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중의 기본, 화이트 셔츠의 재발견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5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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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머니룩 트렌드 따라 부상
남성용에서 중성적 의상으로
무궁무진한 스타일링 가능해
포멀과 캐주얼 아우르는 아이템

화이트 셔츠는 포멀과 캐주얼을 아우르는 전천후 패션 아이템이다. 이번 2024 봄·여름 컬렉션에서는 상·하의를 한 벌로 연출하는 올
 화이트룩이 두드러졌다. 알버스 루멘은 엉덩이를 덮는 긴 기장의 셔츠와 롱 스커트로 드레시한 무드를 연출했다. 알버스 루멘 사진 제공
화이트 셔츠는 포멀과 캐주얼을 아우르는 전천후 패션 아이템이다. 이번 2024 봄·여름 컬렉션에서는 상·하의를 한 벌로 연출하는 올 화이트룩이 두드러졌다. 알버스 루멘은 엉덩이를 덮는 긴 기장의 셔츠와 롱 스커트로 드레시한 무드를 연출했다. 알버스 루멘 사진 제공
부드러운 소재와 순백의 컬러, 단정한 셔츠 깃, 소맷부리 같은 것들…. 천천히 살필수록 진가가 드러나는 옷들이 있다. 기본 중의 기본, 화이트 셔츠가 그렇다. 1990년대의 미니멀리즘이 패션계를 휩쓸며 상류층의 고상한 패션을 뜻하는 ‘올드머니 룩(Old Money Look)’이 트렌드로 급부상하면서 화이트 셔츠의 진가가 더욱 드러나고 있다.

화이트 셔츠의 정식 명칭은 남성용 슈트 재킷 안에 넥타이를 곁들여 입는 중의를 뜻하는 ‘드레스 셔츠(Dress Shirt)’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와이셔츠’라고 불린다. 이는 오래전 일본인들이 발음하기 편하게 부른 데서 유래한 것. 기본적으로 셔츠는 목 부위의 칼라와 긴 소매에 싱글 또는 더블 커프스가 달린 구조로, 생각보다 더 다양한 디자인이 존재한다. 허리 라인의 유무와 면과 리넨, 실크 소재의 혼방률, 심지어 칼라와 커프스의 모양과 간격, 각도의 미묘한 차이에 따라 입는 사람의 전체적인 인상이 달라진다.

스타일링도 무궁무진하다. 단추를 한두 개 풀거나 밑단을 묶어 입기도 하고, 칼라 단추를 잠근 채 아래쪽 단추는 모두 풀어 요즘 힙한 스트리트 스타일을 연출할 수도 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잘 빠진 화이트 셔츠 한 장은 절대 실패할 리 없는 전천후 아이템인 셈이다.

가브리엘라 허스트는 하늘하늘한 소재로 된 긴 기장의 셔츠를 길게 늘어뜨린 셔츠 드레스 스타일을 선보였다. 가브리엘라 허스트 사진 제공
가브리엘라 허스트는 하늘하늘한 소재로 된 긴 기장의 셔츠를 길게 늘어뜨린 셔츠 드레스 스타일을 선보였다. 가브리엘라 허스트 사진 제공
본래 셔츠는 남성의 상반신용 속옷이었다. 영어의 어원은 헐렁한 원피스형 속옷을 뜻하는 고대 노르만어인 ‘스키르트(Skyrt)’에서 파생했다고 한다. 기원은 고대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오리엔트부터 아시리아 지방의 몸에 꽉 끼는 모직 셔츠가 전형이다. 특히 그리스 로마인들은 주름 잡힌 겉옷인 ‘토가(Toga)’ 안에 허리 밑까지 내려오는 낙낙한 ‘튜닉(Tunic)’을 속옷으로 받쳐 입었는데 중세에 와서 이 튜닉에 깃과 소맷부리가 더해지면서 비로소 셔츠와 비슷한 형태를 갖추게 됐다. 16세기 무렵에는 깃과 소맷부리를 셔츠에 탈착할 수 있도록 고안해 더욱 다양한 스타일을 즐길 수 있도록 했다.

지금처럼 면이나 모직 소재의 유연한 셔츠가 보편화된 것은 19세기 중반부터다. 이 무렵 셔츠는 경제적인 계층을 가르는 도구로도 작용했다. 밝은 색상의 셔츠는 세탁을 자주 해야 하므로 사무직 종사자들이 주로 이용한 반면, 먼지에 노출되기 쉬운 육체노동을 하는 노동자들은 쉽게 때가 타지 않는 짙은 색상의 셔츠를 입어 ‘화이트칼라(White-collar)’와 ‘블루칼라(Blue-collar)’라는 용어가 생겨나기도 했다.

20세기까지만 해도 화이트 셔츠는 사무직 일을 하는 깔끔한 신사의 상징처럼 여겨지곤 했다. 이를 깨뜨린 건 1920년대 코코 샤넬이 등장하면서다. 여성에게 코르셋 대신 셔츠를, 스커트 대신 바지를 선사하며 성별과 계층의 경계를 단번에 허물어뜨렸고, 남성의 전유물이던 화이트 셔츠가 여성복의 영역으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특히 마돈나, 캐서린 헵번, 에바 가드너 등 당대 스타일 아이콘이 가득했던 1940년대에는 화이트 셔츠가 여성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누렸다.

우아하고 세련되고 지적이기까지 한 화이트 셔츠의 영향력은 1970년대 페미니스트 운동이 일면서 가속화됐다. 이때부터 화이트 셔츠는 ‘중성적인’ 의상으로 변모했다. 1980년대 스타일 아이콘인 다이애나 스펜서가 긴 별거 끝에 찰스 왕세자와 이혼한 뒤 선보인 화이트 셔츠 차림은 약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훌륭한 스타일의 교과서 역할을 한다. 깔끔한 화이트 셔츠에 단추는 두어 개 풀고 소매를 팔꿈치 위까지 둘둘 걷어올린 뒤 슬림한 팬츠와 벨트, 로퍼를 더해 마무리하는 식이다. 화이트 셔츠의 또 하나의 상징적 순간으로는 1992년 미국 보그 100주년 기념호 표지를 들 수 있다. 보그 편집장 애나 윈터가 10명의 슈퍼모델에게 ‘갭(GAP)’ 브랜드의 화이트 셔츠를 입히며 여성의 파워를 시각적으로 드러냈다.

매기 마릴린은 화이츠 셔츠에 빈티지한 데님 팬츠를 매치해 캐주얼한 스트리트 패션을 보여줬다. 매기 마릴린 사진 제공
매기 마릴린은 화이츠 셔츠에 빈티지한 데님 팬츠를 매치해 캐주얼한 스트리트 패션을 보여줬다. 매기 마릴린 사진 제공
이번 시즌 런웨이만 봐도 화이트 셔츠의 파워는 여전하다. 특히 상하의가 한 벌로 이어지는 올 화이트 룩이 대세이다. 반듯한 화이트 셔츠와 하이웨이스트 팬츠의 조합으로 멋과 실용성 모두를 사로잡은 로에베와 빅토리아 베컴이 대표적인 예다. 엉덩이를 덮는 긴 기장의 셔츠와 발목까지 오는 롱스커트로 드레시한 무드를 연출한 알버스 루멘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하늘하늘한 소재의 맥시 셔츠를 드레스처럼 연출한 셔츠 드레스도 눈에 띄었다. 발렌티노는 오버사이즈 실루엣의 셔츠 위쪽 단추를 몇 개만 잠그고 나머지는 모두 풀어헤친 채 길게 늘어뜨려 걸을 때마다 드레스를 보는 듯한 우아한 패션 신을 연출했다. 가브리엘라 허스트는 플리츠 장식과 히든 단추 디테일로 미니멀 룩의 정석을, 본디본과 심카이는 허리의 컷 아웃과 리본 스트링 장식으로 클래식한 무드는 잃지 않으면서 세련된 포인트를 줬다.

사실 순백의 화이트 셔츠는 무엇을 더하든 제약이 없다. 어떤 스타일이든 자연스럽게 녹아들며 특유의 클래식한 멋까지 한 스푼 더해 주니까. 속옷으로 출발해 포멀과 캐주얼까지 아우르며 이토록 오래도록 사랑받아 온 화이트 셔츠. 이번 시즌은 그 어느 때보다 화이트 셔츠의 무한한 변주가 예상된다.

#봄-여름 컬렉션#화이트룩#트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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