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 관련 업무를 하는 친구 몇 명을 만나 대화할 기회가 있었다. 이야기를 하다가 부자들을 비판하는 말을 들었다. “돈 조금 내놓으면 되는데 그걸 안 한다. 너무 이기적이야.” “부자들이란… 문제야(한숨).” 부자들이 자기 몫을 약간 포기하고 조금만 더 내면 많은 문제가 해결되는데, 부자들이 오히려 더 아득바득한다. 전체를 생각하지 않고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부자들이 복지 업무의 적이다. 나는 속으로만 생각했다. “그들이 정말 그랬을까. 부자가 자기 몫을 조금도 포기하지 못하겠다고 날을 세우고, 조금도 더 내지 못하겠다고 다투었을까. 그건 아니었을 거 같은데….”
복지세 증액 59.5% 찬성
정말 부자들은 자기 몫만 챙기느라 다른 사람을 돕는 일에 인색할까. 양재진 연세대 행정학과 교수 연구팀이 진행한 ‘복지와 세금 간 관계’에 대한 연구가 있다. 2021년 발표된 이 연구 결과는 한국 성인 2502명을 대상으로 복지 지출을 늘려야 하는지, 복지 증대를 위해 세금을 더 낼 의향이 있는지, 세금을 낸다면 어느 정도 금액을 낼 수 있는지, 이런 의향이 소득에 따라 어떻게 달라지는지 등을 조사했다. 조사 결과를 보면 사람들은 지금보다 복지 지출을 늘려야 한다는 데는 찬성한다. 더 많은 복지를 위해 복지 관련 세금을 올려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도 59.5%가 찬성한다. 다만 문제가 있다. 복지를 위해 세금을 올려야 한다는 데는 찬성하지만, 내가 세금을 더 내는 건 안 되며 이 세금은 부자, 기업 등 돈 많은 사람이 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자신도 세금을 더 내야 한다는 부분에서는 응답자의 24.1%만 찬성했다. 73.6%는 자신은 세금을 더 낼 수 없고, 부자나 기업 등 돈 많은 사람들이 더 내야 한다고 봤다.
이런 현상을 ‘눔프(Noomp·Not out of my pocket)’라고 한다. 복지 제도를 늘리는 것은 찬성하지만, 내 주머니에서 돈이 나가는 것은 인정하지 않는 현상이다. 눔프의 문제는 부자나 대기업은 절대적으로 수가 적기 때문에 이들로부터 걷는 세금만으로는 복지비를 감당할 수 없다는 점이다. 경주 최부잣집은 조선시대 후반 최고 갑부 중 하나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것으로 유명하다. 농민들이 살기 어려우면 쌀을 빌려주고, 형편이 어려워 갚지 못하면 그 빚을 면제해줬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재벌이면서 복지가였던 셈이다. 다만, 이런 최부잣집이라 하더라도 그들의 목표는 100리(약 39㎞) 안 사람들이 굶어 죽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100리 밖 사람들이 굶어 죽는 것은 손쓰지 못했다. 또 100리 안 사람이라도 그들을 굶어 죽지 않게 하는 것이 목표였지, 먹을거리가 부족해 굶주리는 것 자체를 모두 해결할 수는 없었다. 부자들의 돈만으로 국민 복지가 가능하다면 이 문제는 간단히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소수의 부자, 대기업 돈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기에 복지 문제가 어렵다. 눔프 현상이 많으면 복지비 증대가 쉽지 않다.
부동산 부자는 복지세 증액 반대
다행스럽게도 복지 증대를 위해 세금을 더 내겠다는 사람도 많다. 24%가량 되는 사람들이 고소득자뿐 아니라 모두가 더 세금을 내야 한다고 공언했다. 그런데 이렇게 세금을 더 내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어도 문제다. 복지를 위해 세금을 더 낼 수는 있는데, 더 낼 수 있는 세금 크기의 평균이 연 19만 원가량이다. 1년에 19만 원, 즉 한 달에 1만6000원 정도를 더 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 달에 1만6000원 정도 더 내는 것으로는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 세금 인상에 대한 불만이나 저항 없이 복지를 확충하는 것은 어렵다. 그럼 부자들은 복지 관련 세금을 더 내는 것에 찬성할까, 아니면 반대할까. 이 부분에서는 재미있는 결과가 있다. 부동산 자산액이 많은 사람은 세금을 더 내는 것에 반대했다. 그런데 소득이 많은 사람은 세금을 더 내는 것에 찬성한다. 같은 부자라 해도 부동산이 많은 사람은 복지 관련 증세에 반대하고, 돈을 더 많이 버는 고소득자는 복지 관련 증세에 찬성한 것이다. 부동산 자산액이 많은 부자들이 복지 관련 증세에 반대한 이유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흔히 비싼 부동산을 가진 사람을 부자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부동산 부자 중에는 부동산만 있고 현금 자산은 없는 사람이 많다. 특히 나이 들어 직장에서 은퇴한 이들 가운데 이런 경우가 꽤 된다. 재산이 많으니 부자는 부자인데, 현금은 없으니 실제 생활은 부자가 아니다. 이런 사람들은 세금이 증가하면 바로 자기가 쓸 수 있는 돈이 줄어들고 생활수준이 하락한다. 따라서 부동산만 있는 부자는 생활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세금 증액에 반대할 수밖에 없다. 현금이 없는 부동산 부자는 복지 관련 증세에 반대하지만, 실제 돈을 많이 버는 고소득자는 복지를 위해 세금을 더 낼 용의가 있다. 그럼 고소득자는 보통 사람에 비해 세금을 더 내려 할까, 덜 내려 할까. 고소득자는 복지 관련 세금을 보통 사람보다 덜 내려 하는 이기적 성향을 가졌을까, 보통 사람보다 세금을 더 내려 하는 관대한 성향을 가졌을까. 일반적으로는 고소득자가 복지 관련 증세에 반대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실제 조사에서는 고소득자들이 복지 관련 세금을 일반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이 내려는 성향이 있는 것으로 나왔다. 월 200만 원 이하 소득자는 1년에 10만 원 정도를 세금으로 더 낼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월 1000만 원 이상 소득자는 1년에 68만 원을 세금으로 더 낼 수 있다고 밝혔다. 단순히 돈을 더 많이 버니까 세금을 더 많이 낸다는 건 아니다. 월 1000만 원은 월 200만 원의 5배다. 이때 세금으로 더 낼 수 있다는 금액은 68만 원이니 10만 원의 6.8배다. 절대적 액수로 돈을 더 내는 것뿐 아니라, 소득 비율로 따져도 고소득자는 일반 소득자보다 더 많은 금액을 복지비로 낼 의향이 있었다. 이 결과만 가지고 고소득자들이 더 관대하다거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게 보기에는 절대적 금액이 너무 적다. 월 1000만 원 이상, 연 1억2000만 원 이상을 버는 데 복지 관련 세금으로 68만 원만 더 낼 수 있다는 건 너무 적지 않나. 그렇다고 고소득자들이 인색하고 복지에 관심이 없다고 매도할 수는 없다. 복지 관련 세금으로 부담할 수 있다는 금액이 적기는 하지만, 그래도 보통 사람보다는 훨씬 높은 비율의 금액이다.
세금 증액에 대한 실제 행동은 달라
그런데 내가 보기에 고소득자들이 더 많은 복지 관련 세금을 낼 용의가 있다고 해서 실제로 더 낼 것이냐 하면 그건 또 아닌 것 같다. 용의가 있는 것과 실제 행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돈을 더 낼 의사가 있지만, 실제로는 돈을 더 내기 싫은 주된 이유가 앞에서 본 눔프 현상 때문이다. 10명 정도가 모여 다른 사람을 도와줄 돈을 갹출한다고 해보자. 이때 고소득자가 “나는 좀 더 낼게”라는 식으로 진행되면 충분히 자기가 원래 내려던 금액의 돈을 낼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이 10만 원씩 낼 때 고소득자가 68만 원을 내는 건 자연스럽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돈 많은 네가 다 내” “우리는 돈이 없어서 못 내” “돈이 있는 사람이 내야지” “그 돈 다 뭐 할래. 이럴 때 써”라는 식으로 나오면 얘기가 달라진다. 자기는 낼 수 있는 10만 원을 내지 않으면서 “너는 68만 원을 내려고 했잖아. 빨리 68만 원 내”라고 한다면 이때는 절대 낼 수 없다. 앞에서 이야기한 친구들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다른 사람들도 부담하고 부자들도 부담해주기를 바란 건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은 부담을 안 하고 부자들만 부담하라고 했는지, 부자들이 돈을 더 냈으면 하고 부탁하는 식이었는지, 아니면 “부자면 돈을 더 내야 하잖아”라면서 당연한 일을 왜 하지 않느냐는 식으로 대했는지, 부자를 도와주는 고마운 존재로 생각했는지, 아니면 돈을 빼낼 호구로 생각했는지 말이다. 부자들은 자기는 돈을 안 내면서 부자에게는 “돈이 있는데 왜 안 내”라며 비판적으로 대하는 사람에게는 돈을 낼 생각이 없다. 비록 그게 이웃을 돕는 착한 돈이라 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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