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가 인터넷 혁명에 열광했던 1990년대 말. 뜨거웠던 ‘닷컴 골드러시’ 시대에 열심히 곡괭이와 삽을 팔던 기업이 있었습니다. 스위치, 라우터 같은 네트워크 장비를 공급하는 시스코가 그 주인공이었죠. 1999년 8월 연례보고서에서 시스코의 존 챔버스 CEO는 자랑스럽게 밝혔습니다. “시스코가 4년 전 인터넷이 우리 삶을 바꿀 거라고 예측했을 때 이는 대담한 발언으로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이젠 이를 의심하는 사람이 거의 없죠. 우리는 업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수익성 좋은 회사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1995년 22억 달러였던 시스코 매출은 2000년 189억 달러로 불어났죠. 그 기간 평균 매출 증가율은 연 55%에 달했습니다. 시스코의 이런 성장은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았습니다. 1995년 초 2달러가 채 되지 않았던 시스코 주가는 수직상승해 2000년 3월 27일, 80달러를 찍습니다. 1998년 초(9.68달러)와 비교해도 주가 상승률은 무려 727%. 시스코가 마이크로소프트(MS)를 제치고 전 세계 시가총액 1위(5700억 달러)에 오른 겁니다. 이런 기세라면 시스코가 역사상 최초로 시총 1조 달러의 기록을 달성할 거란 장밋빛 전망이 가득했습니다.
그 정점에서 시스코의 주가수익비율(PER)은 어마어마했습니다. 주가가 주당순이익(2000년 0.39달러)의 205배에 달했으니까요. 그야말로 ‘미친 밸류에이션’이었죠. 하지만 월가는 크게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주가 상승에 맞춰 목표주가를 끌어올리기에 바빴죠. 당시 체이스 함브레히트&퀴스트의 한 애널리스트는 이를 이렇게 정당화합니다. “시스코는 매우 인상적인 성장 기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금융계는 올해 이익의 배수가 아니라 3~4년 후 수익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모든 게 무너집니다. 정점을 찍은 뒤 시스코 주가가 폭락하기 시작한 건데요. 1년 만에 시가총액 85%가 날아갔고, 2002년 10월엔 주가가 8.06달러까지 빠집니다. 10분의 1토막 난 거죠.
매출은 3배, 주가는 반토막
흔히 닷컴버블이라고 하면 실체 없이 막연한 기대감에 기술주 주가가 급등하는 걸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시스코는 거품 같은 닷컴은 아니었습니다. 배너 광고가 아니라 스위치·라우터라는 실체 있는 제품을 파는 기업이니까요. 그래서 당시 시스코 성장은 시장의 실제 수요를 반영하는 걸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버블이 터지면서 그게 아니었다는 게 드러납니다. 낮은 금리로 넘치던 유동성과 이로 인한 과잉·중복 투자가 연 55% 매출 성장의 동력이었던 겁니다. 205배 PER을 정당화했던 성장세는 버블이 만든 신기루였던 셈이죠. 재고가 쌓여갔고, 2001년 3월 결국 첫 대규모 정리해고를 시행해야 했습니다. 순이익은 2001년 적자로 돌아섰고, 2002년엔 첫 매출 감소를 기록합니다.
20여년이 지난 지금, 시스코 주가는 얼마일까요. 12일 종가 기준 45달러. 2000년 3월의 최고가와 비교해 44% 낮습니다. 그동안 한 번도 주가는 80달러 근처에도 못 갔죠.
실적이 24년 전만 못하냐고요? 아니요. 2023년 시스코는 역대 최대인 570억 달러 매출을 기록했습니다. 주당순이익(EPS)은 3.07달러로 늘었고요. 2000년(매출 189억 달러, EPS 0.39달러)과 비교하면 훨씬 더 돈 잘 버는 탄탄한 기업이 됐습니다. 시장점유율은 여전히 1위입니다.
시스코가 업계의 승자가 될 거라던 24년 전 투자자들의 전망이 어떤 면에서 맞았던 겁니다. 다만 문제는 주가였을 뿐. 회사에 아무 문제가 없고 돈을 잘 벌고 있어도, 주가가 터무니없이 높다면 그 주식은 계속 갈 수가 없는 겁니다.
엔비디아와 비슷한 점, 다른 점
시스코 과거사를 자세히 들춘 건 엔비디아 때문입니다. 시스코와 엔비디아, 두 회사를 비교하는 분석이 요즘 자꾸 나오는데요.
엔비디아의 주가 급등세가 워낙 극적이기 때문이죠. 2023년 이후 1년 반 만에 주가가 757%나 뛰었는데요. 엔비디아는 애플과 MS를 잇는 시가총액 3위(3조1900억 달러)의 기업이 됐습니다. 주가 그래프만 보면 1999년의 시스코와 비슷해 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또 공통점이 있죠. 엔비디아 역시 현대판 골드러시의 곡괭이 판매자라는 점입니다. 전 세계 AI 기업들은 기술 개발을 위해 엔비디아의 고성능 GPU를 사려고 줄을 섰습니다. 워낙 수요가 넘치다보니 엔비디아는 가격을 마음껏 높여 팔 수 있죠. 시스코 장비 없이 인터넷이 없었듯이, 엔비디아 GPU 없인 AI도 없습니다.
이런 닮은 점 때문에 시스코 주가 폭락의 강렬한 기억은 엔비디아 비관론의 근거로 종종 거론됩니다. 아크인베스트먼트의 캐시 우드CEO가 지난 3월 투자자 편지에서 밝힌 엔비디아 전망도 그랬는데요. 이런 내용입니다.
“(GPU) 용량의 과잉 구축을 정당화할 만큼 (AI) 소프트웨어 수익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지 않는다면, 특히 클라우드 고객이 지출을 일시 중단하고 초과 재고를 조정할 수 있습니다. 장기적으로 닷컴 시대의 시스코와는 달리 AMD와 클라우드 서비스 기업, 테슬라도 AI 칩을 설계하고 있기 때문에 (엔비디아와의) 경쟁이 심화할 겁니다.”
악시오스도 최근 기사에서 시스코와 엔비디아 주가 그래프를 나란히 보여주며 이렇게 지적합니다. “AI 기업들이 기술의 여러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이러한 특수 칩(GPU)에 대한 수요가 약화되거나 사라질 수 있고, AI 열풍은 멈출 겁니다. 25년 전에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모든 기업이 온라인에 접속하는 데 필요한 라우터를 판매하던 시스코는 90년대 인터넷 붐의 엔비디아였습니다.”
다만 이는 아직은 소수의견으로 보입니다. 수치상으로는 현재의 엔비디아가 버블 붕괴 직전 시스코보다 훨씬 낫기 때문인데요.
1. 엔비디아의 주가수익비율(PER)은 현재 75배 수준. 상당히 높은 수치이지만 정점 시절의 시스코(205배)와 비교할 바는 아닙니다. 엔비디아도 한때 PER이 200이 넘었던 때가 있었지만, 이후 분기 실적이 나올 때마다 이익이 급증하면서 PER을 끌어내린 겁니다.
2. 엔비디아는 시스코보다 훨씬 더 빠르게 성장하고 있습니다. 1분기 매출은 전년 대비 262% 늘었습니다. 시스코는 2000년에 55% 성장에 그쳤습니다.
3. 수익성 면에서도 차이가 납니다. 엔비디아의 매출총이익률은 갈수록 올라 1분기 78.3%를 기록했습니다. 그만큼 원가 대비 비싸게 팔아서 많이 남겼단 뜻이죠. 시스코의 2000년 매출총이익률은 64% 수준이었습니다.
질적인 면에서도 차이가 있는데요. 엔비디아는 꽤 강력한 해자를 갖고 있습니다. 엔비디아의 소프트웨어 플랫폼 쿠다(CUDA)가 그것이죠. 2006년부터 엔비디아는 프로그래밍 소프트웨어 쿠다를 공짜로 제공했고, 이미 전 세계 개발자 470만명 이상이 사용하는 거대한 생태계를 구축했죠. I/O펀드의 애널리스트 베스 킨디그는 바로 이 점에 주목합니다.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와 AI 엔지니어들이 GPU를 프로그래밍하기 위해 배우는 것이 CUDA 플랫폼입니다. 이것은 이들을 엔비디아에 묶어두는 데 도움 됩니다. 이 조합은 뚫을 수 없는 해자입니다.”
데이터가 바닥난다고?
현재까지는 엔비디아의 성장이 당장 꺾일 조짐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경이로운 성장률을 영원히 이어갈 수야 없겠죠. 과연 엔비디아의 질주를 결국 가로막게 될 건 무엇일까요. 앞에서 언급한 대로 고객사의 AI 투자 열정이 식거나 경쟁자가 부상할 가능성이 자주 언급되는데요. 추가로 흥미로운 주장 하나를 소개합니다. AI의 확장이 조만간 한계에 부딪힐 거란 연구 결과인데요.
아시다시피 GPU는 AI 훈련에 쓰는 칩이고, AI를 훈련시키려면 막대한 데이터가 필요하죠. AI리서치 기관 에포크(Epoch)는 최근 업데이트한 보고서(‘데이터가 부족해질까? 인간 생성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LLM 확장의 한계’)에서 이런 AI 훈련에 활용할 고품질 데이터가 2~8년 안에 고갈될 거라고 추정했는데요. 인간이 새로운 데이터를 만들어내는 속도보다 훨씬 더 빨리 AI모델 훈련이 이뤄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데이터 재고량이 300조 토큰 정도인데 몇 년 안에 이게 바닥난다는 뜻이죠. 연구진은 이렇게 말합니다. “심각한 병목현상이 있습니다. 데이터 양의 제약이 발생하면 더 이상 모델을 효율적으로 확장할 수 없을 겁니다.”
그러니까 데이터라는 게 한없이 있는 게 아니라, 생각보다 훨씬 유한한 자원이었던 겁니다. 다소 놀라운 발견인데요. 곡괭이와 삽을 아무리 많이 만들어도, 인부들 먹일 식량이 동나면 결국 금을 캘 수 없게 되는 것 아닐까요. By.딥다이브
엔비디아의 주가 차트는 언제 봐도 놀랍습니다. 이미 천장을 뚫은 주가가 과연 어디까지 치솟을지가 궁금한데요. 주요 내용을 요약해드리자면
-AI 시대에 엔비디아가 있다면 닷컴 시대엔 시스코가 있었습니다. 스위치, 라우터를 공급하는 시스코는 당시 2년 만에 700% 넘는 주가 상승률을 기록하며 세계 시가총액 1위에 올라섰습니다.
-하지만 닷컴버블이 터지면서 주가는 폭락합니다. 시스코는 여전히 업계 1위이지만 주가는 24년 전의 절반 수준입니다. 회사가 아니라, 200배 넘는 ‘미친 밸류에이션’이 문제였습니다.
-엔비디아 주가가 치솟자 시스코처럼 될 거란 비관론이 대두합니다. 물론 아직 매출 성장률이나 주가수익비율 면에선 2000년의 시스코보다 훨씬 낫습니다.
-엔비디아의 놀라운 성장세를 잠재울 위험요인은 뭐가 있을까요. 인터넷처럼 AI 시대도 계속 이어지겠지만, 성장 속도가 둔화되는 순간 주가는 꺾일 수 있다는 점을 주의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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