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한 마음 덜어주는 돈의 속성

  • 주간동아
  • 입력 2024년 11월 17일 09시 08분


[돈의 심리] 보육센터에서 부모 지각에 벌금 물리자 지각 비율 더 높아져

중국 춘추전국 시대 제나라 왕과 노나라 왕이 협상을 하게 됐다. 그동안 제나라는 노나라에 여러 번 시비를 걸고 영토를 빼앗았는데, 그 일을 사과하고 노나라와 관계를 제대로 돌리려 했다. 제나라 왕이 노나라 왕에게 지난 일을 사과할 때 옆에서 제나라 재상 안영이 “소인은 말로 사과하고 군자는 물건으로 사과한다”고 말했다. 진정으로 사과하려면 말로만 미안하다 하지 말고 물건, 즉 예물로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말을 받아들여 제나라 왕은 원래 노나라 땅이었던 지역들을 노나라 왕에게 돌려줬다. 안영은 후세에 안자로 불리며 춘추시대 현인으로 추앙받는 사람이 됐다.

꼭 안자의 말이 아니더라도 말로만 하는 사과는 한계가 있다. 물론 상대방 기분을 나쁘게만 하는 피해, 정신적 피해만 있는 경우에는 말로만 사과해도 될 때가 많다. 하지만 상대방에게 물질적 피해, 재산상 피해까지 준 경우에는 대부분 말로만 사과해서는 안 통한다. 상대방이 사과할 때 자주 하는 얘기가 “말로만 미안하다고 하면 다냐”다. 이는 말로만 하는 사과로는 안 되고, 돈이나 재산상 가치가 있는 물건으로 사과할 필요가 있다는 뜻을 반영한다.

돈을 지불하면 상대방에게 미안한 감정이 줄어든다. [GETTYIMAGES]
돈을 지불하면 상대방에게 미안한 감정이 줄어든다. [GETTYIMAGES]
이스라엘 보육센터 대상 벌금 연구

그럼 돈으로, 물건으로 미안한 마음을 표시하면 그 후 미안한 마음은 어떻게 될까. 그 후에도 계속해서 미안한 마음을 가질까, 아니면 “이제는 됐다”며 미안한 마음이 사라질까. 돈이 미안한 감정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유명한 연구가 있다. 이스라엘 행동경제학자 유리 그니지와 네덜란드 틸벅대의 알도 루스티치니 교수가 2000년 공동 발표한 연구다. 연구 제목은 ‘A Fine is a Price(벌금은 대가다)’로, 원래는 금전적 벌금이 사람들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관한 내용이었다. 이후 돈이 사람들의 도덕적 감정이나 미안한 감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시사점을 주는 연구로 더 유명해졌다.

연구 대상은 이스라엘 아이들을 낮 동안 보살피는 보육센터였다. 부모는 아침에 아이들을 보육센터에 맡기고, 오후 4시에 데려가야 한다. 그런데 부모가 오후에 늦는 경우가 있다. 미국에서는 이렇게 부모가 늦으면 벌금 등을 부과하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따로 부모에게 벌금을 부과하지 않았다. 연구자들은 부모가 정해진 시간보다 늦게 왔을 때 벌금을 부과하면 어떤 효과가 발생하는지를 조사했다. 원래 4시까지 아이를 데리러 와야 하는데, 10분 이상 늦으면 벌금으로 10셰켈을 부과했다. 이 연구를 진행할 당시 1달러가 3.68셰켈이었으니, 10셰켈은 2.7달러 정도였다. 현재 한국 돈으로 약 4000원이다.

이 실험은 이스라엘 하이파에 있는 보육센터 10곳을 대상으로 진행됐다. 각 보육센터는 평균 33.7명 아이가 있었고, 따라서 총 대상은 337명이었다. 처음 4주 동안은 실제로 늦게 오는 부모가 몇 명인지만 관찰하고 기록했다. 조사 결과 보육센터당 1주일 평균 8.8명의 지각 부모가 있었다. 일주일에 5일을 아이를 맡겼으니 하루 평균 1.76명의 부모가 지각을 한 셈이다. 33.7명 가운데 1.76명의 부모가 늦게 와 부모가 지각할 확률은 5%였다. 대다수 부모는 지각하지 않고 제시간에 와 아이를 데려갔다.

실험 5주 차부터 부모가 늦게 왔을 때 벌금을 매기기 시작했다. 4개 보육센터는 지금까지 그대로 벌금을 매기지 않았고, 6개 보육센터에서만 벌금 10셰켈을 부과했다. 이렇게 일부는 벌금을 매기고 또 다른 일부는 벌금을 매기지 않으면, 기타 사회경제적 환경에 의한 효과를 배제한 채 벌금 효과만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부모 지각 확률 5→10%로 증가

처음에 연구진이 예상했던 결과는 벌금을 매기면 부모가 지각을 덜 하지 않을까였다. “벌금이 없으면 부모가 늦게 오는 경우가 많지만, 벌금을 부과하면 부모가 지각하지 않을 것”이라는 게 이 연구가 원래 목적으로 했던 결과다. 그런데 실제 벌금을 매기기 시작하니 예상과 다른 결과가 나오기 시작했다. 벌금을 부과하자 오히려 늦게 오는 부모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벌금을 부과한 6개 보육센터 중 한두 곳에서만 그런 게 아니었다. 6개 보육센터 모두 늦게 오는 부모가 증가했다. 이전에는 부모가 지각할 확률이 5%였다. 그런데 이 확률이 10%로 늘었다. 늦게 오는 부모가 전보다 2배나 증가한 것이다.

갑자기 불황이 닥쳐 부모가 더 많이 일해야 해서는 아니었다. 벌금을 부과하지 않은 4개 보육센터는 그 전과 별 차이가 없었다. 그렇다면 부모가 늦게 오는 이유는 분명했다. 벌금을 부과했기 때문이다. 예상외 결과에 연구진은 벌금이 부과되는데도 더 많이 늦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연구진이 내놓은 대답은 3개다. 첫째, 지각했을 때 어떤 벌칙이 있는지 이제 분명히 알게 됐다는 점이다. 전에는 지각하면 안 된다고 했을 뿐이라서 지각했을 때 어떤 결과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지각하면 보육센터가 아이를 그냥 방치하지 않을까. 교사가 아이를 내버려두고 퇴근해버리지는 않을까. 이런 두려움이 있어서 절대 지각하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벌금을 부과하니 이제 분명히 알게 됐다. 지각하더라도 벌금만 내면 된다. 이게 지각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다. 지각했을 때 생길 수 있는 가장 나쁜 결과가 벌금이라면 좀 늦어도 되지 않을까.

둘째, 벌금을 부과했을 때 부모는 보육센터가 굉장히 친절하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이전에는 보육센터가 굉장히 엄격한 곳이라서 부모가 지각을 많이 하면 보육센터에서 아이를 더는 맡지 않겠다고 할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보육센터에서 쫓겨날 가능성이 있다면 절대 지각을 해선 안 된다. 하지만 벌금만 내면 된다고 하니 자신이 예상했던 것보다 친절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엄격한 곳이라면 지각을 해선 안 되지만, 친절한 곳이라면 지각을 좀 해도 괜찮다.

셋째, 도덕규범이 변경됐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지각하면 안 된다, 교사를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된다는 사회적 규범이 작용했다. 그런데 벌금 부과가 이런 사회적 규범을 변경했다. 이전에는 교사가 주어진 시간 이후에 아이를 돌보는 건 희생이었다. 내가 좀 편하자고 교사를 희생하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지만 벌금을 내면 이제 주어진 시간 이후에 아이를 돌보는 일은 희생이 아니라 대가를 받고 하는 서비스, 상품이 된다. 서비스, 상품이라면 돈을 더 내고 이용하는 게 아무런 문제가 아니지 않나.

이 실험에서 재미있는 사실은 벌금 부과를 멈춘 후에도 부모들의 지각은 계속됐다는 점이다. 이 실험에서는 5~16주 차까지 벌금을 매기고, 17주 차부터는 벌금을 부과하지 않는 이전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벌금을 부과하지 않는다고 해서 부모들의 지각 빈도가 이전으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조금 늦어도 되는구나”라는 생각이 계속 이어진 것이다. 상품, 서비스라고 한번 인식된 것은 이후에 돈을 받지 않아도 여전히 상품, 서비스로 생각된다. 과거 도덕규범이 다시 돌아오지는 않는다.

벌금으로 대가 지불했다고 생각해

벌금을 부과할 때 부모들이 지각을 더 많이 하는 이 3가지 이유 중 어느 게 더 타당할지에 대해서는 논의가 있을 수 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돈을 지불하면 상대방에게 미안한 감정이 줄어든다는 점이다. “교사가 화나지 않았을까” “교사에게 부당한 부담을 지우는 게 아닐까” “교사를 희생하게 하는 게 아닐까” 같은 감정이 드는데, 돈을 지불하면 이런 미안한 감정이 확 줄어든다. 돈은 상대방에게 그만한 대가를 지불했다고 느끼게 하면서 자신의 미안한 마음을 희석하는 역할을 한다.

이는 나쁜 것일까. 나쁘지 않다고 본다. 혹자는 돈보다는 미안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편이 더 좋지 않느냐고 얘기할 수도 있다. 그런데 미안하다고 말로 표현하는 게 정말 미안한 감정을 가지고 있어서일까. 그런 경우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그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립서비스일 뿐이다. 그런 립서비스보다는 돈이나 물질이 더 낫지 않나. 그래서 “소인은 말로 사과하고 군자는 물건으로 사과한다”는 말이 나온 것이다. 결론적으로 돈은 미안한 감정을 희석한다. 돈을 주고 죄책감을 없애는 것이다. 좋든 나쁘든 돈이 주는 또 하나의 효과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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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주간동아 1465호에 실렸습니다〉

최성락 경영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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