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철도산업의 과제와 미래
후발주자 무분별하게 시장 진입… 중국산 부품 밀려들어와 피해 크고
납기 지연으로 노후 차량 연장 운행… 납품한 새 전동차도 고장-화재 빈발
“업체 능력 평가할 제도 정비 절실”
국내 주요 철도 운영 기관들이 채택한 전동차 입찰 제도가 철도산업 발전과 국민의 안전을 위협하는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는 지적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가격·기술 분리 동시 공개경쟁 입찰’ 방식이 사실상 최저가 구매로 이어져 국가 철도차량 도입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경고한다.
2018년 이후 기술 평가의 변별력이 완화되면서 후발 업체들의 무분별한 입찰 참여가 가능해짐에 따라 기술과는 별개로 우선 입찰을 하고 보자는 식으로 변질됐다. 이로 인해 최저가 수주 경쟁이 과열돼 국내 철도차량 부품업체들의 어려움이 가중되고 저가 중국 제품의 사용이 증가하는 등 경제와 산업뿐 아니라 사회적 문제까지 불거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계약 납품 지연이 연속적으로 발생하면서 불가피하게 노후 철도차량이 계속 운행됨에 따라 사고 위험이 증가했다. 또 계약 이행 가능성과 진도를 고려하지 않은 과도한 선금의 지급, 저품질로 인해 영업 운행 도중의 잦은 고장과 유지보수 비용 등 불필요한 추가 비용 역시 증가했다.
철도차량 입찰 제도의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발주기관들은 여전히 최저가 입찰제를 고수하고 있어 논란이 되고 있다. 이는 철도산업의 기술 발전과 혁신을 저해한다는 우려를 낳고 있다.
납기 지연에도 배짱 영업… 발주기관의 역할 절실
기술력 평가가 사실상 유명무실해지면서 기술력 검증 실패로 최근 계약한 전동차들이 막대한 선금 지급에도 불구하고 연쇄적인 납기 지연이 계속되고 있다. 입찰에 선정된 제작업체는 납기 지연 시 지체상금(계약 제재 수단)을 부과받아 발주기관에 납부해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오래 납기를 지연하더라도 지체상금은 계약 금액의 최대 30% 이상 부과할 수 없다.
따라서 저가 수주로 입찰을 따낸 전동차 제작업체는 계약 금액의 최대 60% 선금을 받지만 제때 납품하지 못해도 지체상금은 최대 30%만 부과받는다. 제작업체 입장에서는 전동차의 계약 이행을 서두를 유인 조건이 없어 납품에 전력을 다하지 않는다는 문제가 끊임없이 제기된다. 당장 전동차를 제작해 납품하더라도 실제로 받을 잔금은 계약 금액의 10%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발주기관은 전동차 입찰 때마다 납기를 지연하는 업체에 계약을 몰아줘 국민의 안전과 국가 경제에 큰 손실을 초래하고 있다. 한 전문가는 “발주기관들이 계약 이행을 제대로 안 하는 업체와 계속 계약을 체결하는 것은 매우 우려스러운 일”이라고 지적했다.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김은혜 의원(국민의힘)은 최근 국정감사에서 이 문제를 제기했다. 현재 철도공사가 보유한 무궁화호는 총 409칸이다. 이 중 88%인 358칸이 대체 차량 ITX-마음(EMU-150)으로 A 업체에 발주했지만 72%에 해당하는 258칸을 납품받지 못하고 있다. 이 계약은 2018년 150칸 계약(납기 2021년 12월), 2019년 208칸 계약(납기 2022년 11월)이다. 현재 A 업체는 2018년 계약분 150칸 중 100칸만 납품한 상태다. 납기를 지키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철도공사는 지난 4월 납기를 지연한 A 업체와 동일한 EMU-150 전동차 116량, 2400억 원을 새로 계약했다. 이로 인해 수명을 초과한 노후 무궁화호 차량을 계속 운행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김 의원은 이에 대해 “철도공사는 납품 지연으로 인해 사용 연한 25년을 넘긴 무궁화호 222칸을 5년 연장해 운영하고 있다”며 “노후화된 무궁화호 222칸의 정밀 안전진단 시행 전 부품 교체는 5년간 36건에 불과했지만 안전진단 시행 이후 4년 동안은 65건으로 약 1.8배 증가했고 비용 역시 5년간 14억 원에서 진단 시행 이후 4년간 42억 원으로 3배 급증했다”고 지적했다. 신차 도입의 지연으로 폐차해야 할 무궁화호가 운영되면서 추가적인 국민 세금이 투입됨은 물론이고 사고의 위험도 높아져 이용하는 국민의 안전까지 위협한다는 것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납품된 새 전동차에서도 잦은 고장과 화재 사고가 발생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3월에는 전국철도노동조합이 안전한 차량으로의 교체를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국토교통부는 철도안전법 등 관계 법령에 따라 철도차량의 안전성을 확인하고 관리·감독할 책임이 있으나 현재 상황에 대해 침묵하고 있어 비판을 받고 있다.
한 철도차량 전문가는 “수요 기관의 최저가 구매 행태는 우리나라 철도차량 산업의 미래를 위협하는 요인”이라며 “기술개발과 신기술을 기반으로 해외시장 진출을 통해 산업 발전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 나가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실이용자인 국민 역시 그릇된 입찰 제도로 심각한 불편을 겪게 되면서 제도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점차 거세지고 있다. 더 이상 현행 최저가 입찰 제도를 방치해서는 안 되며 철도차량 구매 제도의 근본적인 개선을 통해 안전하고 효율적인 철도 운영이 이뤄져야 한다는 지적이 힘을 얻고 있다.
그런데도 발주기관들은 철저하게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작년부터 철도차량 구매 입찰 제도를 개선하겠다고 공언한 철도공사를 비롯한 지방자치단체의 발주기관들은 올해도 여전히 최저가 입찰제로 철도차량을 발주하고 있다. 결국 지금까지 납기를 지키지 못하고 있는 A, B 업체는 별다른 제한 없이 최저가로 또다시 국내 전동차 계약에 성공했다.
철도 전문가들은 현행 법체계 내에서도 ‘협상에 의한 계약’ 등 다양한 대안이 가능하지만 발주기관들이 최저가 입찰제만 고수해 기술 발전과 혁신을 저해한다고 지적한다. 한 철도차량 전문가는 최저가 입찰 제도가 철도차량 구매 입찰 제도 중에서 가장 손쉬운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최저가 입찰 구매 제도는 수요 기관이 대규모 철도차량 구매 비용에 대한 부담감으로 전동차 도입부터 폐차에 이르는 총 수명주기비용을 고려하지 않고 당장 손쉽게 값싼 제품을 구매하려는 의도에 적합하다. 또 평가 과정에서 발생하는 번거로운 민원을 피하는 데 가장 부합하기 때문에 이 제도를 고집하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이 전문가는 또 “수요 기관의 최저가 구매 행태는 제작자의 기술개발과 혁신에 대한 의지를 떨어뜨리고 해외의 질 낮고 값싼 부품에 의존하게 만들어 우리나라의 철도차량 산업을 후퇴시키고 결국에는 산업 자체를 말살시키는 아주 위험한 요인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우리나라 철도산업은 국토의 제한으로 양적 성장의 한계가 분명하다. 철도산업 관계자들은 기술개발과 혁신을 통해 해외시장 진출을 확장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현행 최저가 입찰 제도는 이러한 발전 가능성을 저해한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철도산업의 지속적인 발전과 안전한 철도 서비스를 위해 합리적이고 발전적인 입찰 제도의 도입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최저가 계약 업체 기술 부족 문제 심각… 안전 우려
전문가들은 최저가로 전동차를 공급하는 업체들의 기술 부족 문제를 지적한다. 빠르게 변화하는 기술 발전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구매 입찰 단계에서 발주기관이 원하는 품질의 철도차량이 적절한 시기에 공급될 수 있도록 기술 역량과 계약 이행 능력을 공정하게 판단하는 세밀한 평가가 중요하다. 하지만 변별력이 없는 현행의 기술평가는 완성도와 품질이 떨어지는 전동차를 납기가 지난 후에 납품되는 문제를 발생시킨다는 것이다. 여기에 노후 전동차가 계속 운행되는 문제도 어려움을 한층 가중시킨다.
올해 3월 영업 운행 도중에 철도차량 화재 사고와 고장이 하루에도 몇 차례씩 봇물 터지듯 발생했다. 급기야 3월 15일 철도공사의 노동조합인 ‘전국철도노동조합’에서는 사고와 고장이 잦아 불안하며 안심하고 영업 운행을 할 수 없으니 안전한 차량으로 다시 구매해 달라고 코레일 경영진에게 요구하는 성명서를 내는 일까지 벌어졌다.
노조가 밝힌 자료에 따르면 B 업체에서 막 납품해 영업에 투입한 전동차에서 3월 9일부터 14일 사이 총 17건의 화재 사고와 고장이 있었다. 고장과 사고로 사용자인 국민의 안전이 심각한 위협을 받고 불안감이 폭증하는 가운데에도 발주기관인 코레일과 서울교통공사는 이를 근본적으로 개선하기 위해 노력을 하지 않고 있다는 비판이 내부에서 나온 것이다. 발주기관은 6개월 이상이 지난 지금도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한 채 비정상적인 운행을 계속하고 있다.
철도의 안전한 운행을 보장하기 위해 특별법으로 제정된 철도안전법에 따르면 전동차의 고장과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국내에 투입되는 모든 철도차량은 계약과 동시에 납품이 완료될 때까지 국토교통부가 철도차량의 형식시험을 포함한 각종 시험과 검사를 통해 계약한 철도차량의 안전성을 완전히 확인하고 난 이후에 영업 운행에 투입할 관리·감독의 임무를 가지고 있다.
더욱이 영업 운행 중 화재와 같은 중대 사고의 경우에는 이를 철저히 조사해 원인을 규명하고 책임자를 처벌할 수 있는 권한 역시 가지고 있다. 현재 문제 상황이 누적되는 만큼 정부 차원의 대책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발주기관에 문제 해결과 개선의 모든 책임이 맡겨져 있지만 문제가 심각해진 이상 철도의 관리와 감독을 책임지는 국토교통부의 개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빗발치는 개선 요구… 변화는 언제
새로 도입한 전동차에서 발생하고 있는 문제는 서울교통공사라고 다르지 않다. 지난해 12월 수서차량사업소에서 발생한 347편성 차량의 분전반 화재가 문제가 됐다. 신정차량사업소에는 2호선 전동차 2006편성이 객실 바닥 불량으로 해체한 상태로 3개월째 방치되는 등 신규 전동차 납품 문제를 안고 있다. 최저가 낙찰제로 문제가 된 주요 업체들이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A, B 제작사는 자신들이 납품을 지연해 부과받은 지체상금이 부당하니 돌려받아야 한다고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계약자의 의무인 전동차 사고와 고장에 대한 철저한 원인 조사와 조치에 미흡하다는 비판을 받는 가운데 자신들의 계약 제재는 과하다는 소송을 벌이는 상황이다. 한 철도업계 관계자는 “A, B 제작업체는 생산 능력을 초과해 수백 칸의 전동차 계약 물량에 대한 납기를 지키지 못하면서도 새로운 입찰에서 아무런 제한 없이 최저가 수주를 계속하고 있다”고 전했다.
올해 철도차량 구매 입찰은 국민의 요구와는 다르게 아무런 제도의 변화 없이 진행됐다. 철도공사의 전동차 구매는 최저가 입찰로 계약자 선정이 마무리됐고 부산교통공사의 2호선 전동차 168칸이 12월 3일 입찰 마감 예정이다. 서울교통공사의 전동차 220칸은 12월 16일 입찰 마감 예정으로 입찰 절차가 진행되고 있다.
그동안 발주된 전동차가 제때 납품되지 못해 혼란을 겪으면서 서울교통공사는 더욱 큰 고민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미 지난해 구매 입찰 과정에서 기술평가 기준을 개선해 업체들의 실질적인 계약 이행 능력을 평가하려고 했던 서울교통공사는 제작업체와 주변의 반대로 이전보다 후퇴한 기술평가로 또다시 A, B 업체에 발주했던 경험이 있다. 입찰이 거듭될수록 생산 용량을 초과한 계약 물량을 가지고 있는 A, B 업체가 계속해서 최저가로 입찰에 선정됐다. 가뜩이나 심각한 노후 전동차 교체가 지연되고 있어 서울시의 전동차 교체 계획은 당초보다 10년 가까이 늦어질 전망이다. 현재로서는 새로운 전동차 투입 시기가 불분명할뿐더러 언제쯤 국민이 안심하고 이용할 수 있을지 예측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최저가 구매 입찰 관행으로 말미암아 서울시는 또 다른 추가 비용과 지연을 감수하게 됐다고 꼬집는 목소리도 있다.
서울교통공사가 지금의 최저가 입찰 제도를 선택하더라도 엄격하고 공정한 기준을 통해 업체의 잔여 수주량을 파악하고 원하는 시기에 납품이 가능한지를 살펴보는 최소한의 평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진다.
나아가 제작사들의 부족한 기술력을 보완하기 위해서는 이들의 기술력에만 의존하지 말고 생산과 납품이 가능한 업체를 제대로 발굴하는 기술평가 제도의 정비가 절실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 전문가는 “현재의 기술평가는 입찰에 참여한 업체의 제조 및 납품 능력을 제대로 평가하기에는 너무 미흡하고 단편적”이라며 “건전한 시장경쟁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지금까지 겪은 문제를 탈피하기 위해서는 제도적 모순을 제거하는 과감한 방법도 생각해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국내외의 충분한 기술을 가진 업체와 제조 능력은 있지만 기술력이 부족한 업체가 서로의 능력을 융합 또는 결합해 자유롭게 입찰에 참여하도록 허용하는 방안도 단기적으로 고민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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