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부터 ‘조용한 퇴사(Quiet Quitting)’라는 말이 유행이다. 2022년 미국의 한 20대 엔지니어가 틱톡에 조용한 퇴사를 언급하며 “일이 곧 삶은 아니다. 당신의 가치가 당신이 하는 일로 정의되지 않는다”라는 영상을 올렸는데, 이 영상이 세계적으로 히트를 쳤다. 이후 조용한 퇴사라는 말이 이슈가 됐다. 조용한 퇴사는 회사를 그만두지 않으면서도 최선을 다해 일하기보다 대강대강 일하며 다른 데서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직장에서 돈을 받으면서 열심히 일하지 않고 대강대강 일한다는 게 좀 그렇지 않은가. 최소한 직장에서는 열심히 일하려고 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조용한 퇴사’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직장에서 대강대강 일하는 이유에 대한 강력한 근거를 내세운다. 바로 “받는 돈만큼만 일하겠다”는 논리다.
월급보다 더 일한다는 생각이 바탕
직장에서 열심히 일할 필요는 없다. 받는 돈만큼만 일하면 되고, 그것으로 직장에 대한 의리는 충분히 다한 것이다. 주말이나 퇴근시간을 넘어서까지 일할 필요가 없고, 나아가 근무시간에도 아주 열심히 할 필요는 없다. 그냥 돈을 주는 만큼만 일하면 되는 거 아닌가. 그럴 듯하다. 받는 돈만큼만 일한다는 것은 정당하다. 그게 회사나 자신 모두에게 공정한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조용한 퇴사는 개인적으로 아니라고 본다. 주말에 회사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퇴근시간에 회사 일을 하지 않겠다는 것은 괜찮다고 생각한다. 회사가 아닌 다른 곳에 자기 인생이 있다고 여기면서 주말이나 퇴근시간 이후에 자신의 삶을 추구하는 건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그런데 받는 돈만큼만 일하겠다면서 업무 시간에 대강대강 일한다는 건 받아들이기 힘들다. 이는 자신이 받는 월급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서 나온 발상이다. 월급 300만 원을 받지만, 내가 하는 일은 500만 원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서 하는 말이다. 그러니 대강대강 일해도 받는 돈만큼은 일하는 것이고, 따라서 조용한 퇴사를 해도 정당하다. 돈을 받는 사람은 자신이 받는 돈보다 더 많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돈을 주는 사람, 사장이나 고용주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장의 소원은 이것이다. “받는 돈만큼만이라도 일하는 직원들이 있었으면 좋겠다.” “월급 300만 원을 주면 300만 원어치 일은 해줬으면 좋겠다.” 월급 300만 원을 주는데 500만 원, 1000만 원어치 일을 해주는 직원은 언감생심 바라지도 않는다. 그냥 주는 돈만큼, 300만 원만큼만 일해도 된다. 하지만 그런 직원은 굉장히 드물다. 대다수 직원은 월급 300만 원을 받으면서 100만 원, 200만 원어치만 일하고 있다. 속상하지만 어쩔 수 없이 체념하고 있는데, 거기에 더해 조용한 퇴사라며 대강대강 일하려 한다. 주는 돈만큼 일하지는 못하지만, 그 나름 열심히 하려고 들면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주는 돈만큼 일하지도 않으면서 대강대강 한다면 이건 이야기가 다르다. 눈 밖에 나는 직원이 될 수밖에 없고, 정말로 미래가 없는 직원이 된다. 미국 같으면 몇 달 지나고 바로 잘릴 것이다. 쉽게 직원을 해고할 수 없는 한국이나 일본에서는 문제 직원으로 찍히고 여러 가지 측면에서 불이익을 당할 것이다. 사장이나 상사가 직원이 열심히 일하지 않고 대강대강 일한다는 걸 어떻게 아느냐고? 사무실에 출근해 계속 자리에 앉아 있고, 시키는 일은 어쨌든 펑크 내지 않고 하는데, 직원이 조용한 퇴사를 하고 있다는 걸 사장이 어떻게 알겠느냐고?
상사 눈에는 대강 일하는 것 다 보여
학창시절에 교사가 교실 앞 교단에 서 있으면 학생들이 뭘 하는지 다 보인다고 했던 말을 들어본 적 있는가. 자는지, 조는지, 딴짓을 하는지, 멍하게 있는지 등등을 다 알 수 있다고. 내가 학생 때도 교사들이 그런 말을 했지만 실제로는 모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교과서를 펴고 그 위에 다른 책을 올려놓으면 어떻게 알겠나. 요령 있게 잘하면 충분히 교사 모르게 딴짓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직접 선생이 되어 교단 위에 올라보니 과거 교사들이 했던 말이 다 이해가 됐다. 교단 위에 올라가면 정말로 학생들이 딴짓을 하는 게 다 보인다. 교과서 위에 다른 책을 놓고 보면 교사가 모른다고? 수업과 관계없이 계속 고개를 숙이고 뭔가를 보고 있다. 만화를 보는지 소설을 보는지 다른 교과서를 보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다른 책을 보고 있다는 건 그냥 눈에 보인다. 그래도 자신은 교사 모르게 딴짓을 해왔다고? 그건 교사가 알면서도 그냥 내버려둔 것이다. 그냥 넘어가주는 것이지, 모르는 게 아니다. 마찬가지다. 사장이나 상사는 직원이 열심히 일하는지, 대강대강 일하는지 그냥 안다. 내가 교수였을 때 일을 도와주는 조교들이 있었다. 그들은 논문 작성은 교수가 훨씬 잘하지만 복사나 타자, 엑셀 정리, 파워포인트 작성, 코딩 같은 일은 자기들이 훨씬 더 잘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있나. 복사, 타자, 컴퓨터 코딩 등은 내가 석사과정, 박사과정 때 몇 년간 계속하던 일이다. 몇 년 하고 나가는 조교들보다 훨씬 더 오랜 기간 그 일을 했다. 교수가 되고나서는 그런 일을 내가 직접 하지 않고 맡긴다. 하지만 파워포인트가 어떤 형태일 때 어떤 작업이 필요하고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어느 정도로 일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알고 있다. 새로운 프로그램이 나와서 내가 모르는 부분이 있다고? 그럴 수는 있지만, 새로운 프로그램은 이전보다 더 편하고 시간을 절약하도록 나온다. 내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빠르지, 더 늦고 어렵지는 않다. 조교들은 지금 교수의 모습만 알고, 교수가 교수가 되기 전, 그러니까 석박사생으로 오랫동안 있었던 시간은 모른다. 지금 교수가 전에는 매일 복사하고 타자 치고 PPT를 만들었다는 걸 모른다. 마찬가지다. 업무에서 중진급 이상 되면 직원이 하는 업무가 어떤 일인지 사장이나 상사가 모를 수도 있다. 하지만 최소한 중진급이 되기 전에 직원이 하는 일은 사장, 상사가 이전에 매일매일 하던 일이다. 직급이 높아지면서 지금 안 하고 있을 뿐이다. 사장이나 상사 눈에는 지금 직원에게 맡긴 일이 몇 시간 걸릴지, 어느 정도 업무량으로 할 수 있을지가 그냥 보인다. 그런데 직원은 아직 사장이나 상사만큼 일이 익숙하지 않다. 주는 돈만큼의 실적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돈을 주는 입장에서는 속이 터지지만, “그래도 계속 하다 보면 나아지겠지” “앞으로 괜찮아지겠지” “저 애가 없으면 내가 그 일을 해야 하는데 그것보다는 낫지”라고 생각하면서 월급을 준다. 그런데 그런 상태에서 직원이 소위 ‘조용한 퇴사’를 한다면? 돈을 주는 만큼만 일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직원이 자기는 받는 돈만큼만 하겠다며 대강대강 일한다면? 이건 제쳐야 하는 직원이다. 한국에서는 해고가 어렵고, 또 나쁜 사람이라고 욕먹기 싫어서 그냥 두고 있을 뿐이다. 직원이 조용한 퇴사를 하면 사장이나 상사도 그 직원을 마음속에서 퇴사시킨다. 회사는 다니겠지만, 회사에서 미래는 없다. 지금 당장은 괜찮을 수 있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더는 회사를 다니기 어려워지는 시기가 분명 다른 사람보다 훨씬 일찍 온다.
사자도 사냥 순간에는 최선 다해
조용한 퇴사를 해도 아무 문제없는 사람이 있다. 정말 천재적인 능력이 있어서 대강대강 일해도 다른 이들보다 더 나은 실적을 올리는 사람이다. 이러면 제대로 일하지 않는 태도가 눈에 보여도 사장이나 상사는 아무런 불만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능력을 가진 사람은 정말 극소수다. 대부분은 최소한 직장 업무 시간에는 제대로 일해야 자신이 받는 돈만큼의 일을 간신히 해낼 수 있다. 업무 외에서 자신의 삶을 찾으려는 조용한 퇴사는 아무 문제없다. 하지만 자기가 받는 돈만큼만 일하겠다는 조용한 퇴사는 곤란하다. 돈을 주는 사장은 직원보다 돈과 업무의 가치에 더 민감하다. 조용한 퇴사자에게 계속 당하고 있을 사장은 없다. 정글의 왕 사자는 평소에 놀고 쉬기만 하지만, 먹이를 사냥하는 순간에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 아무리 사자라도 자기가 먹을 만큼의 노력만 하겠다고 조용한 퇴사를 하는 사자는 사냥에 성공하지 못한 채 굶어 죽는다. 조용한 퇴사를 한 사자에게 잡힐 만큼 만만한 얼룩말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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