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구에 한국 본사를 두고 주로 기업용 서비스를 판매하는 한 글로벌 기업은 2019년 서울지방국세청의 세무 조사를 받았다. 조사 과정에서 세무당국은 외화 송금 내역과 경영자문료 배분 방법 등이 필수 자료라고 보고 제출을 요구했다. 하지만 이 기업은 자료 제출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결국 내지 않았다.
자료 제출 거부가 계속되자 세무당국은 이 기업에 총 92차례에 걸쳐 18억 원의 과태료를 부과했다. 국세기본법에서는 납세자의 수입금액 규모에 따라 최소 500만 원에서 최대 5000만 원의 과태료를 부과할 수 있도록 하고 있는데 이 기업이 여러 건의 자료 제출을 거부한 것으로 보고 ‘중복 부과’에 나선 것이다.
이 문제가 법정 다툼으로 이어진 가운데 2021년 법원은 과태료를 2000만 원만 부과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결정을 내렸다. 92건의 거부행위가 ‘단일한 고의’로 이뤄진 것이므로 하나의 거부행위로 보는 것이 맞다는 것이다.
16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소속 국민의힘 이종욱 의원실과 국세청 등에 따르면 이처럼 일부 다국적 기업과 대기업 등이 대규모 과세를 피하기 위해 자료 제출을 거부하는 사례가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정상적인 세무 조사가 진행될 경우에 부과될 수 있는 과세액에 비해 자료 제출을 거부했을 때 내는 과태료의 규모가 작다는 점을 악용해 일부 다국적 기업과 대기업 등이 자료 제출을 거부하는 방식으로 세무 조사에 대응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2021년부터 지난해까지 최근 3년 동안 국세청이 자료 제출 거부에 대해 부과한 과태료는 44건, 2억7000만 원으로 건당 평균 614만 원에 그쳤지만, 과태료가 부과된 법인의 연 매출액은 평균 3100억 원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됐다.
또 2021년 법원이 자료 제출을 거부해도 과태료를 중복으로 부과할 수 없다는 결정을 내놓으면서 2020년 6억1000만 원(66건) 규모였던 과태료 부과는 2021년 1억3000만 원(23건), 2022년 7000만 원(10건), 지난해 7000만 원(11건) 등으로 줄어드는 흐름이다.
일부 다국적 기업은 세무 조사 자료 제출을 거부한 이후 조세 불복 소송에서는 자신들에게 유리한 자료를 제출하는 방식으로 세금을 회피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실제로 국내 소비자들로부터 직접 구독료를 받으며 영상물을 제공하는 한 다국적 기업은 한국의 구독료 수입 대부분을 ‘구독권 구매대가’ 명목으로 해외로 유출하는 혐의로 세무조사를 받았다. 세무당국은 이 조사에서도 계약서와 해외 본사에 대한 구독권 구매대가 산출 대가 등의 자료를 요구했다. 하지만 이 회사는 국외 관계사만 이 계약서 등을 보유하고 있다며 제출을 거부했다.
결국 국세청은 일부 자료를 근거로 과세를 결정했지만, 이 기업은 부실한 자료를 근거로 한 과세라며 위법을 주장하고 소송에 나섰다. 소송 과정에서 이 기업은 국세청에 제출하지 않은 자료 중 일부를 제출하면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주장을 펼쳤고 결국 국세청이 애초 부과한 세금 가운데 상당액이 줄어들었다.
이와 관련해 세무당국은 일 평균 매출액의 0.3% 등의 기준에 미제출 일수를 곱하는 방식으로 부과되는 이행강제금 제도 도입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세무당국 관계자는 “다국적 기업의 경우 주요 자료가 해외 소재 본사에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한국 법인이 자료 제출을 거부하면 실효성 있는 세무 조사가 어려울 수 밖에 없다”며 “공정거래위원회 등이 이미 도입한 이행강제금 등을 통해 자료 제출 거부에 대한 처벌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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