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한류, K-헤리티지로]
〈3〉 ‘메모리 반도체 1위’ 삼성
이병철 창업회장 “기술없이 살길 없다”
착수 반년만에 첫 자체 메모리 양산… 9년뒤 세계 첫 64Mb D램 개발 성공
“AI시대 HBM 위기 ‘초격차’로 극복”… 파운드리 공정 혁신 등 쇄신 돌입
《반도체 초격차 명장면 3가지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의 전시품이 된 반도체가 있다. 1992년 삼성전자가 세계 최초로 개발한 첫 번째 메모리, 64Mb(메가비트) D램이다. 현재의 세계 1위 메모리 반도체 기업 삼성을 있게 한 ‘초(超)격차’ 헤리티지의 상징이다. “남처럼 차근차근 단계를 밟으면 기술 후진국이 된다”는 절박감으로 초격차에 매달려 세계 정상에 오른 삼성은 최근 인공지능(AI) 시대 새로운 도전을 맞고 있다. 위기 역시 제2의 초격차로 돌파하겠다는 전략이다.》
24일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5층 역사관에는 광복과 민주항쟁, 새마을운동 등 굵직한 현대사 전시를 거쳐 ‘호황의 시대’ 코너가 있었다. 중심에는 조명을 받아 반짝이는 웨이퍼와 손톱만 한 반도체 한 개가 놓여 있었다. 삼성전자가 1992년 세계 최초로 개발한 첫 번째 메모리 반도체이자, 한국을 본격적인 경제 호황기로 이끌었던 64Mb(메가비트) D램이다.
삼성전자는 1983년 메모리 반도체 진출 선언 9년 뒤, 경쟁국들을 제치고 64Mb D램을 만들어 내며 세계 정상에 올라섰다. 역사박물관 측은 64Mb D램 제품에 대해 “반도체 산업은 선진국과의 기술 격차를 좁혔다”며 의미를 설명했다.
● “삼성 반이 날아가도 도전”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에도 전시된 D램은 세계 메모리 반도체 1위를 있게 한 삼성만의 ‘초격차’ 헤리티지의 상징이다. 초격차는 경쟁자가 넘을 수 없을 정도의 큰 격차를 의미한다. 삼성 반도체 역사상 초격차 헤리티지가 발현된 주요 사건으로 ①첫 자체 메모리 64kb(킬로비트) D램 개발 신화 ②업계 상식을 깬 3차원 V낸드 ③세계 최초 극자외선(EUV) 노광장비 적용 7나노 양산이 꼽힌다.
출발부터 한국 기술 수준을 크게 뛰어넘어야 하는 모험이었다. 1983년 고 이병철 삼성 창업회장이 도쿄 선언으로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 진출을 선언한 당시 미국과 일본만이 고급 사양 메모리 반도체 개발과 양산에 성공한 상태였다.
세계 산업계의 비웃음을 딛고 초격차를 달성하기 위해 삼성은 ‘정신 무장’부터 시작했다. 개발자들은 ‘안 된다는 생각을 버려라’ ‘큰 목표를 가져라’ 등 ‘반도체인의 신조’ 십계명을 매일 아침마다 복창했고, 밤낮으로 연구에 매달렸다. 삼성은 결국 개발 착수 6개월 만인 1983년 11월 64kb D램 양산에 성공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 창업회장은 1985년 4월 27일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잘못하면 삼성그룹의 자산이 절반 이상 날아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삼성 아니면 이 모험을 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했다”고 회상했다. “적극적인 기술 개발 없이는 우리 경제의 살길은 없다”며 절박한 초격차를 이어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고 이건희 삼성 선대회장도 1997년 펴낸 에세이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동아일보사)에서 “반도체 집적 기술은 1983∼94년 10년 동안에만 무려 4000배가 진보했다”며 “월반(越班)하지 않으면 영원히 기술 후진국 신세를 면치 못하리라고 판단했다”고 썼다. 차근차근 단계를 밟기보다 초격차로 뛰어올라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못 박은 것이다.
초격차여야 한다는 헤리티지는 2013년 세계 최초 3차원 V낸드플래시 메모리 양산으로 이어졌다. 한국 반도체가 3차원 메모리 시대를 여는 전기를 마련한 사건이다. 기존 낸드 기술은 10nm(나노미터)급 공정이 한계로 전망돼 왔다. 삼성전자는 ‘면적이 좁으면 위로 쌓아서 집을 늘려 보자’는 아이디어에 착안했다. 3차원 구조의 셀과 이를 24층으로 쌓은 수직 적층 기술을 독자적으로 개발해 적층 낸드 시장의 포문을 연 것이다.
세계 첨단 반도체 시장을 뒤흔들고 있는 EUV 장비 선제 도입으로 반도체 역사를 바꿔 놓기도 했다. 7나노 이하 최첨단 반도체 구현에 필수인 EUV 장비를 먼저 도입해 2019년 세계 최초로 EUV 장비를 활용한 7나노 시스템 반도체를 양산하기 시작한 것이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반도체 미세공정의 한계를 돌파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받는 장면”이라고 말했다.
● AI 위기에… 초격차 헤리티지로 승부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도 틈만 나면 기술 혁신을 강조해 왔다. 2018년 8월 경기 화성 반도체 사업장을 찾아 “미래 반도체 수요에 대비하기 위해선 ‘기술 초격차’가 반드시 유지돼야 한다”고 강조한 데 이어 2022년 8월 기흥 반도체 연구개발(R&D) 단지 기공식에서도 “세상에 없는 기술로 미래를 만들자”며 초격차 정신을 당부했다. 삼성전자는 현재 메모리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시스템LSI(설계), 어드밴스트 패키징 사업을 모두 갖춘 ‘세계 유일’ 반도체 토털 솔루션 공급자로, 고객 맞춤형 턴키(일괄 공급) 전략을 통해 경쟁사들과 차별화하겠다는 전략이다.
하지만 최근 인공지능(AI)으로 시장이 급변하며 삼성의 초격차 전략도 도전을 맞고 있다. 첨단 메모리인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에서 경쟁사인 SK하이닉스에 점유율 1위를 내주고, 파운드리에선 대만 TSMC에 밀리며 전례 없는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이에 삼성전자는 메모리사업부 내 HBM 개발팀을 신설하고, 파운드리 공정 수율 향상과 고객사 유치에 박차를 가하는 등 전반적인 조직 쇄신에 돌입했다.
위기를 헤쳐 나갈 돌파구도 ‘초격차’ 헤리티지에서 찾고 있다. ‘안 되는 것을 되게 할’ 새로운 ‘정신 무장’을 고민하는 것이다. 최근 초격차 정신을 계승하되 새로운 시대에 맞출 제2의 반도체인의 신조를 임직원들에게 공모 중이다. 삼성전자는 “반도체 사업 50년을 맞은 지금, 과거와 다른 새로운 환경 속에 중요한 전환점에 서 있다”며 “지난 반세기 동안 삼성 반도체의 구심점이 됐던 반도체인의 신조도 앞으로의 50년에 맞는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해야 할 때”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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