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美, 반도체장비 中수출 규제에… 韓 가장 큰 타격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4월 9일 03시 00분


[美 반도체 규제 피해보는 한국]
中, 자급률 높이며 韓장비 줄여
韓 수출 20% 줄고 美는 3% 감소
日 4% 증가, 네덜란드 150% 폭증

미국이 2022년 10월 중국에 대한 첨단 반도체 장비 수출을 금지한 이후 주요 반도체 장비 생산국 가운데 한국이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의 대중국 반도체 수출은 소폭 감소에 그쳤고 규제에 동참한 일본과 네덜란드의 대중국 반도체 수출은 오히려 증가했다. 하지만 아직 규제에 동참하지 않은 한국의 장비 수출량은 20% 넘게 줄었다. 중국이 규제 확대를 우려해 미리 레거시(범용) 장비를 사들이고 자급률을 높이는 과정에서 기술력이 상대적으로 뒤지는 한국산 장비가 배제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8일 동아일보가 유엔 무역통계를 통해 지난해 중국의 반도체 장비 수입액을 집계한 결과, 한국산 장비 수입액은 44억7609만 달러(약 6조 원)로 2022년(56억1937만 달러) 대비 20.3% 감소했다. 노광, 세정, 식각, 증착, 검사 등 반도체 장비에 해당하는 19개 국제품목분류코드(HS코드)를 분석한 결과다.

같은 기간 미국산 장비 수입액은 95억5190만 달러에서 92억5381만 달러로 3.1% 줄었다. 일본과 네덜란드 장비 수입은 오히려 늘었다. 일본산 수입액은 156억8398만 달러에서 164억1512만 달러로 4.7% 증가했다. 네덜란드는 32억2108만 달러에서 80억7306만 달러로 150.6% 폭증했다.

이 같은 차이는 수출 규제 이후 중국이 자급률을 높이면서 대체하기 쉬운 한국산 장비부터 수입을 줄였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미국의 수출 규제가 첨단에서 레거시로 확대될 것을 우려해 장비들을 사재기하는 과정에서 한국산이 우선 순위에서 밀렸다는 지적도 나온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가 중국 내 생산라인의 증설 및 업그레이드에 대해 소극적으로 태도가 바뀐 것도 영향을 미쳤다. 국내 한 반도체 장비회사 사장은 “미국이 규제를 하는데 오히려 미국과 일본, 네덜란드산 수요가 폭증하며 부르는 게 값이 됐다”며 “반면 당장 아쉬울 게 없는 한국산 장비의 인기는 크게 떨어졌다”고 말했다.

中, 美 규제 피해 반도체 국산화… ‘대체 가능’ 韓 장비 수출 급감

[美 반도체 규제 피해보는 한국]
中, 기술 우위 선진국 장비 사재기… 네덜란드-美-日 기업 中 매출 껑충
일부 ‘범용’ 속여 우회 수출 의혹도
“中기술대체 쉬운 한국산 수요 감소… 장비산업 경쟁력 키워야 낙오 면해”

“결국 중국에서 미국, 일본, 네덜란드 장비 회사들의 영향력만 키우는 결과가 됐습니다. 그동안 중국 수출 의존도가 높았던 한국이 가장 큰 피해를 봤죠.”

8일 국내 한 반도체 증착(蒸着) 장비 기업 대표는 한숨을 쉬며 이같이 말했다. 아직 한국은 공식적으로 미국의 첨단 반도체 장비 수출 규제에 동참하지 않았다. 심지어 국내 기업이 중국에 수출하는 반도체 장비는 첨단이 아닌 레거시(범용) 장비가 대부분이다. 그런데도 한국의 대중국 반도체 장비 수출액은 1년 만에 20% 넘게 뚝 떨어졌다.

중국이 반도체 국산화에 나서면서 기술력이 뒤처진 한국 장비가 먼저 대체된 영향이 가장 크다. 국내 업체들의 주요 공급처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중국 내 투자를 줄인 것도 영향을 미쳤다. 일각에선 일부 해외 기업들이 중국이 수입한 장비를 첨단 공정에 사용할 것을 알면서도 범용 공정에 사용한다며 목적을 둔갑시켜 우회 수출했다는 의혹도 제기된다.

● 中, 일본 네덜란드산 장비 사재기

8일 동아일보가 유엔 무역통계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중국은 특히 지난해 하반기(7∼12월) 해외 반도체 장비를 주로 사들였다. 지난해 중국의 국가별 장비 수입액 중 미국산은 59.3%, 일본산은 55.5%, 네덜란드산은 70.8%가 각각 하반기에 집중됐다. 이때는 일본과 네덜란드 정부가 미국의 대중 반도체 장비 수출에 공식적으로 동참한 시기다. 또 미국의 규제가 첨단 장비에서 레거시 장비로 확대될 우려가 커지자 중국이 기술 수준이 높은 선진국들의 장비를 우선적으로 사재기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글로벌 주요 장비 기업들의 중국 매출 비중은 눈에 띄게 성장했다. 미국 최대 반도체 장비업체 어플라이드 머티리얼스는 지난해 회계연도 기준 4분기(8∼10월) 전체 매출에서 중국 비중이 44%였다. 수출 규제가 적용되지 않았던 2022년 같은 시기(20%) 대비 2배 이상으로 뛰었다. 미국 램리서치와 일본 도쿄일렉트론도 지난해 3분기(7∼9월) 중국 매출 비중이 각각 48%, 43%로 2022년 동기보다 18%포인트씩 증가했다.

중국이 첨단 반도체 대신 레거시 분야를 집중 육성하는 방향으로 역량을 집중하면서 한국산 장비가 먼저 대체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레거시 반도체는 수익성이 첨단만큼 높진 않지만 자동차, 가전 등 전 세계 반도체 수요의 80%를 차지한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글로벌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시장에서 중국의 레거시 반도체 점유율은 지난해 31%에서 2027년 39%로 확대될 전망이다. 김혁중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중국이 레거시 산업을 육성하는 과정에서 수준 높은 미국이나 일본 장비를 집중해서 들이되 상대적으로 자국 기술로 대체하기 쉬운 한국 장비부터 수요가 감소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 삼성·SK의 대중 투자 감소도 영향

미국의 압박에 삼성전자, SK하이닉스가 중국 내 공장 업그레이드 및 증설을 축소하면서 ‘도미노 효과’로 국내 장비 기업들이 타격을 입었다는 분석도 나온다. 미국은 삼성과 SK의 중국 내 공장에 대해 장비 반입 규제를 유예하고 있지만, 반도체지원법(칩스법)을 통해 미국에서 정부 보조금을 받을 경우 중국 내 투자를 제한하고 있는 상황이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전무는 “국내 장비사들의 중국 수출 상당 부분이 삼성과 SK 물량”이라며 “국내 제조사들이 중국 투자를 줄이자 연쇄적으로 장비 기업들도 어려워졌을 것”이라고 했다.

일부 해외 기업들이 규제 사각지대를 이용해 수익을 냈을 것이라는 의혹도 제기된다. 지난해 말 미 연방의회 산하 자문기구인 미중경제안보검토위원회(USCC)는 연례보고서에서 “미국의 장비 규제가 (중국 견제에) 효과적이지 않다는 주장이 있다”며 딜런 파텔 반도체 분석가의 주장을 인용했다. “장비 회사들은 웬만한 장비는 중국에 판매하고 있다. (첨단 공정인) 5나노를 위한 증착, 식각, 세척, 코팅 등의 장비들은 28나노에도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USCC는 그러면서 “(중국) 수입업자들이 레거시 장비에 사용될 것이라고 주장하면 수입이 가능하다”며 “실제 해당 장비가 첨단 공정에 사용되는지 확인하는 것은 어렵다”고 했다.

로이터에 따르면 미국 최대 반도체 장비 회사 어플라이드 머티리얼스는 지난해 말 중국 최대 파운드리 업체 SMIC에 장비를 우회 수출한 혐의로 미 당국의 조사를 받았다. SMIC는 지난해 화웨이에서 설계한 7nm(나노미터·1nm는 10억분의 1m)급 칩 생산에 성공하며 세계를 놀라게 한 회사다.

전문가들은 지정학적 불확실성 속에서 낙오되지 않으려면 결국 국내 장비 산업의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이 아무리 반도체 제조 강국이더라도 소부장(소재·부품·장비)을 포함한 반도체 생태계를 단단히 갖추지 못하면 국제 정세에 더 쉽게 흔들리기 때문이다. 글로벌 10대 장비 회사는 미국, 일본, 네덜란드 기업들이 모두 독차지하고 국내 기업은 이름을 올리지 못하고 있다. 한 반도체 장비 회사 사장은 “네덜란드도 ASML의 극자외선(EUV) 노광장비와 같은 독보적인 기술력이 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유리한 협상을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반도체 규제#삼성전자#sk하이닉스#장비산업 타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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