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금리 내리는데… 가계빚에 발묶인 한은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8월 23일 03시 00분


韓 기준금리 13연속 동결 역대 최장
캐나다-EU-中-英 줄줄이 금리 내려
美 내달 인하 확실시… 0.5%P 전망도
대통령실 “동결 아쉬워” 이례적 표명


한국은행이 22일 기준금리를 3.50%로 유지하면서 역대 최장기간 동결 기록을 다시 썼다. 지난해 2월 금리 인상을 멈춘 이후 13차례(약 1년 7개월) 연속이다. 미국과 유럽 등 주요국은 이미 금리를 내렸거나 인하를 사실상 예고한 상태지만 한국만 불어나는 가계빚에 손발이 묶여 고금리 기조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이창용 한은 총재는 22일 금융통화위원회 직후 연 기자회견에서 “물가 수준만 보면 금리 인하 여건이 조성됐다고 판단하는 쪽으로 가고 있다”면서도 “이자율을 급하게 낮추거나 유동성을 과잉 공급해 부동산 가격 상승 심리를 자극하는 실수를 범해서는 안 된다”고 금리 동결 이유를 설명했다. 경기가 둔화하고 물가상승률도 내리는 상황만 보면 금리를 인하하는 게 맞지만, 집값과 가계빚 등 금융 불안이 심각해 현재의 기준금리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는 뜻이다. 한은은 이날 ‘수정 경제전망’을 통해 올해 실질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기존의 2.5%에서 2.4%로 하향 조정했다.

한은의 금리 동결 행진은 속속 금리 인하를 개시하는 다른 나라들의 행보와는 상반된 흐름이다. 앞서 캐나다가 주요국 중 최초로 올 6월부터 금리를 두 번 연속 낮췄고 6월에 금리를 한 차례 내린 유럽중앙은행(ECB)은 9월 추가 인하 가능성을 저울질하고 있다. 또 중국도 지난달 기준금리 역할을 하는 대출우대금리(LPR)를 낮췄고, 영국 역시 이달 초 4년 만에 금리 인하를 단행했다. 글로벌 통화정책의 가늠자 역할을 하는 미국도 다음 달 인하가 확실시된다.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21일(현지 시간) 공개한 7월 FOMC 의사록에 따르면 19명의 참석자 중 대다수는 9월 금리 인하가 적절할 것으로 봤다. 월가에서는 연준이 한 번에 0.5%포인트를 내리는 ‘빅컷’을 점치는 전망도 커지고 있다.

이날 한은의 금리 동결 결정에 대통령실은 “금리 결정은 금통위의 고유 권한이지만, 내수 진작 측면에서 보면 아쉬움이 있다”며 이례적으로 별도 입장을 내놨다. 경기 둔화에 대응하기 위해 한은이 이날 당장 금리를 내렸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정부가 애초에 가계부채 및 집값 관리에 실패한 것이 지금 한은의 손발을 꽁꽁 묶는 부메랑으로 돌아온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제 와서 내수를 살리려 섣불리 금리를 내렸다가는 불붙은 부동산 시장과 가계대출에 기름을 부을 수 있다는 우려도 만만치 않다. 가계부채는 6월 말 현재 1896조 원으로 역대 최대로 불어났다. 부동산 가격 역시 수도권을 중심으로 상승해 서울 아파트값은 22주 연속 오름세를 이어갔다.

정부 ‘가계빚-집값 늑장대응’ 부메랑… 내수침체에도 금리 못내려

[한은 역대최장 금리동결]
한은, 올 성장률 2.5→2.4% 하향… 이창용 “가계부채 위험 신호 많아”
부동산 과열에 ‘금리인하’ 못꺼내… 정부, 뒤늦은 규제로 주담대 급증
금융권 “금리인하 10월도 미지수”

경제성장률이 하향 조정되고 내수 침체가 장기화하는 상황에서도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가 기준금리를 묶어둔 것은 부동산 시장 열풍으로 가계부채 증가세가 좀처럼 잡히지 않아서다. 22일 이창용 한은 총재는 기준금리 3.50% 동결을 발표하며 “내수는 시간을 갖고 금리 인하 폭 등으로 대응할 수 있지만, 부동산 가격과 그에 따른 가계부채 증가 등 금융 불안은 지금 막지 않으면 더 위험하다”고 밝혔다. 세수 부족 등으로 적극적인 재정 정책을 사용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부동산 시장 과열로 인해 한은 역시 금리 인하 카드를 선뜻 꺼낼 수 없게 된 것이다.

● 집값-가계부채에 막혀 버린 금리 인하

경제 지표들은 금리 인하 필요성을 가리키고 있다. 이날 한은은 올해 경제성장률을 기존 2.5%에서 2.4%로 낮춘 수정 전망치를 발표하며 “소득 개선 지연 등의 영향으로 내수 회복세가 더디다”고 평가했다. 물가도 안정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평가다. 한은이 이날 발표한 올해 물가상승률 전망치는 2.5%로 5월(2.6%)에 비해 0.1%포인트 낮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은이 금리 인하를 미룬 것은 내수 침체보다는 부동산 과열과 가계부채 증가를 더 시급한 문제로 봤다는 의미다. 이 총재는 “금리를 높게 유지함으로써 내수 부진을 더 가속할 위험이 있지만 부동산 가격과 가계부채 증가의 위험 신호가 많이 들어오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 이 총재는 경기가 나빠지면 부동산 경기를 부양하는 정책 대응에 대해 “그런 고리는 한 번 끊어줄 때가 됐다”고 지적했다. 빚을 내 집을 사는 ‘영끌족’에게도 “만약 예전의 0.5% 금리 수준으로 조만간 돌아가서 ‘영끌’ 시 부담이 적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분명히 이야기하겠다. 금통위원들은 부동산 가격 상승을 부추기는 통화정책은 운용하지 않겠다는 것을 명확히 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정부의 ‘8·8 공급대책’에도 불구하고 한국부동산원의 8월 둘째 주 주간 아파트 가격동향 조사에서 서울 아파트 매매가격 상승률은 0.32%로 5년 11개월 만에 가장 큰 폭으로 올랐다. 부동산 거래가 살아나면서 올 6월 말 가계부채 잔액은 3개월 전보다 13조8000억 원 불어나 역대 최대를 보였다. 특히 주택담보대출이 16조 원 늘어 전체 가계 빚 증가를 이끌었다.

● 금리 인하 10월에도 미지수


정부의 ‘자충수’가 가계부채를 키우는 데 일조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정부가 올해 초 1%대 정책 대출을 내놓고, 당초 7월 시행 예정이었던 2단계 스트레스(가산)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도입을 미루는 등 주담대 증가세를 부추겼다는 것이다. 다음 달부터 수도권 주담대 대출한도를 줄이기로 하는 등 정부가 뒤늦게 규제에 나섰지만 효과 여부도 미지수다.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는 “정부가 금리는 높여 놓고 가계와 기업에 저금리성 정책자금을 공급하면서 부채 급증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며 “정책 대출 증가로 주택 수요는 늘었는데,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출은 봉쇄함에 따라 주택 공급이 막혀 집값도 급등하는 모양새”라고 했다.

한은의 기준금리 인하 시기는 결국 부동산 시장과 가계부채 안정에 달려 있다는 분석이다. 시장에서는 “(이 총재를 제외한) 금통위원 6명 중 4명은 향후 3개월 내 금리 인하 가능성을 열어놨다”는 이 총재의 발언에 10월 인하를 점치고 있지만 부동산 시장의 향방을 가늠하기 쉽지 않다. JP모건은 이날 한은의 금리 인하 시점이 당초 예상했던 10월보다는 11월로 한 달 늦춰질 가능성이 크다고 진단했다.

일각에선 기준금리 인하 시점이 너무 늦어져 경기 침체에 대비하지 못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황세운 한국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한은은 미국 연방준비제도(Fed)보다 금리 인상 폭이 작았던 만큼 금리 인하 속도도 미국보다 늦을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기준금리#가계부채#내수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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