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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품업계에는 ‘불경기일수록 매운 음식이 잘나간다’는 속설이 있다. ‘한국인의 소울 푸드’라고 불리는 라면은 특히 더 그렇다.
본래 우리나라 라면은 맵지 않은 ‘하얀국물’에서 시작했다. 삼양식품 창업주인 전중윤 명예회장은 1960년대 초 사람들이 5원짜리 꿀꿀이죽(미군 부대에서 먹고 남은 잔반을 끓여 만든 잡탕)을 사먹기 위해 줄을 선 모습을 보고 고민에 빠졌다. 그는 식량난의 해결책으로 일본에서 먹은 인스턴트 라면을 떠올렸고, 일본 묘조(明星) 식품에서 기술과 기계를 도입해 1963년 삼양라면을 내놓았다.
닭 육수를 사용하는 초기 삼양라면은 별로 인기가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한국 사람들은 맵고 짭짤한 맛을 좋아하니 고춧가루를 더 넣으면 좋겠다”고 조언하면서 ‘빨간국물’ 라면이 탄생했다.
그리고 라면은 1960년대 중반 정부가 보릿고개를 극복하기 위해 ‘혼분식(混粉食) 장려책’을 펼치면서 전성기를 맞이한다. 라면의 대중화다. 농심의 전신인 롯데공업주식회사의 ‘롯데라면’이 출시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본격적인 매운맛 라면의 시대는 1986년 농심이 열었다. 농심 창업주인 신춘호 명예회장의 성이면서도 맵다는 뜻의 ‘매울 신(辛)’을 내건 ‘신라면’의 등장이었다. ‘사나이를 울리는’이라는 신라면의 유명한 광고 문구는 아직까지도 쓰일 정도다.
점점 매워지는 라면시장… 대표 제품은?
해를 거듭할수록 매운 라면의 인기는 커지는 모양새다. 국물라면, 볶음면 구분할 것 없이 매운맛을 강조한 신제품이 줄지어 출시하고 있다. 가장 매운 라면으로 알려진 건 ‘염라대왕라면’이다. 현재는 판매되고 있지 않다. 가장 인기 있는 제품은 볶음면 ‘불닭볶음면’과 국물라면 ‘신라면’이다. 두 제품은 더 매운맛인 ‘핵불닭볶음면’과 ‘신라면 더 레드’까지 선보이고 있다. 이밖에도 ‘틈새라면’, ‘열라면’, ‘킹뚜껑’, ‘맵탱’ 등이 매운맛 라면을 대표하고 있다. 라면 후발주자인 하림도 최근 ‘더미식 장인라면 맵싸한맛’을 내놓으면서 매운맛 라면시장에 뛰어든 상황이다.
수많은 매운맛 국물라면 중 4개 제품을 꼽아 비교해보기로 했다. 첫 번째는 가장 최근 출시한 ‘더미식 장인라면 맵싸한맛’이다. 재료 본연의 매운맛을 구현하기 위해 부트졸로키아, 하바네로, 청양고추, 베트남고추 등 매운맛으로 유명한 4종의 고추를 사용했다는 게 하림의 설명이다. 두 번째는 매운맛 원조 농심 ‘신라면’의 후배인 ‘신라면 더 레드’다. 당초 한정판으로 출시됐으나, 출시 4달 만에 2000만봉 판매를 돌파할 정도로 큰 인기를 끌면서 정식 제품으로 출시됐다.
세 번째로는 편의점 GS25의 자체 브랜드(PB) 상품인 ‘틈새라면’이다. 서울 명동에서 시작한 라면 전문점의 메뉴 ‘빨계떡’을 제품화한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매운맛 원조 2인자로 여겨지는 ‘열라면’의 후속작인 ‘마열라면’이다. 두 제품의 스코빌지수는 사실 비슷하다. 다만 마열라면이 마늘과 후추가 추가된 제품이라 선정했다.
단종된 ‘염라대왕라면’, ‘불마왕라면과 카테고리가 다른 ‘킹뚜껑’(컵라면), 불닭볶음면류(볶음면)는 제외했다. ‘맵탱’도 ‘마늘 조개’, ‘흑후추 소고기’, ‘청양고추 대파’ 등으로 제품이 세분화되기 때문에 비교 대상에는 포함시키지 않았다.
똑같은 매운맛 아냐… 매운맛 ‘4대장’ 살펴보니
▼내용물 보통 라면은 면과 분말 또는 액상 스프, 건더기스프(후레이크) 등으로 구성된다. 면에서 가장 주목할 라면은 더미식 장인라면 맵싸한맛(이하 장인라면)이다. 건면을 사용한 기존 제품과 달리 유탕면을 사용했다. 다른 세 가지 제품과 달리 액상 스프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도 특징이다. 고온 건조로 제조된 분말스프는 건조취가 강해 재료 본연의 풍미를 잘 느끼지 못해 액상으로 본연의 맛과 향을 담겠다는 하림의 고집이다. 신라면 더 레드는 전첨 분말스프와 후첨 분말스프를 사용한다.
건더기스프는 차이를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우선 건파는 모든 라면에 포함됐다. 건청경채도 틈새라면을 제외한 다른 라면에 들어가는 단골 재료였다. 이밖에 건당근(장인라면, 마열라면)과 건표고버섯(신라면 더 레드, 틈새라면, 마열라면), 건미역(장인라면, 틈새라면) 등이 주로 사용됐다.
기본 재료는 비슷하지만 4개 라면은 각각 ‘필살기’ 재료가 있었다. 장인라면은 페페론치노가 포함됐다. 액상스프에 4종의 고추를 넣은 것도 모자라 건더기스프에 1종을 추가한 셈이다. 신라면 더 레드는 건조한 지단과 식물성단백질로 만든 고명이 특징이다. 이와 함께 고추맛 고명도 포함됐다.
틈새라면은 건조 소고기맛 어묵을 재료로 넣어 식감을 살렸다. 또한 4개 라면 중 유일하게 건홍피망을 사용한다. 마열라면은 마늘후추 블록이 포함됐다. 이 블록이 라면의 이름대로 핵심 역할을 한다.
▼매운맛 흔히 매운맛의 기준은 스코빌지수(SHU)로 판단한다. 가장 맵다는 염라대왕라면의 스코빌지수는 2만1000SHU이다. 매운맛의 기준이 되는 신라면이 3400SHU인 걸 감안하면, 6배 넘게 매운 셈이다.
비교군으로 선정한 4개 라면 중에서는 틈새라면의 스코빌지수가 9413SHU로 가장 높다. 2위는 ‘매운맛 막내’인 더미식 장인라면 맵싸한맛(8000SHU)이다. 이어 신라면 더 레드(7500SHU), 마열라면(5013SHU) 순으로 높았다. 마열라면은 열라면과 매운맛 차이가 크게 없지만, 대신 마늘과 후추가 추가돼 보다 조화로운 매운맛을 구현했다는 게 오뚜기 측 설명이다.
실제로 체감으로는 장인라면이 가장 맵게 느껴졌다. 장인라면은 다른 라면에 비해 면이 가장 굵고 통통했다. 국물은 여러 재료들이 조합되면서 고추기름 같은 역할을 한다. 마치 짬뽕을 먹는 것 같은 느낌이다. 액상 스프를 사용해 국물도 상대적으로 걸쭉했으며, 페퍼론치노가 통으로 들어 있어 싸한 맛이 느껴졌다. 제품명을 단순히 ‘매운맛’이 아닌 ‘맵싸한맛’으로 지은 게 이해되는 부분이었다.
신라면 더 레드는 밸런스가 좋은 매운맛 국물라면이다. 기본적으로 국물이 깔끔하다는 느낌이다. 소고기와 표고버섯 육수를 진하게 우려내 무게감도 느껴졌다. 틈새라면도 전체적으로는 신라면 더 레드와 비슷하다. 차이가 있다면 국물이 무게감이다. 틈새라면은 마치 생태탕 같은 생선 국물요리의 가볍게 시원한 느낌이다. 그래서 스코빌지수가 가장 높음에도 불구하고 체감은 신라면 더 레드정도였다.
마열라면은 다른 세 가지 라면과 매운 맛을 비교하기엔 무리가 있다. 매운 음식을 좋아한다면 거리낌 없이 먹을 수 있는 정도다. 대신 마늘과 후추맛이 강조됐다는 점이 매력이다. 블록 포장을 뜯을 때부터 강하게 풍기는 마늘 후추향은 라면을 먹을 때도 느낄 수 있다.
▼가격 제품을 선택하는 데 맛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가격이다. 우선 가장 저렴한 건 틈새라면(이하 서울 편의점 기준)이다. 1봉지당 1200원으로 경쟁업체의 오리지널 라인에 있는 제품과 큰 차이가 없는 가격이다. 신라면 더 레드와 마열라면은 1500원으로 동일했다. 딱 오리지널에 변형을 준 스페셜 제품 라인의 가격 포지션이다.
가장 비싼 장인라면(이하 서울 편의점 기준)은 1봉지당 2200원이었다. 사실 장인라면에 대한 가격 지적은 브랜드 론칭 시기부터 있었다. 장인라면의 가격은 하림의 식품 철학과 연관이 있다. ‘신선하지 않으면 들어오지 못하고, 최고의 맛이 아니면 나갈 수 없다’는 것이다. 이번 제품의 경우도 국내외 다양한 고추를 재료로 사용한 점이 단가 상승 요인으로 작용했다.
어디까지 매워질까?… 해외도 빠진 ‘매운맛’
매운맛 열풍은 국내뿐이 아니다. 2021년 유럽 시장에 이어 2022년 미국 스페셜티식품협회(SFA)에서 식품 트렌드로 선정할 만큼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특히 신라면과 불닭볶음면은 해외매출 비중이 해마다 늘어날 정도다. 일종의 ‘챌린지’ 형태로 숏폼 콘텐츠가 확산하면서 마케팅 역할을 톡톡히 했다. 게다가 K-콘텐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인기가 사그라지지 않는 모양새다. 최근에는 미국 유명 래퍼인 래퍼 카디 비(Cardi B)가 불닭볶음면을 먹고 "재미있는 제품"이란 영상을 올리기도 했다.
식품업계에서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이후 전 세계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경기 침체와 한류가 만들어낸 현상으로 해석한다. 업계 관계자는 “매운맛 제품의 인기가 국내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다”라며 “불경기 속 출시된 매운맛 제품에 대한 관심이 한류를 타고 해외로 확산하고, 매운맛의 중독성까지 널리 퍼지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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