 원천기술 개발에 나섰는데요. 특히 친환경 선박과 해양플랜트 쪽에 중점을 두고 개발할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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