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기업들이 쓰는 산업용 전기요금만 인상에 나선 건 한국전력의 재무구조를 개선하면서도 서민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한 조치로 풀이된다. 서비스업 둔화 및 소매판매 부진 등으로 어려움을 겪는 국민과 소상공인보다는 올해 역대 최대 수출 실적을 거두고 있는 대기업의 부담 여력이 많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소비자물가가 어느 정도 안정된 상황에서 가정용 전기요금을 또다시 동결한 것은 지나친 정치적 결정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한전의 천문학적 적자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가정과 소상공인들이 쓰는 전기요금도 내년에 인상이 불가피하다는 분석이 많다.
● 대·중견기업 연평균 1억 원 넘게 부담 증가
23일 산업통상자원부와 한전에 따르면 산업용 전기요금은 전기요금 조정이 본격화된 2022년부터 이날까지 총 7차례에 걸쳐 72.3%나 상승했다.
산업용 전기는 반도체, 철강 등 제조업 중심의 기업에서 주로 사용한다. 산업부는 이번 인상으로 계약전력 300kW 이상의 ‘산업용(을)’ 전기를 주로 사용하는 대기업과 중견기업의 경우 전기요금이 한 곳당 연평균 1억1000만 원 안팎 증가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20대 법인이 납부하는 전기요금은 이번 인상으로 1조2000억 원 이상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재계에서는 계속된 전기요금 인상이 산업과 기업의 경쟁력을 훼손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다. 대한상공회의소는 이날 논평을 내고 “녹록지 않은 경영환경에서 전기요금이 인상돼 기업 경쟁력에 미칠 영향을 우려한다”고 밝혔다.
이상호 한국경제인협회 경제산업본부장은 “대기업에 대한 차등 인상으로 국내 산업계의 경영활동이 더욱 위축되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말했다. 중소기업중앙회도 “정부의 산업용 전기요금 인상에 아쉬움을 표한다”고 했다.
● 정부 “가정용 인상은 내년 상황 봐야”
이번 가격 인상으로 한전의 부채가 충분히 해소되는 것도 아니다. 한전은 국제 에너지 가격이 급등하던 2021년부터 물가 안정 차원에서 원가 이하로 전기를 팔면서 재무구조가 급속도로 악화됐다. 2021년부터 올해 상반기(1∼6월)까지 쌓인 누적 적자(연결기준)만 41조 원, 총 부채도 203조 원에 달한다. 고강도 자구노력을 진행 중이지만 한계가 뚜렷하다. 김동철 한전 사장은 “본사 조직 축소 등은 이미 다 이행한 상태”라며 “자산 매각도 진행 중이지만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이번 인상으로 한전은 연간 4조6000억 원대의 추가 전기 판매 수익을 거둘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누적 적자 대비 약 11%에 불과한 규모라 재무구조의 근본적인 개선은 어렵다.
결국 요금 추가 인상은 불가피한 상황이다. 한전에 따르면 24일부터 오른 산업용 전기요금도 아직 판매 단가가 원가에 미치지 못한다. 가정에서 사용하는 주택용과 자영업자들이 쓰는 일반용도 팔수록 손해인 ‘역마진’ 구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박종배 건국대 전기전자공학부 교수는 “주택용 전력 사용량이 한국에서 15% 정도 되는데 이 부분의 전기요금을 계속 낮게 유지하면 한전의 재무구조에도 악영향이고 전기 절약도 불가능한 구조”라며 “추후 시점을 보다가 주택용과 일반용 전기요금 인상도 이어져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최남호 산업통상자원부 2차관은 내년 전기요금 인상 계획과 관련해 “내년 경제 상황을 봐야 한다”며 “지금 예단해서 논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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