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모임에서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가 “돈이 더 많으면 더 행복해지는가”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행복해진다, 꼭 그렇진 않다 등등 의견들이 나왔는데, 한 명이 “그런 건 경제학 전공한 사람이 잘 알겠지”라면서 나를 지목했다. 의견이 많으니 나 보고 결론을 내달라는 것이었다. 이 대화처럼 경제학에서는 돈과 행복의 관계에 대해 많이 얘기한다. 그리고 나는 아주 자세히는 아니지만, 비전공자에게 맛보기로 소개할 만큼은 알고 있다. 이 주제로 이전에 칼럼을 쓴 적도 몇 번 있다. 일단 가장 유명한 건 ‘이스털린 패러독스(Easterlin paradox)’다. 1974년 리처드 이스털린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교수가 발표한 내용이다. 소득이 적을 때는 소득이 늘어날수록 행복이 증가하지만, 소득이 일정 수준 이상에 이르면 행복이 거의 증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국가 또한 GDP(국내총생산)가 낮은 가난한 나라에서는 GDP가 늘어날수록 국민 행복도가 증가한다. 그런데 GDP가 어느 수준 이상이 되면 국민 행복도가 잘 증가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소득은 어느 정도 수준까지는 사람의 행복도를 끌어올린다. 하지만 일정 수준 이상이 되면 행복도가 더는 늘어나지 않는다. 이때부터는 행복해지기 위해 돈 이외에 다른 요소들이 필요하다.
사실 돈아 많아지면 행복도 증가
이스털린 패러독스에서 얘기하는 행복도가 더는 늘어나지 않고 정체되는 소득 구간은 연 1만5000달러(약 2000만 원) 수준이다. 1970년대 물가 수준에서는 이 정도면 어느 정도 살 수 있었겠지만, 현 물가 수준에서는 어림도 없다. 그럼 현재는 어느 정도 소득이면 행복도가 더는 늘어나지 않을까. 현대 연구 가운데 유명한 것은 2002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대니얼 카너먼 교수와 2015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앵거스 디턴 교수가 공저로 발표한 2010년 논문이다. 여기에서는 그 기준점을 연소득 7만5000달러(약 1억 원)로 제시했다. 그 기준점까지는 소득이 늘면 행복도가 증가했지만, 소득이 그 기준점을 넘으면 행복도가 잘 증가하지 않았다. 이 또한 2010년 기준이라서 현재는 이것보다 기준액이 좀 더 높아졌다고 봐야 한다. 코로나19 사태로 물가가 크게 올랐으니, 지금은 연봉 1억5000만~2억 원 정도로 보면 되지 않을까. 그래서 모임에서 해당 논의를 마무리했다. 연봉 2억 원까지는 계속 행복도가 증가한다. 하지만 그 이상이면 돈이 많아도 행복도가 늘어나지 않는다. 모임에 참석한 사람 대부분이 이에 수긍하면서 이 주제가 마무리됐다. 그런데 그중 한 명이 지나가는 말로 이런 말을 던졌다. “현금 50억 원이 넘으면 또 달라져.” 충격을 받았다. 순간적으로 머리가 멍해졌다. 이 사람의 말이 앞뒤가 안 맞는 엉터리라서? 현대 석학들의 연구 결과와 다른 무식한 말이라서? 아니다. 이 말이 맞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이스털린이나 카너먼, 또 다른 유명한 학자들은 처음에는 돈이 증가하면 행복도 증가하지만, 어느 수준이 넘어서면 돈은 행복과 별 관계가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는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행복해진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누구 말이 맞을까. 나는 대학교수를 지낸 학자였다. 그래서 유명 학자들의 말을 받아들여 왔고, 제대로 된 연구 결과들을 신빙성 있는 것으로 얘기했다. 그런데 “현금 50억 원이 넘으면 또 달라진다”는 말을 들은 순간, 그게 맞다는 걸 인정하게 됐다. 돈이 어느 수준 이상 늘어났다고 해서 행복도가 증가하지 않는 게 아니다. 돈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행복도도 증가한다. 내 경험으로도 이게 사실이다. 집에 돌아와 카너먼과 디턴의 행복도 연구 논문 원본을 찾아봤다. 그동안 이 논문의 주요 결론인 7만5000달러를 기점으로 행복도가 더는 증가하지 않는다는 얘기는 많이 들었어도 직접 논문을 읽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이번에 논문을 찾아 직접 읽었다.
돈 많을수록 높아지는 자유도
이 연구에서는 미국인 45만 명의 자료를 이용해 소득과 행복도의 관계를 살펴봤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행복도를 둘로 구분했다. 자신의 인생에 대한 평가 및 인생 전체에 대한 만족도와 그날그날 느끼는 행복감이다. 사람의 행복도는 지금 당장 기분이 좋으냐, 나쁘냐도 중요하지만, 그것과 관계없이 자기 인생에 대해 느끼는 만족도도 큰 영향을 미친다. 카너먼과 디턴은 소득이 이 두 가지에 각각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조사했다. 소득이 늘어나도 행복도가 증가하지 않는다는 얘기는 그날그날 느끼는 행복감에 대한 것이었다. 즉 전화 등으로 조사하면서 “지금 어떤 감정을 느끼는가” “기분이 좋은가” “스트레스는 어떤가” 등을 물어본 것이다. 이런 그날그날 느끼는 행복감은 연소득 7만5000달러가 넘어가면 거의 증가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기 인생에 대한 평가 부분에서는 결과가 조금 달랐다. 자기 인생에 대한 평가, 자기 인생 전체에 대한 만족도는 소득이 늘수록 계속 증가했다. 연소득 16만 달러(약 2억2000만 원)가 넘어도 인생 전체에 대한 만족도는 이전과 별 차이 없이 계속 증가한 것이다. 이 부분에서는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행복해지는 것이 맞았다.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해서 돈이 쌓이는 모습을 보며 행복해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보기에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행복해지는 이유는 돈이 많을수록 자유도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으면 식당에서 메뉴 가격에 영향을 받으면서 뭘 먹을지 결정해야 한다. 식당에서 먹을 수 있는 메뉴가 있고, 먹으면 곤란한 메뉴가 있다. 어느 정도 돈이 있으면 메뉴를 선택할 때 가격을 안 보고 고를 수 있다. 가격 제약을 받으며 행동할 때보다 이런 제약 없이 행동할 때 만족도가 더 크다. 돈이 좀 더 있으면 해외여행을 갈 때도 자유도가 높아진다. 저렴한 해외여행 상품을 선택하느냐, 아니면 그런 제약 없이 그냥 가고 싶은 곳을 가느냐의 자유도다. 더 나아가 비행기 이코노미를 타느냐, 비즈니스를 타느냐 등의 제약도 풀릴 수 있다. 돈이 많으면 어디서 사느냐에 대한 제약도 해결된다. 자기가 살고 싶은 동네에서 사느냐, 아니면 예산에 맞는 곳에서 사느냐의 제약이다. 일을 해야 살 수 있는지, 일을 안 해도 살 수 있는지도 있다. 일을 안 해도 충분히 먹고살 수 있다면 인생 선택지가 넓어진다. 같은 것을 하더라도 “이것밖에 할 수 없다”와 “다 할 수 있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을 한다”는 분명 다르다. 인생 선택지가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분명 인생에 대한 만족도도 증가한다. 그리고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인생 선택지가 넓어진다. 그런 점에서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삶에 대한 만족도는 증가한다고 본다.
인생 만족도에 큰 영향 미치는 돈
모임에 참석한 그 사람은 “현금 50억 원이 넘으면 달라진다”고 말했다. 현금 50억 원이 있으면 자기가 사는 곳을 어디든 선택할 수 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사업을 뭐든지 시도할 수 있다. 이 전보다 선택지가 넓어지고 자유도도 크게 증가한다. 또 미래 경제 사정에 대한 불안감도 크게 감소한다. 이 전보다는 한 단계 올랐다는 느낌이 들 테고, 그러니 그만큼 행복도도 증가한다. 이스털린 패러독스는 돈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얘기한다. 어느 정도까지는 중요하지만, 사람들이 생각하는 바처럼 큰돈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행복해지려면 돈 말고 건강, 인간관계, 종교 등 여러 다른 요소가 더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카너먼과 디턴의 연구도 연소득 7만5000달러까지는 행복도가 증가하지만 그 이상의 돈은 행복도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그날그날의 감정에 대한 것이다. 자기 인생에 대한 만족도, 자기 인생에 대한 평가 부분에서는 아니다. 이 부분은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행복해진다. 그럼 진정한 행복을 위해서는 어느 게 더 중요할까. 자기 인생 전반에 대한 만족도일까, 아니면 그날그날의 기분일까. 그날그날의 기분이 더 중요하다면 돈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인생 전반에 대한 만족도가 더 중요하다면 돈은 행복도에 큰 영향을 미친다. 행복의 어느 부분을 중요시하느냐에 따라 각자가 다른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이다.
최성락 박사는… 서울대 국제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행정대학원에서 행정학 박사학위, 서울과학종합대학원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동양미래대에서 경영학과 교수로 재직하다가 2021년 투자로 50억 원 자산을 만든 뒤 퇴직해 파이어족으로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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