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플레이션을 이기는 정부는 없습니다. 국민들은 성장 못 하는 것은 용서해도, 인플레이션을 못 막으면 분노할 겁니다.” 2022년 3월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워크숍에서 경제학자가 했던 조언입니다. 그리고 그 경고가 이번 총선에선 현실로 다가왔는데요. 한국만의 상황은 아닙니다. 지난 2년 동안 콜롬비아·브라질·아르헨티나·폴란드·파나마 등, 여러 나라가 인플레이션 영향으로 정권이 바뀌기까지 했죠.
올해 11월 대선을 앞둔 미국은 어떨까요? 경제는 호황이지만 인플레이션 탓에 조 바이든 대통령의 재선에 먹구름이 끼었다는 분석이 이어지는데요. 오늘은 인플레이션이 정치에 미치는 영향을 들여다보겠습니다.
‘바이든 대통령의 재선 전망이 인플레이션에 대한 지속적인 두려움으로 인해 흔들리고 있다.’ 지난 12일 파이낸셜타임스(FT)는 최근 실시한 미국 유권자 여론조사 결과를 이렇게 전합니다. 바이든 경제정책에 반대한다(58%), 바이든 정책이 경제를 해친다(49%)는 응답 비중이 모두 전달보다 높아졌는데요. 이들 응답자에게 현재 경제적으로 가장 스트레스를 주는 것은? 단연 물가상승(80%)이었습니다. 참고로 ‘경제를 누가 더 잘 다루느냐’는 질문에선 줄곧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가 바이든 대통령보다 앞서고 있죠(5월 조사에선 트럼프 41% 바이든 35%).
참 아이러니한 결과가 아닐 수 없습니다. 높은 경제성장률, 역대급으로 낮은 실업률, 사상 최고를 경신 중인 주식시장. 지표상으로 미국 경제는 바이든 대통령 취임 이후 호황을 구가하고 있거든요.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까요. 트럼프 정부와 바이든 정부의 첫 3년 데이터를 비교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지표로 봤을 때 바이든 취임 이후 미국 경제는 강하게 성장하고 있고, 무엇보다 일자리를 엄청나게 창출해냈습니다. 하지만 유권자들은 이런 ‘바이드노믹스(Bidenomics)’ 성과를 좀처럼 알아주지 않죠. 도대체 왜 유권자가 생각하는 경제 상황은 실제 경제지표와 다를까요.
이와 관련해 각종 분석이 이어지는데요. 가장 흔한 건 언론 탓이란 겁니다. 경제에 대한 부정적인 뉴스보도가 늘어난 게 소비자들이 ‘경제가 나쁘다’라고 생각하는 것과 관련 있다는 분석인데요. 다만 그 인과관계는 불분명합니다. 이를 연구한 브루킹스연구소의 밴 해리스는 이렇게 묻습니다. “소비자들은 뉴스 때문에 경제에 대해 더 부정적입니까? 아니면 뉴스가 소비자의 믿음에 맞춰 더 부정적인 이야기를 보도하고 있습니까?” 후자일 가능성이 있다는 거죠.
또 다른 분석은 원래 경제가 다시 좋아져도 이를 국민이 인식하게 되는 데는 원래 시간 차가 존재한다는 겁니다. 예컨대 조지 부시 대통령이 재임했던 1990년 7월 시작된 경제불황은 1991년 봄 공식적으로 끝났는데요. 그런데도 빌 클린턴은 1992년 대선에서 “문제는 경제야, 이 바보야(It‘s the economy, stupid)!”라는 표어를 앞세워 부시를 꺾고 승리했죠. 실제로는 18개월 전 이미 미국 경제는 바닥을 치고 살아나는 중이었는데도 말이죠.
인플레이션이란 나쁜 정치
그리고 오늘 이야기하려는 주제는 이게 다 인플레이션 때문이란 겁니다. 아무리 경제성장률이 높고 실업률이 낮고 경제가 좋아도, 물가를 잡지 못하면 소용없다는 건데요. 앞에서 언급했던 김형태 김앤장 수석이코노미스트의 발언(인플레이션을 이기는 정부는 없다)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미국 인플레이션은 이제 잡히지 않았느냐고요? 그렇긴 하죠. 2022년 한때 9%를 웃돌았던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최근엔 3%대로 안정됐으니까요. 그런데 여기서 알아두셔야 할 게 있습니다. 소비자들은 ‘물가상승률’이 아니라 ‘물가 수준’ 자체에 반응합니다. 물가 상승 속도(빨리 오르느냐 천천히 오르느냐)보다는 절대 가격(가격이 높냐 낮냐)이 소비자 입장에선 훨씬 더 중요한 거죠.
아무리 인플레이션이 둔화해도, 마이너스로 돌아서지 않는 한 가격은 계속 오릅니다. 물가상승률이 3%이든 1%이든, 소비자에 와닿는 건 ‘2020년보다 지금 물가가 훨씬 높다’는 사실이죠. 바이든 대통령이 취임한 2021년 1월 이후 3년 동안 제품과 서비스 가격은 이 정도 올랐습니다. 임대료 19.5%, 중고차·트럭·육류는 20%, 레스토랑과 식료품 21%, 항공료 23.5%, 전기료 28%, 가스 34.6%, 계란은 37.4%, 자동차 보험료 44%.
바이든 정부는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2년 연속 실업률 4% 미만을 기록했죠. 고용에 있어서는 빛나는 성과를 자랑하는데요. 유권자들은 경제를 평가할 때 실업률보다 인플레이션에 초점을 맞춥니다. 이건 비합리적인 걸까요? 꼭 그렇게만 볼 건 아닙니다. 인플레이션은 이자율 상승과 실질임금 감소로 이어지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지표이고요. 무엇보다 실업과 달리 모든 유권자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보통 사람들에게 무역수지는 뉴스에나 나오는 수치이고, 실업수당 청구 건수는 실직한 사람이 아닌 한 큰 의미 없죠. GDP 성장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체감하는 경제상황은 GDP 성장률에 반영되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하지만 인플레이션은 다릅니다. 그 변화를 누구나 바로 알아차릴 수 있죠. 정부 통계 발표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마트나 편의점에서 장 볼 때마다,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을 때마다, 온라인으로 쇼핑할 때마다 소비자들은 달라진 가격표를 확인하고 이렇게 반응하죠. “가격이 왜 이래?”
특히 가격이 오른 제품이 식료품이라면 그 영향은 클 수밖에 없습니다. 연구에 따르면 소비자들은 식료품·휘발유처럼 자주 사는 물건 가격은 아주 잘 기억합니다. 대신 작년에 산 세탁기나 침대 가격은 잊어버리죠. 미국에서 가구·가전제품 같은 고가품 가격이 하락세이지만 소비자들은 ‘가격이 다 뛰었다’고 여기는 이유입니다. 햄버거나 과자, 과일을 사는 데 전보다 더 많은 돈이 드는 건 사실이니까요. 게다가 그 가격이 당분간 떨어질 것 같지도 않죠.
물론 팬데믹과 우크라이나 전쟁, 기후변화 같은 문제가 겹친 상황에서 과연 정부가 인플레이션을 얼마나 통제할 수 있느냐는 의문입니다. 하지만 지난해 네덜란드 중앙은행 보고서에 따르면 국민 10명 중 7명 이상은 ‘인플레이션을 낮게 유지하는 것이 정부의 임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 정부가 할 수 있느냐와 별개로, 유권자들이 그렇게 믿고 있다는 게 중요하죠.
경제학적으로는 인플레이션이 무조건 나쁜 건 아닙니다. 경기가 좋아지면서 물가도 덩달아 오르면 이를 ‘좋은 인플레이션(또는 착한 인플레이션)’이라고 부르기도 하죠. 이를 두고 브루킹스연구소의 윌리엄 갈스턴은 이렇게 말합니다. “(경제학과 달리) 정치학에선 인플레이션이 문제라는 게 훨씬 더 명확합니다. 일시적이든 구조적이든 인플레이션은 ‘나쁜 정치’입니다. 대중은 자신의 최고 관심사에 무관심한 것처럼 보이는 대통령을 용서하지 못합니다.”
물가 충격과 정권 교체
그럼 인플레이션이 높으면 정권이 바뀌냐고요? 역사적으로 볼 때 다 그런 건 아니지만(예-지난해 튀르키예 대선), 그럴 확률이 높아집니다. 미국 정치컨설팅 기업 유라시아그룹의 로버트 칸 이사에 따르면 말이죠. 1970년 이후 전 세계에서 발생한 57건의 인플레이션 충격 이후 선거에서 정권이 교체된 비율은 58%로 나타났습니다. 특히 인플레이션 충격이 일어난 지 2년 안에 선거가 일어났을 땐 4번 중 3번꼴로 정권교체가 일어났죠. 그는 이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인플레이션은 (현 정권이) 좌파이냐 우파이냐와 상관없이 현재 권력을 잡은 사람을 벌합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이 최근 사설에서 지적한 것도 바로 이 점인데요. 미국의 최근 8명 대통령의 첫 번째 임기 소비자물가상승률 그래프를 제시합니다. 바이든 대통령이 연평균 5.5%로, 인플레이션으로 악명 높았던 지미 카터 대통령(10.3%) 다음 2위에 해당하죠. 아시다시피 카터 대통령은 결국 재선에 실패했습니다.
WSJ은 이렇게 덧붙입니다. “민주당원들은 1984년 재선에 성공한 로널드 레이건 시대의 평균 (인플레이션) 5.1%를 지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건 과거(이전 정부)와 비교하는 것입니다. (…) 유권자들은 레이건부터 트럼프까지 6번의 대통령을 거치면서 인플레이션이 낮아지는 것에 익숙해졌습니다. 그러다 바이든 정권하에서 갑자기 인플레이션이 급등했습니다.”
누가 이겨도 물가는 불안하다
좀 더 긴 역사를 보면 미국 민주당과 공화당, 어느 쪽도 인플레이션을 다루는 데 특별히 나아 보이진 않습니다. 1953~2020년(아이젠하워부터 트럼프까지)을 비교하면 민주당 정권은 평균 인플레이션이 3.35%, 공화당은 3.5%로 도긴개긴이니까요.
11월 대선을 앞두고 양당이 내놓은 정책은 어떨까요. 일단 바이든 정부는 대기업과 최상위 부자들에 부과하는 세금을 늘리겠다는 부자증세를 주장하죠. 이것만 보면 ‘증세→재정 적자 축소→통화량 감소→인플레이션 둔화’라는 공식엔 들어맞긴 한데요. 문제는 동시에 대중국 관세 인상도 추진 중이라는 겁니다. 중국산 철강·알루미늄 관세를 지난달 3배 인상하도록(7.5%→25%) 미국 무역대표부(USTR)에 지시한 데 이어, 중국산 전기차·배터리·태양광 패널 관세 인상 계획도 14일 발표할 텐데요. 중국 견제와 자국 제조업 육성이란 취지이지만, 인플레이션을 자극할 건 뻔합니다.
트럼프 후보는 아예 중국뿐 아니라 미국으로 들어오는 모든 수입품에 10% 보편관세를 새로 부과하겠다고 공약하며 한술 더 뜨는데요. 아울러 “바이든의 세금 인상 정책을 대신해 중산층·상위층·하위층·비즈니스 계층에 대규모 감세를 하겠다”며 전 계층 감세를 공약으로 내세운 상황입니다. 인플레이션을 잡겠다면서 세금을 낮춰 경제에 더 많은 돈을 쏟아붓겠다니, 영 앞뒤가 맞진 않네요.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훗날은 생각하지 않고 화끈한 정책을 내놓는 거야 흔한 일이죠. 인플레이션을 잡겠다며 내놓은 정책이 되레 경제를 쑥대밭으로 내놓은 대표적인 사례로는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있는데요. 닉슨 대통령은 1971년 8월 15일 인플레이션에 대응한다며 경제의 모든 물가와 임금을 90일 동안 동결하는 무지막지한 행정명령을 발표했습니다. 언론과 경제학계는 기절했지만, 여론조사에서 75%가 이를 찬성했고 단기간엔 효과가 있는 것처럼 보였죠. 이듬해 대선에서 닉슨 대통령은 압승을 거두며 재선에 성공했는데요. 이후 미국 경제는 전대미문의 스태그플레이션(경기침체+고물가)에 처하며 가라앉습니다. 미국 정치가 역사에서 배워서 이런 실수를 되풀이하진 않기를 바랍니다. By.딥다이브
인플레이션은 힘이 참 셉니다. 주식시장을 들었다 놨다 하고, 유권자 여론을 뒤흔들고, 정권을 위협하죠. 그렇기 때문에 언론이 물가 기사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주요 내용을 요약해드리자면
-대선을 6개월 앞둔 시점, 여론조사에 따르면 바이든 경제정책에 반대한다는 유권자가 더 늘어나고 있습니다. 미국 경제는 호황인데도, 바이든은 경제에 있어 상당히 부정적인 평가를 받습니다.
-그 이유는 인플레이션에 있습니다. 실업률이나 GDP 성장률과 달리 인플레이션은 누구나 생활 속에서 바로 느낄 수 있는 경제지표입니다. 전 국민 모두 영향을 받기 때문에 특히 강력합니다. 물가 상승률(오르는 속도)보다는 물가 수준 자체가 중요합니다.
-인플레이션 쇼크는 종종 정권교체로 이어집니다. 최근 8명의 대통령 중 가장 높은 임기 중 물가상승률을 기록한 바이든 대통령은 초조할 수밖에 없는데요. 그렇다고 해서 인플레이션을 단숨에 잡을 화끈한 정책은 없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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