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디락스(Goldilocks). 미국 경제가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최적의 상태라며 환호하던 월가가 즐겨 쓰던 용어이죠. 그런데 별안간 골디락스는 간데없고 경기침체(Recession) 공포가 엄습했습니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갑자기 말이죠.
그럼, 무엇이 그 패닉버튼을 눌렀냐. 바로 2일 발표된 4.3%의 미국 7월 실업률입니다. 전달보다 0.2%포인트 올랐을 뿐 아니라, 전문가 전망치(4.1%)를 웃돌았죠. 2021년 11월 이후 가장 높은 수치였습니다.
4.3%란 수치가 유독 실망스러운 이유는 ‘샴의 법칙(Sahm Rule)’을 발동시켰기 때문입니다. ‘실업률이 빠른 속도로 상승하면 경기침체에 빠진다’라는 유명한 법칙인데요. 3개월 평균 실업률이 지난 12개월의 최저치보다 0.5%포인트 이상 오르느냐가 기준점이죠. 그리고 4.3%의 미국 실업률은 이 차이가 0.53%포인트가 됐다는 의미입니다.
샴의 법칙 발동에 시장이 화들짝 놀란 건 그 예측의 정확성 때문입니다. 아래 그래프에서 나타나듯 1960년 이후 최근까지 샴의 법칙 발동은 100% 확률로 경기침체로 이어졌습니다. 무려 9번이나 말이죠. 일반적으로 샴의 법칙은 경기침체 정점보다 약 3개월 앞서 나타납니다.
하지만 정작 이 법칙을 만든 전 연준 경제학자 클라우디아 샴 박사는 이번엔 규칙이 깨질 수 있다고 한발 물러섰습니다. 이민으로 인해 노동력이 풍부해진 지금은 임계점이 0.5%포인트가 아니라 더 높아져야 할 수도 있다는 설명이죠. 그는 “올해 실업률이 더 오를 것”이라면서도 “9월이나 10월에 미국 경제가 침체에 빠질 가능성은 작다”고 내다봤는데요.
그의 전망이 들어맞기를 바라지만, 일단 한번 버튼이 눌려버린 시장이 다시 아무일 없었던 듯 평정을 되찾긴 쉽지 않죠. 악사인베스트먼트매니저의 질 모엑 이코노미스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미국 경제가 경착륙이든 연착륙이든 결코 착륙하지 않을 것이라고 분명히 생각했던 이상한 상황에 처해있었습니다. 이는 언젠가는 깨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잊혔던 수익률 곡선 역전의 끝
증시가 지표 하나에 이토록 민감하게 반응할 줄이야. 사실 좀 놀랍습니다. 그동안 투자자들은 예측력 높은 경기침체 신호를 과감히 무시해 왔거든요. 가장 대표적인 게 장단기 수익률 곡선 역전, 즉 만기가 짧은 국채(2년물) 금리가 만기가 긴 국채(10년물)를 앞서는 현상입니다.
원래 채권은 만기가 길면 금리가 높아지는 게 맞죠. 채권자 입장에서 장기간 돈이 묶이는 위험을 감수해야 하니까요. 하지만 드물게 그 반대가 되기도 하는데요. 이런 현상은 보통 미국 경기침체에 7개월~2년 선행해서 나타나곤 했죠. 지난 8차례의 경기침체에 모두 나타난 매우 신뢰할 만한 지표였습니다.
이번엔 어떨까요? 지금 미국 국채의 장단기 수익률 역전은 2022년 7월부터 무려 25개월째 이어져 왔습니다. 역대 최장기이죠. 너무 오래 이 상태가 이어지다 보니, 이제 다들 그 의미(경기침체 가능성)에 대해 무덤덤해졌었는데요.
드디어 그 역전의 끝이 보입니다. 이 글을 쓰는 5일 장 초반 한때(현지시간) 미 국채 2년 물 금리가 10년 물 금리를 살짝 앞섰습니다. 2년 여만에 처음으로 말이죠. 투자자들이 증시의 ‘떨어지는 칼’을 피해 안전자산인 단기 국채로 몰리면서 2년물 금리가 잠시 급락했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후 다시 2년물 금리가 앞서감)
역전됐던 수익률 곡선이 다시 반전된다는 건 주식시장엔 어떤 의미일까요. 얼핏 보면 시장이 정상화된다는 좋은 소식으로 보일 수도 있는데요. 실제 의미는 그 반대일지 모릅니다. 과거 경기침체는 역전됐던 수익률 곡선이 다시 반전된 다음에야 나타나곤 했기 때문이죠(아래 그래픽 참조).
로젠버그리서치의 데이비드 로젠버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수익률 곡선이 플러스 기울기로 전환될 거란 전망에 모두 흥분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장기간 역전 뒤 이런 일이 발생하면, 실제론 금리인하가 필요하다는 신호라는 겁니다.” 즉, ‘경기침체 임박했으니까 연준은 금리를 과감히 내릴 수밖에 없다’는 매우 강한 시그널인 셈입니다.
신얼 상상인증권 애널리스트는 “현재 시장이 각국 중앙은행에 금리 인하를 압박하는 경고 신호를 보내고 있다”고 말하는데요. 5일 채권시장의 움직임은 “연준이 연내에 3회 금리인하를 하는 것뿐만 아니라 연내에 100bp(1%포인트) 인하까지 반영한다”는 설명입니다. 한 번에 금리를 0.5%포인트를 내리는 ‘빅스텝’, 과연 나올까요.
엔 캐리 트레이드 청산
미국의 경기침체 우려는 분명 글로벌 금융시장을 뒤흔들 만한 불씨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이 정도 폭발력을 갖진 못하죠. 5일 아시아 증시 대폭락의 진앙지는 바로 일본, 특히 엔 캐리 트레이드 청산에 있었습니다.
엔 캐리 트레이드는 금리가 낮은 일본에서 엔화를 저렴하게 빌려 다른 고수익 자산에 투자하는 전략이죠. 호주 달러화와 멕시코 페소화는 물론, 미국 빅테크 주식도 주요 투자처였습니다. 정확한 엔 캐리 트레이드 자산 규모는 집계되지 않지만, 최대 20조 달러(약 2경6700조원)에 달할 거란 추정이 나오죠.
그런데 일본은행이 지난달 31일 기준금리를 0~0.1%에서 0.25%로 인상했죠. 게임의 규칙이 이제 바뀐 겁니다. 여기에 엔화가 강세로 돌아선 것도 분위기를 180도 바꿨습니다. 미국의 경기침체 우려 때문에 미 연준이 금리를 크게 내린다면 ‘슈퍼엔저’가 끝날 가능성이 크잖아요. 투자자 입장에선 환차손을 피하려면, 얼른 해외 자산을 청산하고 돈을 일본으로 다시 가져오는 게 나은 겁니다.
그리고 이 흐름이 시작됐습니다. ‘와타나베 부인’으로 대표되는 일본 투자자들이 캐리 트레이드에서 빠르게 빠져나오고 있습니다. 지금 나타나는 멕시코와 호주 통화가치의 급락, 미국 기술주의 폭락이 모두 이와 연결돼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데요. 소시에테제네랄의 외환전략가 키트 저크스는 이를 두고 “세계 최대 규모의 캐리 트레이드는 몇몇의 시장이 깨지지 않고서는 청산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엔 캐리 트레이드의 청산은 엔화 강세를 더 부추기게 됩니다. 다른 자산을 팔아 엔화를 사려는 수요가 급증하니까요. 7월 4일 달러당 161.9엔까지 떨어졌던 엔화가치가 5일 장중 141엔까지 치솟은 이유인데요. 박상현 하이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이런런 상황을 “엔 캐리 트레이드 청산이 엔화 강세를 부추기고, 그게 또다른 청산을 일으키는 악순환에 빠졌다”라고 설명합니다.
그동안 기업실적을 떠받쳐온 엔저 효과가 사라지자 일본 증시는 무너졌습니다. 엔 캐리 트레이드 자금 이탈은 한국을 포함한 세계 증시에 연쇄 타격을 미쳤죠. 연쇄 쓰나미에 휩싸인 세계 증시는 이제 일본은행에 손가락질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감당하지도 못할 금리 인상을 왜 해서 이 사단을 만들었느냐는 비판이죠.
이와 관련해 블룸버그의 칼럼니스트 기어로이드 레이디의 칼럼 한토막을 소개합니다. 일본은행 입장에선 굴욕스러운 지적인데요. “(샴의 법칙처럼) ‘일본은행 인상의 법칙’을 고려해야 합니다. 일본은행의 금리 인상 역사는 세계 경제가 불황에 접어드는 정확히 잘못된 시기에 잘못된 조치를 취한 일관된 역사입니다.” By.딥다이브
안정적이고 아늑했던 강세장에 갑자기 폭풍이 들이닥쳤습니다. 이럴 때 떠올려야 할 워런 버핏의 조언이 있죠. “주식시장에서 변동성은 친구다. 나는 변동성을 사랑한다.” 버핏의 버크셔해서웨이는 애플 주식을 절반 팔고 현금 보유량을 최대로 늘렸다니. 이번에도 또 승리자네요. 주요 내용을 요약해드리자면.
-평온하던 글로벌 증시에 갑자기 경기침체 버튼이 눌렸습니다. 미국 실업률이 4.3%를 기록하며 ‘샴의 법칙’이 발동했기 때문인데요. 경기침체가 실제 오든, 안 오든 ‘경제가 착륙을 앞두고 있다’는 건 분명해보입니다.
-국채 시장에서도 신호가 나옵니다. 5일 한때 미국 2년물 국채금리가 10년물 금리를 2년 여 만에 다시 추월했습니다. 이 역시 경기침체 임박의 시그널입니다.
-경기침체라는 불씨가 엔 캐리 트레이드 청산이라는 대형 폭탄에 불을 붙였습니다. 미국이 금리를 내리면 엔화 강세가 올 거란 전망에 전 세계에 풀렸던 엔 캐리 자금이 일본으로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엔 캐리 트레이드 청산은 일단 시작되면 장기간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주의가 필요해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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