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월 한국의 중국산 전기차 수입액이 4억6571만 달러(약 6352억 원)를 기록했다. 전년 동기(4311만 달러) 대비 증가율이 980%에 달했다. 핵심 자동차 시장인 미국과 유럽연합(EU)이 중국산 전기차를 겨냥해 제재를 강화하자 중국이 한국으로 물량을 쏟아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같은 기간 미국의 제재 대상인 중국산 철강 수입량도 크게 증가해 이 같은 분석을 뒷받침하고 있다.
29일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1∼4월 대중 무역적자는 43억910만 달러(약 5조8776억 원)다. 이 기간 중국산 전기차 수입액이 10배 이상으로 증가해 눈길을 끌었다. 조성대 무역협회 통상연구실 실장은 “미국의 인플레이션감축법(IRA)과 EU가 추진하는 관세 인상 조치의 직격탄을 맞은 중국산 전기차가 한국으로 향한 것”이라며 “중국 내에서 남아도는 생산분을 밀어낼 창구 중의 하나로 한국을 꼽은 것 같다”고 분석했다.
미국은 물론 인도, 브라질, 칠레 등이 반덤핑 관세를 부과하기로 한 중국산 철강 1∼4월 수입량도 전년 동기 대비 1.4% 증가했다. 같은 기간 철강의 대중 무역적자는 18억7636만5000달러(약 2조5618억 원)였다. 증가율이 낮아 보이지만 지난해 한국의 중국산 철강 수입량이 전년 대비 29.2% 증가하면서 정점을 찍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간과할 수치가 아니라는 것이 철강업계의 설명이다. 국내 주요 철강회사의 한 임원은 “지난해부터 국내 유통가보다 평균 20% 낮은 저가 중국산 철강재가 국내 철강업계를 혼탁하게 만드는 현상이 심해지고 있다”고 했다.
중국산 배터리 수입도 증가해 1∼4월 대중 무역적자액은 11억4802만5000달러(약 1조5671억 원)였다. 철강과 배터리 적자 규모가 각각 1조5000억 원을 넘어선 것이다.
“‘알테쉬’(알리익스프레스, 테무, 쉬인)의 저가 공세가 한국 산업 전반으로 확대된다고 생각하면 된다. 초격차 기술력이 없는 한국 산업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미중 갈등 장기화와 유럽연합(EU) 등의 제재 동참 움직임 속에 수출길이 막힌 중국산 전기차, 철강, 배터리 등이 한국으로 밀려오자 한 철강 기업 임원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은 일부 산업에서 중국산이 대거 몰려오고 있지만 그 분야가 갈수록 늘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전보희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연구원 동향분석실 수석연구원은 “세계 수출량에서 중국의 비중은 1995년 6.9%에서 2022년 18.3%로 급증했는데 전기차와 배터리, 풍력 등 친환경 산업군의 생산 점유율, 수출량이 절반을 넘기거나 그에 달할 정도로 영향력이 크다”고 말했다. 그런 중국산 제품이 수출길을 잃고 한국으로 밀려 들어올 수 있는 것이다.
● 물량 공세에도 보호장벽 없는 철강 업계
철강은 중국이 해외로 ‘밀어내기’ 하는 대표적인 산업군이다. 세계철강협회에 따르면 올해 1∼4월 중국의 전체 조강 생산량은 3억4370만 t으로 전년 동기 대비 3% 줄어든 반면 이 기간 철강 수출(3502만 t)은 27% 증가했다. 중국 건설업과 부동산 경기 침체로 남아도는 물량을 해외로 수출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 조 바이든 정부는 14일 중국 철강 관세를 기존 0∼7.5%에서 25%로 3배 넘게 인상하며 장벽을 높게 세웠다. EU도 지난해 10월 철강·알루미늄·비료·전기·시멘트·수소제품 등 6개 품목의 생산 과정에서 나오는 탄소 추정치에 일종의 세금을 부여하는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를 시행했다.
미국과 EU의 대중 규제 후폭풍이 한국에 몰려오고 있다. 1∼4월 중국산 전체 철강 수입량은 전년 동기 대비 1.4% 증가한 320만 t에 달했다. 중국산 열연제품 수입량은 코로나19가 심각하던 2020년에는 106만 t이던 것이 지난해에는 179만 t으로 크게 늘었다. 후판의 경우 국내산은 t당 약 100만 원대에 거래되지만 중국산은 이보다 20% 이상 낮은 80만 원대에 거래된다.
상황이 이런데도 한국 철강사들은 중국산 열연과 후판에 대한 반덤핑을 국내 무역위원회에 제기하지 못하고 있다. 포스코와 현대제철은 반덤핑 신청을 검토하고 있지만 열연 제품을 가공해 판매하는 국내 중견 철강사들은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반덤핑 관세가 부과되려면 중국 철강사들이 정부로부터 부당한 지원을 받고 있는 것이 드러나야 한다.
양평섭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초청연구위원은 “중국 정부의 자료를 바탕으로 중국산 철강재에 부당한 지원이 있었다는 것을 밝히는 것은 매우 어렵다”며 “중국에서 보복할 수도 있기 때문에 미국이나 EU처럼 관세를 올리거나 추가 세금을 물리는 것도 쉽지 않다”고 말했다. ● 전기차 업계도 전운 감돌아
철강 이외에도 미국과 EU 등이 중국산에 대해 관세를 높였거나 높일 예정인 배터리와 관련 소재, 전기차 등도 한국 시장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EU에서도 유럽판 인플레이션감축법(IRA)으로 불리는 핵심원자재법(CRMA)을 추진하고, 중국산 전기차에 대한 보조금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미국, 유럽의 장벽이 높아지고 있기 때문에 해당 분야의 중국산 제품들이 한국이나 동남아 등으로 향할 수 있다.
중국 비야디(BYD)를 비롯해 지리자동차의 프리미엄 브랜드 ‘지커’는 최근 베이징모터쇼에서 한국 진출 준비 소식을 전했다. 중국산 전기버스는 이미 국내 시장 점유율이 50%를 넘어섰다.
구기보 숭실대 글로벌통상학과 교수는 “중국 정부가 그간 막대한 보조금을 투입하여 육성해온 전기차나 태양광, 배터리, 범용 반도체 등 현재 무역제재 대상이 되고 있는 중국 제품의 생산량 자체는 줄어들 기미가 없어 보인다”라며 “한국과 동남아 등 제3국에 밀어내기 수출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결국 중국에 대한 반덤핑 관세를 부과하는 방법도 강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유종철 대한상의 통상조사팀장은 “현재 한중 자유무역협정(FTA)은 중국이 강점을 보이는 상품 무역에서의 개방이 중심”이라며 “서비스·투자 후속 협상을 통해 한국이 상대적으로 강한 게임이나 드라마, 의료 등 서비스 분야의 개방을 확대해 무역수지 균형을 맞추는 방법도 고려해 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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