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판 햇빛 30% 이상을 전기로… 기존 실리콘 태양전지선 꿈도 못 꿔
한국 10년 가까이 기술 선도했지만… 사우디-中 공격적 투자로 치고나와
한국 연구비 삭감… “이러다 뒤처져”
한국이 10년 가까이 기술을 선도해 온 ‘차세대 태양전지’ 분야에 지각변동이 일고 있다. 최근 1년 사이 후발 주자인 사우디아라비아와 중국이 빠른 속도로 치고 올라오며 선두를 뺏겼다. 일본도 이 분야 주도권을 되찾겠다고 나서면서 경쟁은 더 치열해졌다.
● 새로운 차원의 태양전지
이달 초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가 발간한 ‘테크놀로지 리뷰’는 2024년의 10대 미래 기술 중 하나로 ‘초고효율 태양전지’를 꼽았다. 신소재 페로브스카이트를 실리콘 위에 쌓아 올린 차세대 태양전지이다. 필름처럼 얇은 페로브스카이트를 얹으면 전지 효율은 놀랍도록 향상된다. 기존 실리콘 태양전지는 이론적으로 도달할 수 없는 효율인 ‘마의 30%’ 벽을 뛰어넘을 수 있다. 태양전지판에 닿는 햇빛 양 중 30% 이상을 전기로 바꿀 수 있다는 뜻. 효율이 높아질수록 발전비용은 절감된다.
다만 이 차세대 태양전지가 대량생산돼 깔리려면 앞으로도 5년가량 더 시간이 걸릴 것으로 전망된다. 가장 큰 문제는 페로브스카이트가 수분과 열에 취약하다는 점. 이를 야외에서 10년 넘게 쓸 수 있도록 내구성을 높이는 동시에, 효율도 지금보다 더 끌어올려야 한다.
그동안 이와 관련한 연구의 선두엔 한국이 있었다. 2014년 한국화학연구원은 페로브스카이트를 더 균일하고 치밀한 박막으로 만들 수 있는 ‘제조 레시피’를 개발해 냈다. 이후 한국 연구진은 줄곧 최고 효율 기록을 경신해 왔다. 이 분야를 우리보다 먼저 개척한 스위스·일본보다도 기술력 면에서 오히려 앞선다는 평가를 받았다.
● 사우디·중국의 놀라운 부상
하지만 최근 1∼2년 사이 상황이 급격히 달라졌다. 그전까지 존재감 없었던 사우디아라비아와 중국이 급부상했기 때문이다.
‘포스트 석유 시대’에 대비해 태양광 발전에 과감하게 투자 중인 사우디아라비아는 유럽 출신 과학자를 영입해 속도를 내고 있다. 그 결과 지난해 6월 사우디아라비아의 킹압둘라과학기술대(KAUST)는 페로브스카이트와 실리콘을 결합한 ‘탠덤 태양전지’ 효율을 33.7%로 끌어올리며 신기록을 썼다.
이 기록은 불과 다섯 달 만에 깨진다. 지난해 11월 중국의 거대 태양광 기업 론지솔라가 33.9% 효율을 공인받으며 세계 1위 자리에 오른 것. 업계는 충격에 빠졌다. 중국은 값싼 전기와 노동력을 무기로 실리콘 태양전지 시장을 장악한 지 오래다. 하지만 그동안 차세대 태양전지 기술에선 한참 뒤진다고 여겨졌다. 그런데 론지솔라는 차세대 태양전지 기술을 처음 선보인 지 1년도 채 안 돼 단숨에 선두로 치고 나왔다. 론지솔라 창업자 리전궈 회장은 “중국 태양광 산업은 지속적인 기술혁신을 통해 계속 세계를 선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이제 우리나라가 차세대 태양전지 기술을 리드한다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분위기가 바뀌었다. 아직은 우리가 집중하면 따라잡을 수 있지만, 이대로 1년만 더 머뭇거리면 상당히 어려워질 거다. 워낙 기술 진화 속도가 빠르기 때문이다.”
페로브스카이트 분야의 세계적 석학인 석상일 울산과학기술원(UNIST) 특훈교수의 냉철한 진단이다. 대량생산이 머지않은 차세대 태양전지 산업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중국을 포함한 각국이 투자를 아끼지 않으며 뜨거운 관심을 쏟고 있지만, 유독 한국만은 딴판이다. 이 분야가 ‘태양광 산업’으로 묶이면서 관심과 지원이 줄었기 때문이다. 정부의 연구개발 예산 삭감으로 페로브스카이트 태양전지 관련 올해 연구비는 과제에 따라 30∼60% 삭감됐다. 강봉주 한국화학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연구비가 줄어들면 어쩔 수 없이 (기술 개발) 목표를 줄일 수밖에 없다”며 “빠르게 치고 나가야 할 시기인데, 이러다 한국이 아주 잘하던 분야를 다른 나라에 빼앗겨 버리게 될까 걱정”이라고 말했다. 한국의 탠덤 태양전지 효율은 29.9% 수준이다.
● 일본은 ‘에너지 안보’로 접근
한국의 이런 흐름은 일본과도 대비된다. 일본은 지난해 4월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페로브스카이트 대량 생산체제 구축에 대응하겠다”라고 밝힌 데 이어 올해 관련 예산 548억 엔(약 5000억 원)을 편성했다.
기존 실리콘 태양전지는 대부분을 중국 수입에 의존해야 하지만, 페로브스카이트는 원료부터 완제품까지 모두 국산화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실리콘 태양전지와 달리 제조 과정이 간단하고 전기가 적게 들어 친환경적이란 점도 일본 정부가 적극 나서는 이유다.
무엇보다 또다시 중국에 산업 주도권을 뺏길 순 없다는 경계심이 작용했다. 일본 자원에너지청의 이노우에 히로오 국장은 최근 월스트리트저널 인터뷰에서 “(과거 실리콘 태양전지에서) 우리는 기술에서 승리했지만 사업에서 패했다”며 “(차세대 태양전지는) 투자 규모와 속도에서 뒤처지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다.
신재생에너지 인프라를 공격적으로 확대 중인 미국 정부도 차세대 태양전지 지원에 나섰다. 지난해 4월 미국 에너지부는 관련 프로젝트에 1800만 달러(약 242억 원)의 예산을 투입했다.
석 교수는 “차세대 태양전지는 한국이 우위에 설 수 있는 흔치 않은 미래 산업”이라며 “에너지는 우리의 생존이 달린 분야인 만큼 더 많은 관심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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