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축은행 업권에서 자산 규모가 여섯 번째로 큰 페퍼저축은행이 퇴직연금 시장에서 철수했다. 대형사마저 신용등급 하락을 앞두고 이 같은 결정을 내리면서 저축은행 업권 전반의 건전성에 대한 우려가 끊이지 않고 있다.
18일 금융권에 따르면 페퍼저축은행은 최근 은행, 보험, 증권 등 금융사들에 퇴직연금 정기예금 상품을 더 이상 취급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전달했다. 이에 다수의 금융사는 퇴직연금 고객들에게 “이달 6일부터 해당 상품의 신규 및 재가입이 중단된다”고 안내했다.
페퍼는 이번 결정이 전략적인 차원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회사 관계자는 “비대면, 창구 영업 등에 집중하기 위해 퇴직연금 자금을 안 받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금융권에서는 페퍼가 신용등급이 ‘투기(BB급)’로 떨어지기 전에 선제적으로 움직인 것이라는 분석이 많다. 페퍼의 기존 신용등급은 ‘BBB―(부정적)’였는데 2분기(4∼6월) 실적 부진, 연체율 악화 등으로 ‘BB+’로의 하락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저축은행의 신용도가 투기 수준이 되면 은행의 퇴직연금 시장에서 퇴출당한다. 앞서 페퍼는 이달 6일 NICE신용평가에 현재 유효한 등급의 취소를 요청한 바 있다.
투자은행(IB) 업계 고위 관계자는 “신용등급 강등을 앞두고 회사가 등급의 효력을 아예 상실시킨 이례적인 사례”라며 “퇴직연금 시장에서 ‘퇴출’당하기 전에 ‘철수’하는 모양새를 만든 것”이라고 지적했다.
페퍼의 신용등급이 사라지면서 퇴직연금 고객들은 해당 회사 상품에 가입할 수 없게 됐다. 하지만 기존 고객들의 원리금 상환에 문제가 생기진 않는다. 다만 만기 이후 재가입이 불가능한 만큼 다른 금융사의 상품으로 갈아타야 한다.
페퍼의 이 같은 행보에 금융감독원은 내달 초부터 저축은행 퇴직연금 잔액, 만기, 취급액 등을 점검하기로 했다. 퇴직연금 상품 만기가 4분기(10∼12월)에 집중돼 있어 예금 잔액이 대거 빠져나갈 경우 저축은행의 유동성 지표가 악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업권 차원의 퇴직연금 의존도가 높아진 점도 금감원이 예의주시하는 이유다. 저축은행중앙회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퇴직연금 사업을 영위하는 저축은행 32곳의 퇴직연금 잔액은 30조5000억 원으로 전체 예금(90조1600억 원)의 약 34%를 차지했다.
한편 저축은행 업권은 올 상반기(1∼6월) 3804억 원의 적자를 기록했다.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출 부실, 중저신용자 연체 증가 등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 금감원은 올 6월 저축은행 3곳에 이어, 이달 초 수도권 소재 중대형 저축은행 2곳에 대한 경영실태평가에도 나섰다. 금융당국 고위 관계자는 “증자 여력이 없거나 의지가 부족한 일부 저축은행들이 문제”라며 “현재 저축은행의 상황이 경제 시스템 전반의 위기로 확산될 가능성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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