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장 눈앞의 문제만 해결하려 하다가 놓치는 일이 너무 많습니다. 긴 호흡으로 봤을 때 무엇이 중요한지를 알리고 풀어나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만든 계획입니다.”
지난 3일 청와대 영빈관에서는 ‘하반기(7∼12월) 경제정책 방향 및 역동경제 로드맵 발표’ 회의가 열렸습니다.
한국의 경제 정책을 총괄하는 기획재정부는 매년 6월 말이나 7월 초에 하반기 경제정책 방향을 내놓고 남은 한 해 동안의 경제 정책 목표를 제시하곤 하는데요.
이번 경제정책 방향 발표는 남은 한 해가 아니라 향후 3년 혹은 그 이상의 중장기 과제를 함께 내놓기로 하면서 관심을 모았습니다.
2024년 현재, ‘역동성’이 떨어졌다는 것이 한국 경제의 가장 큰 취약점이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마련한 ‘역동경제 로드맵’인데요.
요즘은 인기가 많이 식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정부 부처 가운데 가장 엘리트 조직으로 꼽히는 기재부가 생각하는 한국의 문제와 그 해결의 방향성이 담겨 있습니다.
이번 로드맵 작업에는 실제로 실력 있는 기재부 사무관들이 대거 투입됐다는 후문입니다.
● 10대 과제, 33개 세부 추진 과제로 ‘총망라’
역동경제 로드맵의 실제 책자는 목차를 제외하고 총 69페이지 분량입니다.
총론과 10대 과제, 향후 일정, 참고 자료로 구성된 전형적인 정부 발표 자료인데요.
왜 이런 로드맵을 만들었는지에 대해
“전쟁의 폐허에서 ‘한강의 기적’을 달성한 한국의 성장 엔진이 빠르게 식어가고 있다”
는 인식을 앞세우면서 대대적인 구조개혁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제시한 10대 과제는 ‘혁신 생태계 강화’ ‘공정한 기회 보장’ ‘사회 이동성 개선’이라는 3개 분야로 나눴습니다.
이 10대 과제라는 것이 그 자체로 하나씩의 과제는 아닌데요. 10대 과제 밑의 세부 추진 과제를 세어보니 33개에 이릅니다.
생산성 향상과 글로벌 네트워크 확장, 균등한 기회와 정당한 보상, 가계소득·자산 확대, 교육 시스템 혁신 등의 카테고리에 한국 사회가 풀어야 할 과제들을 모두 담았다고 봐도 되는 로드맵 아닐까 싶습니다.
● “고용 70% 차지하는 서비스업, 영세화로 낙후”
딱딱한 정부 발표 자료 중에서도 유난히 작은 글씨가 많이 달린 이 책자를 전부 요약해 드리는 건 사실 큰 의미도, 재미도 없어 보입니다.
어찌 보면 많은 사람들이 그동안 얘기해 온 한국의 문제들이기에 새롭지 않을 수 있고, 내용도 복잡한데요.
그럼에도 이 ‘재미없는’ 자료를 다시 짚어보는 이유는 2024년 현재, 경제 정책을 총괄하는 경제 관료들의 문제 인식과 미래 과제를 살펴볼 수 있다는 점 때문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눈에 띄는 부분을 살펴보자면….
우선 정부는 현재 한국 경제의 생산성 자체에 문제가 있는데 특히 산업별, 기업별 편차가 크다는 인식입니다.
해외 주요국에 비해 중소기업의 비중이 너무 크고 서비스 산업과 농업 등의 생산성은 경제 전체에 악영향을 미칠 정도로 뒤처져 있다는 것인데요.
서비스업의 경우 국내 고용의 70%, 부가가치의 60%를 차지하고 있음에도 생산성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에 크게 못 미친다는 분석을 내놨습니다.
정부는 “힘들다”라는 목소리가 나올 때마다 소상공인·자영업자 대책을 내놓고 있고 이번에도 역동경제 로드맵과 함께 ‘새출발 희망 프로젝트’라는 이름의 별도 대책을 내놓았는데요.
영세화된 서비스업의 경쟁력 자체가 떨어지는 근본적인 문제로 해결해야 한다고 지적한 셈입니다.
● “농촌 고령화되는데 먹거리 수입은 힘들어”
먹거리와 주거 문제를 한 발 떨어진 시장 관점에서 지적한 분석도 짚어볼 만합니다.
최근 먹거리 물가에 비상이 걸린 상황. 정부는 기후변화와 고령화 속에 농업 생산성이 낮아지고 있는데 유통에서는 경쟁이 제한된 문제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국내 농업의 경쟁력이 떨어지는데 높은 관세율 때문에 수입이 힘든 상황이 결국 물가 부담을 키우고 있다는 것인데요.
규모를 키운 공동영농 등으로 농업 경쟁력을 높이고 관세율을 낮춰서 해외 공급을 늘려야 한다는 방향성입니다.
주거 측면에서도 영세화된 단기 임대와 비등록 사업자가 민간 임대 시장을 주도하면서 주거 안정성이 떨어지고 전세 사기 등의 위험까지 커졌다고 지적했는데요.
개인 간의 계약으로 ‘2+2’, 4년 정도의 거주가 보장되는 방식의 임대차 시장 자체가 선진국과는 차이가 크다는 것입니다.
일본이나 미국 등의 경우 규모화·전문화된 기업을 중심으로 주택 임대 시장이 운영되고 있다는 설명이 덧붙었는데요.
이에 따라 정부는 집을 사지 않아도 수십 년 이상 장기 거주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민간 장기 임대 서비스를 2035년 10만 채까지 마련하겠다는 목표를 내놓았습니다.
● 정부 혼자 못 푸는 문제도 많아
69페이지에 이르는 큰 숙제. 눈에 띄는 내용을 중심으로 이 자료를 다시 살펴보면서 드는 생각은 역시나 ‘실제로 얼마나 개선 혹은 해결할 수 있을까’하는 의문입니다.
사실 굵직한 과제의 경우 그 열쇠가 정부 손에 쥐고 있지 않은 것이 사실인데요.
대표적으로 보면 대기업 중심의 생산성 높은 경제 시스템 구축과 대-중소기업 간 임금 격차 완화 등의 과제가 그렇습니다.
정부가 뒤를 받칠 수야 있겠습니다만 미래 신산업 발굴을 정부가 이끌어 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반도체를 비롯한 주요 산업의 성패는 어쩌면 정부보다는 기업의 손에 쥐어져 있을지도 모르는 시대.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임금 격차 역시 정부가 직접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정부가 추진할 수는 있지만 곳곳에서 강한 반발을 마주할 가능성이 큰 사안도 적지 않아 보이는데요.
서비스 산업 육성을 위한 ‘서비스산업 발전기본법’ 제정의 경우 10년 넘게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고 수입 농산물 관세율 인하는 농민 단체의 반발이 불 보듯 뻔한 이슈입니다.
● 스스로 목표 세운 정부, 실행이 관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한국 경제 전반에 걸쳐서 중·장기 목표를 제시한 만큼 앞으로 이 과제들을 어느 정도까지 풀어낼 수 있을 것인지는 관심 있게 지켜볼 필요가 있어 보이는데요.
이번 ‘하반기 경제정책 방향 및 역동경제 로드맵 발표’ 회의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자동차 경주 포뮬러원(F1)의 피트스탑 장면 사진을 손에 들고 중앙정부는 물론 지방정부까지 원팀이 된 정책 속도전을 강조했습니다.
이날 최상목 부총리도 “우리 경제는 이제 상반기에서 하반기로, 윤석열 정부 2년에서 3년으로 넘어가는 피트 스톱에 들어왔다”라며 “경제팀이 힘을 모아 서민·중산층 시대 구현을 향해 전력 주행하겠다”라고 강조했는데요.
최고 시속 370킬로미터를 넘나들며 정신없이 진행되는 F1 경주에서, 중요한 타이어 교체 전략을 실행하는 피트스톱이 가지는 중요성처럼 중·장기 전략을 기반으로 경제 정책을 실행하겠다는 설명이겠습니다.
로드맵이 발표 이후에 만난 한 기재부 당국자는 “하나씩 두 개씩, 조금씩이라도 이 방향을 향해서 꿋꿋하게 가겠다”라는 의지를 드러냈습니다.
정부 스스로 내놓은 숙제를 정말로 잘 풀어가는지를 계속 살펴보면서 또 소식을 전해드리겠습니다.
세종=김도형기자 dodo@donga.com
-
- 좋아요
- 0개
-
- 슬퍼요
- 0개
-
- 화나요
- 0개
-
- 추천해요
- 개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