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만명 올해부터 은퇴 시작돼
월급 220만원 건물관리 일 배워
“축적한 역량 못 살려 사회적 손실”
지난해까지 한 자동차 대기업에서 생산부장으로 일한 홍모 씨(59)는 희망퇴직 후 새로운 일자리를 얻기 위해 최근 한 전문대 중년 재취업 프로그램을 이수했다. 홍 씨가 선택한 전공은 건물 공조·설비 분야로, 졸업 후 주로 학교나 병원의 건물 관리인으로 취직하게 된다. 홍 씨는 “건물 관리인은 월급 220만 원 정도를 받는 자리”라며 “30년 넘게 일한 자동차 생산 관리 분야와는 많이 다르지만, 회사에서 일하며 쌓은 전문성을 활용할 만한 일자리를 찾기는 쉽지 않아 이 직종을 택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미 은퇴했거나 은퇴를 앞둔 직장인 중엔 홍 씨처럼 수십 년에 걸쳐 쌓아온 전문성을 활용하지 못하고 기존에 일하던 직종과 무관하게 저임금, 저숙련 일자리로 재취업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지난달 20∼75세 남성 취업자를 대상으로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연령이 높아질수록 전문직, 관리직 비중은 줄어들고 반복적이고 육체적인 업무 비중이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중장년층의 경력이 단절되고 소득 절벽으로 내몰리는 현상은 국가 잠재 성장률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 한국은행이 이달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1000만 명에 육박하는 ‘2차 베이비부머’(1964∼1974년생)가 올해부터 2034년까지 은퇴함에 따라 연간 경제성장률이 최대 0.38%포인트 감소할 것으로 추정됐다. 석재은 한림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중장년층이 직업 경력의 연장선상에서 일자리를 잡는 경우보다 단순 노무직 등으로 내몰리는 일이 훨씬 많다”며 “축적한 역량을 우리 노동시장이 효과적으로 활용하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올해부터 1000만명 은퇴 쓰나미 “정년 연장-계속 고용 논의 시급”
2차 베이비부머 은퇴 중장년층 고용안정성 OECD 최저 임시직 34%… 저임금 저숙련 내몰려 작년 55∼79세 “더 일하고 싶다” 69%… “고용률 상승땐 성장률 하락폭 줄여”
총 954만 명에 이르는 ‘2차 베이비부머’의 은퇴가 본격적으로 시작됐지만 한국 사회나 경제구조는 이들의 노동시장 퇴장을 견뎌낼 준비가 아직 덜 돼 있다는 평가가 많다. 전체 인구의 18.6%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앞으로 10년 안에 산업현장에서 대거 물러남에 따라 각 기업들은 인력난에 직면하게 되고, 젊은층 등 생산연령인구의 노인 부양 부담은 급상승할 것으로 전망된다. 물론 현재 50대 근로자들은 정년이 지나도 계속 일하겠다는 욕구가 과거 어느 세대보다 강하다. 하지만 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기존에 전문성을 갖고 해왔던 일과는 전혀 다른 저숙련·저임금 일자리투성이다. 정년 연장이나 계속 고용 등 중장년층의 일자리 마련을 위한 사회적 논의가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 중장년층 고용 안정성, OECD 최악
한국 중장년층의 고용 안정성은 선진국 중 최저 수준이다. KDI에 따르면 2022년 기준 한국의 55∼64세 임금근로자 중 임시직 비중은 34.4%로 일본(22.5%), 튀르키예(13.7%) 등을 포함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가장 높았다. OECD 평균은 8.6%에 그친다. 나이 들어 새로 직장을 얻는다 해도 벌어들이는 소득이 변변치 않다. 2021년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1년 안에 새로 일자리를 얻은 40∼64세 141만9000명 중 46.8%가 월 200만 원 이하를 받았다. 월평균 임금이 100만 원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도 9.5%나 됐다.
중장년층이 경력 단절과 소득 절벽에 직면하는 이유 중 하나는 법적 정년 등으로 인해 이들이 오랫동안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기업들의 인식 때문이다. 22년간 떡집을 운영하다 코로나 사태인 2021년 매출 악화로 사업을 접은 양모 씨(49)는 3년 넘게 구직 활동 중이지만 임시직을 전전할 뿐 제대로 된 일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 양 씨는 “나이가 50세에 이르다 보니 기업들은 길어야 5년 정도밖에 고용하지 못한다는 인식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박승희 성균관대 사회복지학과 명예교수는 “대기업 과장, 부장도 자신이 수십 년간 익숙해 있던 분업 체계를 벗어나면 그동안 쌓은 전문성을 활용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 “베이비부머 고용 연장 논의해야”
그러나 올해 50∼60세에 해당하는 ‘2차 베이비부머’는 은퇴 후에도 계속 일하고자 하는 의지가 높은 편이다. 이를 잘 활용하면 국가 경제나 노동시장의 충격을 줄일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통계청에 따르면 55∼79세 중 ‘계속해서 일하고 싶다’고 답변한 비율이 2012년 59.2%에서 2023년 68.5%로 상승했다. 근로를 희망하는 연령도 ‘73세까지’로 증가했다. 이재호 한국은행 조사국 과장은 “60대 고용률이 2023년 기준 58.3%에서 2034년 66.0%까지 상승한다고 가정하면, 고용률이 그대로 유지되는 경우보다 경제성장률 하락 폭을 줄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2차 베이비부머 등 중장년층이 단순직으로 내몰리는 현상을 막기 위해서는 연공서열형 임금구조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경력에 따라 임금이 오르는 구조에선 사용자인 기업 측이 연봉이 높은 중장년층 직원을 젊은 직원으로 대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정년 연장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고 기업들의 퇴직자 재고용이나 계속고용 등을 유도할 필요도 있다. 한요셉 KDI 노동시장연구팀장은 “연공서열이 아닌 생산성 평가에 따라 임금을 정하면 사용자 측에서 고연령임에도 생산성이 유지되는 직원들을 계속 고용할 유인이 생긴다”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해 OECD도 최근 발간한 ‘2024 한국경제보고서’에서 “노인들이 일자리에 남아 있거나 재진입하도록 장려하는 것은 전반적인 고용 증진에 있어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며 “노동 수명을 연장하고 노인 고용을 늘리면 국내총생산(GDP)과 재정 성과가 크게 향상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OECD는 연공서열의 중요성을 줄이고, 법정 정년을 늘리거나 회사별 의무 퇴직 연령을 단계적으로 폐지하는 방안 등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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