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한류, K-헤리티지로]
기술-제품 비해 브랜드 가치 낮게 봐
30대그룹 임원-학자 59%도 “저평가”
“역사 등 고유 헤리티지 적극 활용을”
한국 대표 기업들의 브랜드 가치 성장 속도가 글로벌 기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뒤처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한국 기업들이 기술력이나 제품 경쟁력에 비해 상대적으로 박한 평가를 받는 것으로 보고 있다. 국내 기업이 앞으로도 세계 무대에서 경쟁하기 위해서는 브랜드 가치를 끌어올릴 장치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9일 글로벌 브랜드 평가 기관 인터브랜드에 따르면 지난해 글로벌 상위 50개 기업의 브랜드 가치는 2조7700억 달러(약 3711조8000억 원)로 2014년의 1조3100억 달러 대비 110.8% 상승했다. 같은 기간 한국의 상위 50개 기업의 브랜드 가치는 116조9000억 원에서 201조 원으로 71.9% 오르는 데 그쳤다.
국내 주요 기업들이 스스로 내린 평가와 전문가들의 진단도 비슷했다. 동아일보가 국내 30대 그룹 전략·마케팅 담당 임원과 한국경영사학회 소속 학자 7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59%가 한국 기업들이 ‘실제 역량이나 잠재력에 비해 저평가받고 있다’고 봤다. 특히 30대 그룹 임원들 중에는 23명(76.7%)이 이같이 답했다. 이들은 “한국 기업이 저평가받고 있기 때문에 금융투자 시장도 작은 것”, “기업을 넘어 국가 전체의 소프트 파워 문제” 등의 답변을 추가했다.
기업이 아닌 한국 제품이나 서비스의 경우 조사 대상자의 38%가 ‘저평가받고 있다’고 했다. ‘실제만큼 평가받고 있다’는 답변(47%)이 더 많았다. 즉, 한국 제품 및 서비스는 글로벌 시장에서 제대로 평가받고 있지만 그걸 만드는 기업에 대한 평가는 낮다고 보는 것이다.
애플, 코카콜라, 메르세데스벤츠, 디즈니 등은 회사 자체를 대상으로 한 팬층이 글로벌 시장에서 두껍게 형성돼 있다. 이런 강력한 브랜드는 제품 경쟁력을 높이는 시너지를 낸다. 반면 브랜드 가치가 낮으면 선순환 효과를 기대하기 힘들다.
전문가들은 한국 기업의 가치를 높일 방법 중 하나로 기업 헤리티지(유산)를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한다. 모종린 연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헤리티지의 개발은 역사를 브랜딩하는 것”이라며 “브랜드가 시장 경쟁력이라면, 헤리티지는 시장 경쟁력을 지속 가능하게 하는 역할”이라고 했다.
넷플릭스-우버처럼… 韓기업도 창업스토리 살린 ‘헤리티지 경영’을
〈1〉 한국기업 소프트파워 키워야 넷플릭스, 비디오 연체료 화나 창업… 우버는 비싼 택시비에 반발해 시작 대중에 스토리 공유, 기업가치 높여 韓기업, 창업정신-브랜드 탄생 등… 소비자에 각인 시킬 스토리 활용을
‘대여점서 빌린 비디오를 늦게 반납해 연체료를 40달러나 냈다.’
‘새해 전날 뉴욕에서 택시를 탔다가 800달러가 나왔다.’
‘샌프란시스코 집세가 너무 비싸 거실 매트리스에 사람들을 재워주고 숙박비를 받았다.’
미국 넷플릭스, 우버, 에어비앤비의 창업 스토리다. 기존 제품이나 서비스를 이용하다 겪은 불편함을 해소한다는 각 기업의 정체성과 정확하게 연결된 이야기들이다. 다소 진실과 차이가 있더라도 대중에게 공유된 스토리는 공감과 사용경험을 거치며 내러티브(서사)로 진화한다. 소비자들이 보다 쉽게 지갑을 열게 된다는 의미다. 한상만 성균관대 경영학과 교수는 “버진그룹의 리처드 브랜슨, 애플의 스티브 잡스처럼 창업자들이 가진 정신이 브랜드에 고스란히 녹아 있는 기업들이 있다”며 “굳이 명품을 파는 기업이 아니더라도 레거시와 헤리티지는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큰 폭발력을 가진다”고 말했다.
● ‘스토리텔링’이 아쉬운 한국 기업들
반면 한국 기업들은 이런 소프트파워가 뒤처진다는 평가가 많다. 글로벌 시장에 진출한 기업들은 그 차이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고 한다. 국내 10대 그룹의 한 임원은 “사실 미국이나 유럽 같은 선진 시장에서 ‘한국 기업’이 만든 제품이라는 꼬리표가 특별히 플러스 요인이 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미국의 혁신성, 독일의 안정감, 스위스의 정밀함 같은 한국이나 한국 기업 특유의 이미지가 약하기 때문이다.
이 임원은 “세계 5위 수출대국을 바라보는 한국에서 삼성, 현대차, LG 정도를 빼면 기업 인지도 자체가 낮다”며 “오랜 역사와 전통에 뿌리를 둔 유럽 기업, 혁신의 아이콘인 미국 기업, 압도적인 가격 경쟁력을 가진 중국 기업 사이 포지션이 어려운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실제 동아일보가 국내 30대 그룹 전략·마케팅 담당 임원 30명, 한국경영사학회 소속 교수 7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서 ‘한국 기업이 헤리티지를 잘 활용하고 있는가’란 질문에 48명이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그렇다’는 답(16명)의 3배다. 김상순 서울시립대 경영학과 교수는 “글로벌 기업들은 창업 정신이나 최고경영자(CEO) 개인의 헤리티지를 브랜딩 과정 적재적소에 활용한다”며 “기업들이 지나온 역사를 객관적으로 연구하고 또 보존하는 것인데, 한국에선 몇몇 기업을 제외하면 많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일부에선 한국 기업의 업력이 미국, 유럽, 일본 등지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시각도 나온다. 한국 대표 기업들은 1970년대 전후 산업화 과정에서 설립돼 50년 안팎의 역사를 가진 곳들이 많다. 그런데 이번 설문에서 헤리티지를 제대로 활용하기 위한 기업 연한을 묻는 질문에 ‘50년 이상’이라고 답한 이들은 96명 중 12명(12.5%)뿐이었다. ‘업력과는 무관하다’는 답변 15명(15.6%)보다 적었다. ‘짧은 역사’가 헤리티지를 발굴하는 데 절대적 이유가 될 수 없다는 인식이 큰 것이다.
최순화 동덕여대 국제경영학과 교수는 “한국 기업들의 역사가 길지 않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지만 스토리텔링으로 단기적 성과를 내려다 보니 숙성된 이야기가 잘 쌓이지 않았던 측면도 있다”고 분석했다.
● 기업 경쟁력 높이는 ‘브랜드 스토리’
이번 설문에서 기업 경쟁력 제고를 위해 최우선으로 개선해야 할 점으로는 혁신성(46.3%·응답자 80명 중 37명)이 꼽혔다. 그러나 브랜드 이미지나 기업의 역사를 꼽은 이들도 40%나 됐다. 빠른 속도로 변하는 시장 환경에서 경쟁 우위를 점하려면 제품과 서비스에 혁신성을 더하는 역량은 필수다. 여기에 더해 브랜딩 파워를 갖추면 차별화를 통한 경쟁력, 충성도 높은 소비자층 등을 확보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인식이 큰 것이다.
응답자들은 특히 적극 활용해야 할 헤리티지로 창업정신과 브랜드 스토리(복수 응답·각 40명)를 선택했다. 장인정신을 자동차 산업에 적용한 일본 도요타나 ‘고객에게 하나를 팔되 최고의 제품을 가장 싸게 판다’는 경영철학을 바탕으로 창고형 할인마트의 상징이 된 미국 코스트코가 한국이 참고할 만한 기업들로 언급됐다. 한 응답자는 미국의 친환경 브랜드 파타고니아를 해외 모범 사례로 꼽았다. 그는 “파타고니아 브랜드의 가장 차별화된 포인트인 지속가능성은 창업철학부터 이어져 온 것”이라며 “제품 및 서비스 기획, 마케팅 등 모든 사업 분야에 이를 일관되고 진정성 있게 전달하면서 스토리를 완성시킨 것”이라고 했다.
스포츠 음료 게토레이도 대표적인 사례다. 이 음료는 1965년 플로리다대 풋볼팀 ‘게이터스’를 위해 만들어졌다고 알려져 있다. “게이터스가 게토레이를 마시기 시작한 뒤 승률이 올라가 몇 년 내 우승까지 차지했다”는 스토리는 최고의 마케팅 문구가 되고 있다. 현재 미국 시장에서 압도적인 점유율을 차지하는 배경에는 ‘약팀을 우승시킨 음료’라는 인식이 강하게 남았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모종린 연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개인, 정신, 브랜드, 디자인, 스토리, 공장이나 사업장 같은 장소뿐만 아니라 사업에서 파생된 정신이나 스토리 등이 기업이 활용할 수 있는 헤리티지”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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