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상의, 美재무부에 첫 우려 의견서
‘미국인-기업 대상’ 애매한 규정에
SK 美자회사의 中낸드 투자 불투명
美투자 받은 韓기업 中진출 막힐수도
SK하이닉스가 2021년 미국 인텔의 낸드 부문을 인수해 설립한 자회사 솔리다임은 최근 데이터센터에 들어가는 주력 제품 수요가 급증하자 2분기(4∼6월) 흑자 전환했다. 솔리다임은 제품 제작에 필요한 낸드를 중국 다롄 공장에서 생산해 미국으로 들여온다. 인공지능(AI) 열풍으로 솔리다임 성장세는 더 두드러질 것으로 예상되고, 거기에 비례해 낸드 물량도 더 많이 필요하다. 하지만 솔리다임은 중국 다롄 공장에 투자할 길이 막힐 위기에 처했다. 미국 재무부가 올해 6월 입법 예고한 대중(對中) 투자 규제 때문이다.
미국 정부가 연내 시행을 목표로 미국인 및 미국 기업을 대상으로 하는 첨단 산업 대중 투자 규제 정책에 대해 한국 산업계가 처음으로 의견을 제출한 것으로 15일 확인됐다. 한국 기업의 대중 투자가 막히지 않도록 애매한 규정을 명확히 해 달라고 요청했다. 재계 관계자는 “미국 대선을 80여 일 앞두고 있지만 어느 후보가 정권을 잡더라도 대중 규제 기조는 변하지 않을 것”이라며 “미국의 첨단 산업 대중 투자 규제가 현 상태대로 실시되면 한국 기업들의 불확실성은 매우 커진다”고 말했다.
대한상공회의소는 정부와 국내 산업계 입장을 취합해 4일(현지 시간) 미 재무부에 제출한 의견서에서 “규제 위반 시 비(非)미국인에게도 처벌이 부과될지 우려된다”며 “외국 법인이나 외국 기업인에 대해서도 처벌하는지 등 지침을 명확히 해 달라”고 요청했다.
미국 투자를 조금이라도 받은 한국 기업이 중국 투자를 못 하게 되는 상황을 막기 위해 “‘미국인(혹은 법인)이 지분 또는 이사회 투표권의 50% 이상을 보유하는 경우’로 대상을 한정해 달라”고도 요구했다. 이성우 대한상의 국제통상본부장은 “현행 안은 사실상 첨단 산업 분야에서 미국 기업의 중국 교류 자체를 가로막겠다는 취지”라며 “한국 기업의 대중 투자에 부담이 되지 않도록 정부와 민간이 면밀하게 협력해 대응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반도체산업협회(SIA) 등 미국 현지 산업계도 “일방적 대중 투자 제한은 산업 생태계를 훼손하고 미국 반도체의 경쟁력 저하로 이어질 것”이라며 이번 규제안에 반대하고 나섰다.
앞서 지난해 8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첨단 반도체·인공지능(AI)·양자컴퓨터 등 첨단 분야에서 미국 기업과 자본의 대중 투자를 전면 규제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미국 재무부는 올해 6월 이를 구체화한 규제안(이행 규칙)을 입법 예고했고, 이달 5일까지 관련국의 의견을 수렴했다. 올해 안에 최종 규칙을 확정해 시행한다는 계획이다.
美 모호한 ‘中투자 규제’에, 韓기업-합작사 전방위 피해 가능성
[美 대중규제에 韓기업 ‘유탄’] 대한상의, 美재무부에 우려 의견서 ‘미국인이 투자 자문’ 등 광범위 규제… “사실상 中과 연 끊으라는 것” 지적 韓美 표준화 협의체도 규제 대상에… 산업계 “美지분 50% 등으로 한정을” IRA 때처럼 민관 합동 대응 필요
대한상공회의소가 4일(현지 시간) 미국 재무부에 제출한 의견서는 최근 1년 동안 미국 정부가 구체화해 온 첨단산업 대중(對中) 투자 규제가 지금처럼 애매모호한 상태로 확정되지 않도록 처음 목소리를 낸 것이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와 같은 현 규제는 미국, 중국 양국과 밀접하게 연관된 한국 기업들에 피해를 입힐 가능성이 높다. 이에 한국 산업계가 규제를 명확히 해 달라는 의견을 전달했다.
● 韓 산업계 “사실상 중국과 연 끊으라는 것”
15일 동아일보가 입수한 대한상의 의견서에 따르면 6월 미국 재무부가 입법 예고한 대중 투자 규제안은 미국인(혹은 법인)의 대중 첨단 반도체·인공지능(AI)·양자 기술 투자를 사실상 금지하고 있다. 문제는 통제 대상이 되는 투자 주체를 △미국인(혹은 법인)이 직간접적으로 기업의 지분 또는 이사회 투표권의 50% 이상을 보유한 경우 △미국인이 투자 운용을 하거나 경영을 하는 경우 △미국인이 펀드의 투자 자문을 하는 경우 등으로 지나치게 광범위하게 규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에 따르면 한국 기업들도 미국에 현지 법인을 두고 있거나 미국 기업 혹은 펀드의 투자를 받으면 모두 대중 투자가 막히게 된다. 국내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규제안 표현이 매우 모호하고 폭넓다. 사실상 그냥 중국과 연을 끊으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AI 등 첨단산업 분야에선 한국 기업이 최선두 국가인 미국에 법인을 두거나 미국 자본의 투자를 받은 사례가 많다. 올해 6월 미국 실리콘밸리 벤처캐피털(VC) 등에서 440억 원 투자를 유치한 AI 벤처기업 뤼튼 테크놀로지스나, 지난해 10월 엔비디아와 인텔의 투자를 유치한 AI 영상 스타트업 트웰브랩스 같은 곳들은 향후 중국 시장 진출 시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실리콘밸리에 거점을 두고 있는 삼성넥스트, LG테크놀로지벤처스, GS퓨처스 등 주요 그룹의 기업벤처캐피털(CVC)도 마찬가지다.
양자 분야에서도 중국과의 협력 차질이 예상된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양자 기술 협력을 위해 SK텔레콤, KT, LG전자 등 국내 기업 107곳 정도와 미국 IBM 등 글로벌 유수 기업이 합작한 표준화 기구 ‘퀸사’를 이달 출범시켰다. 미래 산업인 양자 분야에서 기술 표준화를 주도하고 글로벌 기술 발굴 및 투자를 함께 하기 위한 협의체다. 하지만 이번 규제안이 발효되면 IBM이 끼어 있다는 이유로 대중 양자 기술 협력이나 투자 프로젝트는 제한될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한상의는 의견서에서 통제 대상이 되는 투자 주체를 “‘미국인(혹은 법인)이 직간접적으로 기업의 지분 또는 이사회 투표권의 50% 이상을 보유한 경우’로만 한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IRA 때처럼 민관 합동 대응 나서야”
현행 규제안은 투자를 금지하는 대상도 매우 광범위하다. 단순히 ‘우려국가(중국)’뿐만 아니라 ‘우려국가 국민과 특별한 관계가 있는 자’까지 포함하면서 사실상 중국과 거래관계가 있는 우리 기업들까지 모두 미국 투자 유치에 제한을 받을 수 있다.
SK하이닉스는 앞서 5월 중국 반도체 시장 공략을 위해 중국 국영기업과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합작법인 계약을 마무리했다. 앞으로 미국 투자를 받을 길이 막힐 가능성이 있다. 미국 정부가 보다 폭넓게 해석할 경우 중국에 반도체를 납품하거나 소재를 들여오는 한국 기업들도 ‘특별한 관계’로 규정될 수 있다. 이에 대한상의는 의견서에서 “제3국 국민을 우려 국가 국민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미국 재무부는 이달 5일까지 관련국 의견 수렴을 마무리한 뒤 규제안을 더욱 구체화해 연내 시행을 발표할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이 11월 대선을 앞두고 있지만 민주당과 공화당 모두 대중 제재에 이견이 없는 상황이기에 재무부가 짠 시간표대로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
박효민 법무법인 세종 변호사는 “최종적으로 미국이 ‘대중 투자 규제 대상 기업’과 ‘우려 국가 국민’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영향받는 한국 기업의 범위도 달라질 것”이라며 “과거 인플레이션감축법(IRA) 입안 사례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최종 확정되기 전까지 정부와 관련 산업계가 합심해 간접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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