듀프(dupe)를 아시나요? 복제품을 뜻하는 영어 ‘duplication’을 줄여 쓴 단어인데요. 미국을 포함한 서구권 Z세대의 올해 소비 트렌드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듀프 시대’입니다. 복제품,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브랜드 제품을 따라 만든 ‘저렴이’ 제품 소비 열풍이 일고 있는데요.
저렴한 카피제품? 그건 수십 년 전부터 있었던 것 아니냐고요. 그렇긴 한데 예전과 크게 달라진 게 있습니다. 요즘 Z세대는 이런 듀프 소비를 숨기는 게 아니라 오히려 대놓고 자랑한다는 점인데요. 도대체 왜 그러는 걸까요. 상당히 지속될 것만 같은 복제품 소비 트렌드를 들여다봤습니다.
“쇼핑몰에서 쇼핑하다가 정말 귀여운 걸 발견하게 돼요. 그럼 가격표를 보고서 ‘아, 이거 듀프(dupe)를 찾아야지’라고 생각하죠.”
미국 여대생 엘라 린은 비즈니스인사이더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리치아(aritzia), 룰루레몬(lululemon), 어반아웃피터스(urban outfitters) 같은 패션 브랜드를 좋아하는 19살 소녀는 주로 아마존에서 이런 식으로 검색하죠. ‘아리치아 듀프(aritzia dupe)’. 그리고 그렇게 구입한 37달러짜리 아리치아 스웨트셔츠 복제품을 침대 위에 던지는 영상을 찍어 틱톡에 자랑합니다. 정가(118달러)의 반도 안 되는 가격에 아리치아 저렴이를 샀다고 말이죠. 그는 “패션으로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비싼 브랜드 이름을 가질 필요는 없다”고 당당히 말하는데요.
듀프(dupe), 혹은 둡(doop)이라고 부르는 저렴한 카피제품 소비 열풍이 심상찮습니다. 구글 트렌드에 따르면 ‘dupe’로 검색한 건수는 미국에선 최근 13개월, 영국에선 6개월 만에 100% 증가했죠. 틱톡에선 ‘dupe’로 검색하면 향수부터 가구까지, 각종 카피제품 구매를 자랑하는 무수한 영상이 뜹니다. 이런 영상의 조회수가 무려 63억 회에 달하죠. 듀프 소비가 Z세대, 즉 2012~1997년에 태어난 이들의 새로운 트렌드라는 게 보그 같은 패션지부터 파이낸셜타임스 같은 경제매체까지 공통적으로 내놓은 분석입니다. 좀 더 구체적인 수치를 담은 설문조사 결과도 있죠. 시장조사업체 모닝컨설트의 설문조사(10월)에 따르면 미국 성인의 31%가 이런 복제품을 의도적으로 구매한 적이 있다고 답했는데요. 밀레니얼 세대(44%)와 Z세대(49%)에선 이 비율이 훨씬 높았습니다.
Z세대는 단순히 복제품을 더 많이 살 뿐 아니라, 복제품을 사는 이유가 이전 세대와는 다르다는 점이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인데요. 젊은이들이 돈이 없어서, 돈을 아끼려고 카피제품을 사는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틀렸습니다. Z세대에게 듀프 소비는 놀이이자 자랑거리입니다.
싸서? 아니 힙해서!
여기서 잠깐. 이렇게 지적할 분들 있을 겁니다. 카피제품은 그 오리지널 브랜드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 아닌가?
네, 아닙니다. 복제품(듀프)이 이른바 ‘짝퉁’이라 불리는 위조품과 다른 점인데요. 가짜 로고를 새겨 상표권을 침해하거나 특허를 침해하는 위조품은 불법이지만, 그냥 디자인이나 주요 특징을 비슷하게 따라 하기만 한 복제품은 대체로 법적으로는 별문제가 없습니다. 뉴욕대 법대 크리스토퍼 스프리그먼 교수는 “복제품 문화는 오랫동안 매우 활발했고, 일반적으로는 불법이 아니다”라고 이야기하죠. 물론 ‘불법이 아니라고 해서 과연 복제품은 무해한가’에 대해선 다양한 의견이 있지만요(뒤에서 다시 설명).
카피제품은 이전에도 있었지만, 최근 들어 달라진 건 크게 두 가지입니다. ①인기 브랜드 제품을 복제하는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졌습니다. ‘쉬인(Shein)’이나 ‘알리익스프레스’ 같은 미친 속도와 가격으로 유명한 중국 전자상거래 플랫폼이 여기에 한몫 했고요. ②Z세대는 복제품을 샀다는 걸 아주 자랑스럽게 기꺼이 공개한다는 점입니다. 복제품에 대한 부끄러움 같은 건 전혀 없습니다. 도대체 왜 그들은 듀프 구입을 좋아할까요. 미국 시장조사업체 와이펄스의 최근 설문조사 결과(위 그래프)에 따르면 MZ세대 응답자들은 복제품 구입에 대해 압도적으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는데요. 복제품 구입은 큰돈 들이지 않고 ‘럭셔리’한 느낌을 준다고 합니다(69%). 특히 60%는 오리지널 제품을 살 여유가 있어도 여전히 복제품을 선택한다고 답했죠. 또 절반가량은 ‘복제품을 찾는 건 흥이 나는 일’(51%)이라고 응답했습니다. 한마디로 저렴한 복제품을 찾는 것 자체를 즐기는 겁니다.
이를 두고 모닝컨설트는 쇼핑이 일종의 게임화됐다고 분석하는데요. 디자인과 성능은 크게 빠지지 않는데 가격은 훨씬 저렴한 ‘최고의 복제품 찾기’ 게임을 벌이고 있는 셈입니다. 그래서 복제품을 잘 사면 ‘예산에 민감하면서도 안목 있는 소비자’임을 과시할 수 있게 되는 거죠.
마케팅 전문가인 노스웨스턴대학의 자클린 밥 교수는 “이들은 복제품을 ‘명예의 휘장’으로 여기기 때문에 일부러 복제품을 구매한다”면서 “(돈을 아끼려는) 경제적 결정이 아닌 의도적인 큐레이션”이라고 설명합니다. 또 다른 마케팅 전문가인 찰스 린드시 버팔로대 교수는 이렇게 분석하죠. “그들은 자신이 얼마나 많은 돈을 절약했는지 보여주는 걸 좋아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구매하는 제품이 유명 브랜드인지엔 관심이 없는 것 같아요.”
FT는 이를 Z세대의 ‘동지애’로 설명합니다. 소셜미디어 사용이 일상화된 이들은 쏠쏠한 정보를 공유하는 것 자체를 좋아하는데요. 마치 화장법이나 투자 팁을 틱톡으로 공유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복제품 구입 정보도 불특정 다수의 사람과 나누고 싶어하는 겁니다. 크리에이터 에이전시 더피프스의 벨라 할스 연구원은 “저렴한 가격 제품을 찾는 건 승리이자, 소셜미디어에 공유할 수 있는 일로 여겨진다”며 “이들은 정보 공유를 통해 다른 사람들이 패션 비용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도우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대놓고 베끼는 저렴이 브랜드
이런 복제품 소비 열풍에 맞춰 인기를 끄는 브랜드들이 있습니다. 은근히, 또는 대놓고 유명 브랜드의 ‘저렴이’ 제품으로 마케팅하는 경우인데요.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미국에서 현재 가장 잘 나가는 화장품 기업 엘프뷰티(ELF)이죠. 2004년 설립된 이 저가 메이크업 브랜드는 틱톡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면서 2019년 이후 무섭게 성장 중인데요. 주가도 급등해 올해 들어서만 161% 상승했을 정도이죠(55달러→145달러). 엘프의 성장세를 설명하는 다양한 요인이 있지만(가성비, 식물성 원료, 틱톡 마케팅) 유명 럭셔리 브랜드 화장품의 ‘저렴이’ 버전이라는 게 핵심 이유입니다. 예컨대 14달러인 엘프의 ‘헤일로 글로우’ 제품은 유명한 샬롯티벌리 파운데이션(49달러)의 대체품으로 통하면서 엄청나게 팔렸죠. 또 5달러짜리 엘프의 ‘시어 슬릭’ 립스틱은 클리니크의 20달러짜리 베스트셀링 립스틱의 듀프라는 별명이 붙었고요.
제2의 엘프뷰티를 노리는 또 다른 브랜드들이 있죠. 향수 브랜드 도시어(Dossier)는 대놓고 럭셔리 브랜드와 거의 비슷한 상품을 70~90% 저렴한 가격에 판매한다는 컨셉으로 광고합니다. 상품 설명에 아예 ‘조말론 우드세이지앤씨솔트에서 영감을 받았음’이라고 써놓고 가격까지(조말론 205달러, 도시어 49달러) 비교해놨죠. CRZ요가는 32달러짜리 레깅스를 아마존에서 판매하는 브랜드인데요. 틱톡에선 룰루레몬의 98달러짜리 얼라인 레깅스의 저렴이 버전으로 통합니다. 전자상거래 분석회사 정글스카우트 데이터에 따르면 CRZ요가는 한 달에 8만개 이상의 제품을 판매 중이라는 군요.
복제품 열풍에 편승해 새로 나오는 브랜드도 있습니다. 온라인 패션브랜드 퀸스(Quince)는 유명 브랜드와 같은 공장에서 옷·가방·신발을 제조해 반값에 판매한다고 주장하는데요. 예컨대 데인도버(Dagne Dover)의 195달러짜리 백팩 복제품을 99달러에, 버겐스톡의 140달러짜리 코르크 밑창 샌들 복제품을 70달러에 판매하면서 ‘50% 싸다’고 광고합니다.
복제품이 인기 끌면 손해? 이익?
복제품 소비가 당당한 트렌드로 자리 잡았으니, 이를 이용하려는 기업이 늘어나는 건 당연해 보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들죠. 오리지널 브랜드가 제품 개발과 마케팅까지 다 해놓은 걸 그대로 베껴서 돈을 벌다니. 불법은 아니더라도 문제 있는 것 아닐까요.
실제 복제품을 매우 불편해하는 이들은 많습니다. 미국 가구 브랜드 헬러의 존 에델만 CEO는 “당신이 구매하는 모든 복제품은 디자인의 미래를 죽인다”고 비판하죠. 복제품으로 인해 진품 소비가 줄어든다면 창작자는 어떻게 창작을 이어갈 수 있느냐는 한탄인데요. 이 때문에 또 다른 가구업체 블루닷은 아예 복제품 감시를 위한 전용 예산을 따로 마련해뒀습니다. 블루닷의 제품 사진을 무단 도용하거나, 베껴도 너무 심하게 많이 베낀 복제품 판매 사이트를 발견하면 회사 변호사가 직접 연락을 하죠. 존 트리스타코스 블루닷 창업자는 “두더지 잡기 게임처럼 느껴지지만 어쩔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다른 시각도 있습니다. 복제품이 늘어난다고 해서 오리지널 제품 판매가 줄어드는 건 아니라는 겁니다. 아예 소비하는 사람 자체가 다르다는 건데요. 이런 시각으로 보면 복제품이 인기를 끄는 건 오리지널 브랜드 입장에서 썩 나쁜 일이 아닙니다. 그만큼 유명한 브랜드라는 걸 증명해주는 일일 뿐인 거죠. 복제품의 긍정적인 면을 찾아 역이용한 브랜드가 바로 룰루레몬인데요. 지난 5월 룰루레몬은 ‘듀프 스왑’ 행사를 진행했습니다. 인기 제품인 얼라인 레깅스의 복제품을 산 소비자를 대상으로 이를 진품과 무료로 교환해준 건데요. LA에서 오프라인으로 진행된 이 행사에 약 1000명의 고객이 참여했다고 합니다. 이 중 절반은 룰루레몬 정품을 한 번도 사본 적 없는 고객이었죠. 룰루레몬 CEO 캘빈 맥도널드는 이 행사를 두고 “주요 목적은 새로운 손님을 확보하고 레깅스의 독창적인 브랜드 인지도를 높이는 거였다”면서 “대단한 성공이었다”라고 평가합니다. 룰루레몬 레깅스에 관심 있는, 하지만 98달러를 주고 살 생각을 못했던 고객에게 실물을 보여주며 ‘역시 비싼 정품은 다르긴 다르네’라는 반응을 끌어내는 기회로 삼은 거죠.
복제품이 판치는 것 자체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보는 기업도 많습니다. 화장품 브랜드 이솝(Aesop)도 그런 경우인데요. 이솝의 최고고객책임자인 수잔 산토스는 보그 인터뷰에서 “그것(복제품)은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며 “대안 브랜드가 적절한 선택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게 바로 민주주의”라고 말하죠.
그런데 궁금합니다. 과연 Z세대는 더 나이가 들고 경제력이 생긴 뒤에도 지금처럼 복제품에 열광할까요. 아니면 돈이 많아지면 선택이 달라질까요. 두고 볼 일이긴 하지만 모닝컨설트는 ‘듀프 문화가 젊은 소비자들의 습관에 영구적으로 자리잡을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습니다. 기본적으로 브랜드 충성도가 매우 낮은 세대이기 때문이라는데요. 2031년이 되면 미국에선 Z세대 소득 수준이 밀레니엄 세대를 추월하게 될 거라고 하죠. 단순히 ‘가성비’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복제품 소비 트렌드에 앞으로 더 주목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By.딥다이브
시성비(타이파)에 이어(딥다이브 시성비 편 참고) 저렴이 복제품(듀프)이라니. 빠르게 변화하는 소비 트렌드를 따라잡긴 해야겠는데, 그것이 참 알듯 말듯하단 말이죠. 오늘 기사는 주로 미국 이야기를 다뤘지만 아마 한국 시장도 이를 따라가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주요 내용을 요약하자면
-올해 미국 Z세대 소비 트렌드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듀프(Dupe)입니다. 저렴한 복제품이 젊은 층 사이에 폭발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데요. 향수나 화장품, 레깅스는 물론 각종 생활용품에서도 다양한 복제품이 팔리고 있습니다.
-카피제품이야 예전부터 있었지만 달라진 건 이를 소셜미디어를 통해 자랑한다는 점입니다. 쇼핑을 일종의 게임처럼 하기 때문인데요. 오리지널보다 훨씬 싸게 복제품을 사는 걸 ‘승리’로 여깁니다.
-이런 트렌드에 맞춰 대놓고 저렴한 복제품임을 내세우는 브랜드도 생겨났습니다. 유명 럭셔리 상품과 품질은 비슷한데 가격은 절반임을 광고하는 식인데요. 동시에 트렌드를 역이용해 품질과 브랜드력을 과시한 룰루레몬 사례도 있습니다.
-복제품이 불법은 아니라지만 창작자의 의욕을 꺾는 것 아닐까요. 반면 어차피 소비자층이 다르기 때문에 실제 오리지널 브랜드에 피해가 될 건 없다는 분석도 나오는데요. 당분간 복제품에 대한 뜨거운 열기가 쉽게 식을 것 같지 않기는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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