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NOW]
차분하고 고요한 태도에 집중…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분위기 강조
무채색 바탕에 베이지-브라운 가미
내면까지 단정해야 진정한 드뮤어
Y2K가 휩쓸고 간 지난 몇 시즌은 미니멀리스트들에겐 꽤 지난한 해였다. Y2K라는 거대한 물줄기에서 탄생한 고프코어, 블록코어, 발레코어, 코케트코어 등 무수히 많은 트렌드들이 범람하며 피로도를 높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번 시즌엔 분위기가 반전될 것으로 전망된다. 바로 ‘조용한’, ‘얌전한’이라는 뜻을 가진 프랑스어 ‘Demeure’에서 파생된 드뮤어 트렌드가 요란한 패션계를 잠재울 구원투수처럼 등장했기 때문이다.
드뮤어 트렌드는 인기 틱토커 줄스 르브론의 영상에서부터 시작됐다. 그가 8월 틱톡에 게재한 ‘직장에서 얌전한 태도를 유지하는 방법’이란 제목의 38초짜리 영상이 수백만 조회수를 기록하며 많은 이들의 공감을 산 것. 르브론은 동료들을 배려한 자연스러운 출근 메이크업을 선보이며 차분하고 고요한 태도야말로 진정한 아름다움이 될 수 있음을 강조했다. 영상 속 자주 등장하는 ‘Very demure, very mindful(매우 얌전하고 매우 사려 깊은)’이란 표현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상에서 일종의 밈이 되어 패션·뷰티계로 번져 나갔다. 이에 대해 일각에서는 외적인 요소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세태에 지친 대중과 패션 피플들의 마음을 끌어당겼다는 분석을 내놓는다.
그렇다면 드뮤어 패션이란 정확히 무엇일까? 단어가 내포한 의미 그대로 차분하고 편안한 스타일을 뜻한다. 지난 시즌 Y2K에 대항하며 나타난 콰이어트 럭셔리, 올드머니 룩과 비슷한 개념이지만 차이점은 존재한다. 올드머니 룩이 우아함과 격식을 내세운다면 드뮤어 룩은 좀 더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강조한다. 영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에서 신문 기자로 등장하는 애니 역의 멕 라이언의 패션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화이트 셔츠와 미디 스커트에 맥 코트를 걸치고 시애틀 거리를 오가는 말끔한 오피스 룩부터 니트 스웨터와 팬츠에 캐시미어 삭스로 마무리한 이지웨어까지, 영화 내내 멋과 실용성을 내세운 ‘베리 드뮤어’한 옷차림을 선보인다.
드뮤어 스타일링의 핵심은 바로 컬러에 있다. 무채색 컬러를 기본으로 차분한 베이지나 브라운 컬러를 한 방울 떨어뜨리면 드뮤어한 분위기를 낼 수 있다. 편안함을 추구하는 만큼 너무 타이트한 핏은 피하고 장식적인 요소나 패턴, 액세서리는 최대한 절제해 단정하고 수수한 이미지를 강조한다.
사실 ‘틱톡발’이 아니더라도 드뮤어 트렌드는 이미 예견돼 있었다. 랄프로렌, 막스마라, 보테가베네타, 에르메스, 질샌더 등 일일이 나열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패션하우스에서 너도나도 점잖은 분위기의 드뮤어 룩을 선보이고 나섰으니까.
고전적인 우아함을 간직한 막스마라는 차분한 모노톤 룩을 선보이며 드뮤어 트렌드의 선봉에 섰다. 클래식의 대명사 랄프로렌은 따뜻한 베이지, 브라운 컬러로 컬렉션을 채웠고, 막스마라는 일자로 툭 떨어지는 미니멀한 실루엣의 오피스웨어를 쏟아내며 무드를 이어갔다. 미니멀리즘의 대가 질 샌더도 마찬가지. 포근한 니트 셋업에 간결한 재킷과 맥시 코트로 절제의 미학을 마음껏 드러냈다. 그런가 하면 보테가베네타와 제이슨 우는 셔츠, 슬랙스, 재킷이란 가장 베이식한 조합을 선보이며 시크한 무드를 이어갔다. 부드러운 터틀넥 톱으로 우아함을 격상시킨 에르메스의 모노 톤 슈트와 도회적인 컬러 팔레트 및 낙낙한 실루엣으로 드뮤어 트렌드를 이끈 카르벤의 피스들도 놓칠 수 없다.
사정이 이러하니 옷 잘 입기로 정평이 난 셀럽들 역시 일찌감치 단정한 무드로 분위기를 전환한 모양이다. 젠지들의 롤 모델로 통하는 카이아 거버는 카디건을 이너로 활용한 트렌치 코트 차림으로 가을 분위기를 물씬 풍겼고, 패션 스타일리스트이자 인플루언서로 활동하는 퍼닐 티스백은 시나몬 브라운 컬러 니트 카디건과 스커트로 그만의 개성 있는 드뮤어 스타일을 선보였다. 미니멀리즘을 대표하는 알렉사 청과 카미유 사리에의 일상적 스타일 역시 드뮤어 트렌드 열풍과 함께 재평가받고 있다.
드뮤어 트렌드는 명확한 공식을 규정하기 어렵다. 외면뿐만 아니라 내면까지 단정한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는 추상적 개념까지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옷이란 어떤 걸까? 지금껏 화려한 트렌드에 취해 자신을 과시하기에 바빴다면 이번 가을·겨울엔 힘을 빼고 한 템포 쉬어 가는 건 어떨까. ‘베리 드뮤어’하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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