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의 심리] 대학 때 많이 했던 일상적 행동… 서민이 부자됐다고 ‘서민 취향’까지 버리진 않는다
‘레드 스니커스(red sneakers) 효과’라는 게 있다. 프란체스카 지노, 실비아 벨레자 교수 등 미국 하버드대 경영대학 연구팀이 2013년 제시한 것으로, 부자의 서민 취향에 관한 이론이다. 고가 명품 매장에 값비싼 정장과 가죽 코트를 입은 사람이 손님으로 들어왔다. 또 어떤 사람은 그냥 헬스장에서나 입을 법한 운동복을 입고 들어왔다. 이 둘 중 누가 더 부자이고, 명품을 살 가능성이 클까. 대부분 정장과 코트를 입은 사람이 더 부자일 것이라고 예측했다. 하지만 명품 브랜드숍에 근무하는 이들은 낡은 운동복을 입고 온 사람이 더 부자일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다. 낡은 운동복을 입고 온 사람의 행동이 좀 어색하다면 그는 부자가 아니다. 하지만 고급 명품 매장 안에서 행동에 아무런 스스럼이 없다면 그는 오히려 부자일 가능성이 크다.
부자의 서민 취향, 레드 스니커스 효과
한 대학 교수가 수염도 안 깎은 채 티셔츠 차림으로 강의를 한다. 다른 교수는 단정한 모습에 정장을 입고 강의를 한다. 학생들은 둘 중 누가 더 실력 있는 교수라고 판단할까. 대부분 정장을 입고 강의하는 교수가 더 실력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명문 대학에서는 달랐다. 명문 대학에서는 수염을 안 깎은 채 티셔츠 차림으로 강의하는 교수가 더 실력이 있다고 봤다. 모두가 정장을 입고 참석한 어느 공식 모임에서는 강사가 빨간 운동화를 신고 강연을 했다. 그랬더니 많은 참석자가 그를 더 능력 있고 지위가 높은 강사라고 판단했다. 소위 부자의 서민 취향이다. 고급 명품을 휘감은 사람보다 서민 취향을 드러내는 부자가 진짜 부자이고 자신감도 더 크다. 또 이런 부자의 서민 취향은 주변 사람들에게 “소탈하다” “명품에 신경 안 쓴다” 같은 긍정적인 인식을 심어주기도 한다. 이런 인식을 레드 스니커스 효과라고 한다. 그렇다면 정말 부자의 서민 취향이 독특하고 별나며, 부자로서 특별한 자신감을 표현하는 것일까. 조금 다른 것 같다. 이건 부자가 특별히 서민 취향을 가졌다기보다 서민 취향을 가진 보통 사람이 나중에 부자가 됐을 때 일상적으로 드러내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최근 주말에 경기 가평에 갈 일이 있었다. 차를 운전해서 가도 되지만, 주말에 서울과 춘천을 오가는 도로는 굉장히 막히곤 한다. 목적지가 가평 기차역 근처라서 그냥 기차를 타고 갔다 오기로 했다. 왕십리역에 도착해 가평 가는 ITX(도시간 특급열차) 기차표를 끊으려고 보니 자리가 없었다. 모두 매진이었다. 주말 ITX 기차는 거의 매진이라 미리 예매를 해야 한단다. 방법이 없나 살펴보니 입석이 있었다. 입석표를 끊고 기차를 탔다. 입석 칸에 서서 가다 보니 지하철은 정류장마다 다 서지만 ITX 기차는 청평, 가평 등 주요 역에만 정차했다. 문이 거의 열리지 않았고, 승객이 타고 내리는 일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몇몇은 그냥 기차 바닥에 앉아서 가기도 했다. 나도 입석 칸 바닥에 앉았다. 문에 기댄 채 바닥에 앉아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한 생각이 지나갔다. “100억 자산이 있는데도 기차 바닥에 앉아서 가고 있네. 사람들은 100억 자산가가 기차 바닥에 앉아서 간다는 걸 생각할 수 있을까. 이걸 믿을까.” 그리고 또 이런 생각도 지나갔다. “나는 분명 부자라고 할 만한 자산이 있는데, 왜 이러고 다니는 것일까.” 레드 스니커스 효과가 떠올랐다. 부자가 서민 취향을 드러내면 부자 티를 안 내는 소탈한 사람으로 보인다는데, 나는 그런 걸 바라고 이러고 다니는 것일까. 그럴 리가 있나. 기차에 나를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만큼 나를 소탈한 부자라고 생각할 사람도 전혀 없다. 그냥 기차 바닥에 앉아 가는 초라한 아저씨로 볼 뿐이다. 내가 기차 바닥에 앉은 이유는 하나다. 이전에 많이 해본 짓이기 때문이다. 내가 대학생이던 시절, 기차 바닥에 앉아 가는 일은 일상이었다. 이전에 자연스럽게 많이 한 행동이고, 그래서 지금 주저 없이 기차 바닥에 앉는다. 부자가 서민 취향을 가진 게 아니라, 서민 취향을 가진 서민이 나중에 어쩌다 부자가 된 것이다. 어려서부터 몸에 익은 취향은 잘 변하지 않는다. 서민 취향을 가진 부자로 포지셔닝하려는 게 아니라, 그냥 전에 하던 대로 행동할 뿐이다.
싸구려 햄버거 좋아하는 재벌 회장
어떤 재벌 회장의 이야기다. 재벌 회장이 외국 호텔에 묵을 때 저녁식사로 햄버거가 먹고 싶어 직원에게 햄버거를 사와 달라고 했다. 그런데 직원은 재벌 회장이 설마 값싼 햄버거를 먹겠느냐면서 고급 스테이크를 사왔다. 하지만 재벌 회장은 정말로 햄버거가 먹고 싶어서 햄버거를 주문한 것이었다. 서민 코스프레를 한 것도 아니고, 외국에서 고급 스테이크 구하기가 힘들 테니 직원의 수고를 덜어주려고 햄버거를 요구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직원은 재벌 회장이 그런 싸구려 음식을 먹고 싶어 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고, 또 재벌은 비싸고 좋은 음식만 먹을 거라고 생각해 스테이크를 사왔다. 이 재벌 회장이 처음부터 재벌 회장이었다면 싸구려 음식인 프랜차이즈 햄버거를 먹어보지도 않았고 좋아할 리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처음부터 재벌이 아니었다. 고학으로 대학을 졸업한 뒤 직장 생활을 하다가 성공해 재벌 회장이 됐다. 이전에 프랜차이즈 햄버거를 먹으면서 일했던 그는 그래서 햄버거를 좋아했다. 부자가 서민 취향을 가져서, 또는 서민 코스프레를 하려고 햄버거를 찾는 게 아니고, 원래부터 햄버거를 먹어왔을 뿐이다. 내가 아는 몇몇 부자는 골프장에 가면 머루, 살구 등을 나무에서 따곤 한다. 골프장에 있는 과수 열매는 누가 따 가는 게 아니라, 다 익으면 바닥에 떨어져 썩는다. 이걸 어떻게 그냥 내버려두냐면서 과일을 따곤 한다. 같이 골프 치는 사람들이 왜 그런 걸 따느냐고 해도, 캐디가 그럴 필요 없다고 해도 과일 따기에 열심이다. 이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다. 지금은 부자지만 어렸을 때 시골에서 자랐다는 점이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이런 걸 많이 따봤고, 이런 걸 따는 게 습관화돼 있다. 이대로 그냥 두면 나무에 매달린 채 썩을 테니 그냥 두고 볼 수가 없다. 서울에서만 살아온 사람이나, 과일을 마트에서만 구입해온 사람한테 나무에 달린 과일은 그저 관상용일 뿐이다. 반면 시골에서 자란 사람에게는 그냥 내버려둘 수 없는 소중한 식량이다. 그래서 지금은 부자가 됐지만 어려서 배우고 익힌 대로 이런 과일을 보면 부지런히 딴다. “부자가 왜 저러나” “서민 코스프레인가”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그 사람에게는 그냥 일상적인 일일 뿐이다. 사람들은 부자를 그냥 부자 카테고리로만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부자에도 굉장히 많은 카테고리가 있다. 20억~30억 원 자산가, 50억 원 자산가, 100억 원 자산가, 200억 원 자산가는 완전히 다르다. 사고방식도, 생활양식도 천양지차다. 그리고 부모가 부자라 어려서부터 부자였던 사람과 나이 들어 부자가 된 사람도 완전히 다르다. 어려서부터 부자였던 사람은 취향도 고급스럽다. 하지만 자수성가한 사람은 그렇지 않다. 취향 가운데 별로 바뀌지 않는 것들이 있다. 음악은 10대, 20대 때 좋아했던 음악을 평생 듣게 마련이다. 음식은 어려서 좋아했던 음식을 나이가 들어서도 계속 찾게 된다. 또 어려서부터 했던 행동은 사회에서 금기시된 것이 아닌 한, 나이 들어서도 계속하게 된다. 어려서부터 부자였던 사람은 취향도 좀 고급스럽다. 그런 사람은 서민 취향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이 서민 취향을 나타난다면 그건 전략이다. 마음속에서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다른 이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려고 전략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레드 스니커스 효과는 사실 이런 전략적 행위로서 서민 취향을 가리킨다.
부자의 서민 취향은 구분돼야
다만 자수성가한 부자의 서민 취향은 다르다. 레드 스니커스 효과를 원해서 서민 취향을 드러내는 게 아니라, 그냥 취향이 그런 것이다. 원래 기차 바닥에 앉아서 다녔고, 햄버거를 좋아했으며, 산과 들에서 과일을 따면서 살아왔다. 외부 시선으로 보면 부자의 서민 취향이라고 칭찬받을 수도 있고, 서민 코스프레라고 비난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부자가 아니었다가 부자가 된 사람에게 이건 부자의 서민 취향, 서민 코스프레가 아니다. 원래 그런 사람일 뿐이다. 원래부터 부자의 서민 취향과 부자가 아니었다가 나중에 부자가 된 사람의 서민 취향은 그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 그런 점에서 부자의 서민 취향은 구분될 필요가 있다.
최성락 박사는… 서울대 국제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행정대학원에서 행정학 박사학위, 서울과학종합대학원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동양미래대에서 경영학과 교수로 재직하다가 2021년 투자로 50억 원 자산을 만든 뒤 퇴직해 파이어족으로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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