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만 해도 노스볼트는 순항 중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2021년 말 첫 번째 배터리셀 생산으로 유럽을 설레게 만들었던 이 기업은 스웨덴 기가팩토리 규모를 4배로 확장하기 위한 공사에 한창이었죠. 독일과 캐나다에서도 새 배터리셀 공장 건설에 들어갔습니다. EU와 독일 정부로부터 10억 유로, 캐나다와 퀘벡주 정부에선 20억 달러를 지원받기로 했죠.
조만간 IPO(기업공개)에 나설 거란 소식도 있었습니다. 시장에선 기업가치가 200억 달러(약 28조원)에 달할 거라고 기대했죠. 폭스바겐·골드만삭스·BMW와 스웨덴 연기금을 대주주로 둔 이 배터리 제조 기업은 유럽에서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았습니다. 받아놓은 주문량만 550억 달러어치(약 77조원)에 달할 정도였죠. 앞날이 창창한 ‘될성부른 떡잎’으로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몇 달 전, 분위기가 급변합니다. ‘순수 유럽 혈통’ 배터리 업체라는 허울에 가려졌던 적나라한 실체가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축구장 70대 크기라는 스웨덴 셸레프테오 공장의 배터리셀 생산량이 터무니없이 적었습니다. 연간 예상 생산량이 16GWh(기가와트시)인 공장이 지난해 실제 공급한 배터리셀은 80MWh(메가와트시). 고작 200분의 1에 그쳤죠. 그만큼 생산라인이 엉망이고 수율(정상제품 비율)이 형편없단 뜻입니다. 주문은 넘쳤지만, 고객사는 언제 배터리를 받을지 기약이 없었죠.
주요주주인 BMW가 가장 먼저 손절에 나섰습니다. “인내심을 잃었다”며 6월 노스볼트와 맺었던 20억 달러 규모의 배터리셀 공급 계약을 해지하고, 삼성SDI로 갈아탔죠.
7월 공개된 2023년 노스볼트의 연간 적자는 12억 달러. 전년의 4배로 불어났습니다. 여기저기 벌여놓은 공사는 산더미인데, 배터리셀을 제대로 만들어내질 못하니 현금이 빠르게 고갈됐습니다. ‘죽음의 골짜기’가 노스볼트에 닥친 건데요. 8월엔 미국 캘리포니아의 연구개발 자회사를 폐쇄했고, 이어 스웨덴의 양극재 생산시설을 닫습니다. 이러다 직원 월급도 내기 어렵겠다는 말이 나오던 9월엔 스웨덴 직원 4분의 1인 1600명 해고를 발표했죠. 스웨덴 공장 확장 공사는 중단됐고, 공사를 맡았던 건설 자회사는 파산 신청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11월. 현금이 바닥난 노스볼트는 이제 생존이 위태로울 지경입니다. 스웨덴 정부가 나설 거란 기대도 꺾였죠. 이 나라 재무부 장관은 15일 “노스볼트를 정부가 소유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잘라 말합니다. 현지 언론은 노스볼트가 미국에서 챕터11 파산보호를 신청하는 것을 검토 중이라고 전합니다. 정말 며칠 남지 않았다, 이번 주가 고비란 보도도 이어집니다. 유럽 전기차 산업에서 희망의 등불로 통했던 노스볼트 불꽃이 이대로 사그라지는 걸까요.
중국 기업에 사기 당한 스웨덴?
“광범위한 산업적 ‘기후 역풍’에 대응해야 합니다.”
지난 9월, 노스볼트 CEO 피터 칼슨은 대규모 정리해고를 발표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회사가 어려워진 이유를 전 세계적인 전기차 수요 둔화로 돌린 거죠.
그런데 냉정히 따져보면 그건 핑계일 뿐입니다. 노스볼트 위기는 주문이 줄어서가 아니라, 배터리 생산을 빨리 늘리지 못했기 때문이니까요. 도대체 왜 첫 번째 셀을 생산한 지 3년이 다 되도록 여태껏 생산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는지가 핵심입니다.
노스볼트가 매일 뉴스 헤드라인에 오르는 스웨덴에선 이와 관련해 특히 관심을 끄는 주장이 있습니다. 바로 이게 다 노스볼트 1공장의 장비 공급을 맡은 중국 기업 ‘우시리드(Wuxi Lead)’ 때문이라는 주장입니다.
지난 9월 이런 주장을 처음 펼친 건 스웨덴의 작가이자 유명 블로거인 라스 윌더란그입니다. 그는 자신이 받은 제보라며 이렇게 공개했죠.
“노스볼트는 중국 우시리드로부터 배터리 제조 장비를 구입했지만, 배송된 문서는 일부 지워져 있었습니다. 스웨덴 현장에서 장비를 사용하려면 우시리드의 중국 작업자가 있어야만 했습니다. (장비에 대한) 지식 전달이 부적절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주장을 덧붙입니다. “우시리드는 처음부터 사업을 방해했습니다. 그 의도는 노스볼트를 파산시켜 중국 기업이 이를 매입하게 하는 것으로 의심됩니다.” 즉 “순진한 스웨덴인”이 중국 기업에 일종의 사기를 당했다는 음모론이었습니다.
물론 그의 글 어디에도 구체적인 증거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게 다 공산당과 손잡은 중국 기업의 유럽 시장 장악을 위한 음모’라는 해석은 꽤 설득력이 있었나봅니다. 스웨덴 언론도 이 주장을 받아 확대 재생산했죠. 스웨덴 경제잡지 아파르스발든(affarsvarlden)은 전현직 노스볼트 직원을 인용해, 우시리드가 초래한 현장 혼란을 자세히 전합니다.
“기계 작동용 메뉴는 중국어였어요. 우린 기계 작동법을 이해하려고 구글 번역을 사용해야 했죠. 현장엔 중국인 근로자가 수백명이었는데, 영어를 한마디도 모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거의 모든 기계가 중국산이었는데 결함이 많았어요. 기계 전체가 집 차고에 있을 법한 전선으로 제작돼 결코 작동할 수 없었죠. 중국산 장비는 표준 이하에요.”
불량 장비? 구매 프로세스가 엉망!
중국 협력업체가 노스볼트를 파괴했다는 소문은 점점 더 구체성을 띠며 퍼져나갔습니다. 급기야 우시리드 담당자가 공식적으로 이를 부인해야 했을 정도이죠.(“우리가 (장비 사용법을) 가르치고 싶어 하지 않았단 주장은 완전히 잘못된 겁니다.”)
자, 여러분이 보기엔 어떠신가요. 중국이 유럽의 배터리 야망을 훼방 놓기 위해 일부러 노스볼트를 망쳤다는 해석, 그럴듯한가요.
그런데 궁금합니다. 우시리드는 CATL은 물론 테슬라와 폭스바겐에도 장비를 공급한 이 분야 선두 기업인데요. 사업을 포기할 각오를 하지 않는 이상, 고객사를 그렇게까지 방해할 수가 있을까요. 또 만약 그런 조짐이 보였다면 노스볼트 측이 얼마든지 미리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요.
당연히 스웨덴에선 이런 논쟁이 크게 일었고, 현재도 진행 중입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노스볼트 자체가 얼마나 엉망이었는지에 대한 전현직 직원들의 증언이 쏟아져 나오는데요. 먼저 레딧의 ‘무엇이든 물어보세요(AMA)’ 게시판에 익명의 노스볼트 엔지니어가 올린 답변을 볼까요.
일단 우시리드와의 협업에 문제가 많았던 건 사실입니다. 특히 전선을 포함한 장비 품질 문제가 심각했죠. 하지만 그 진짜 원인은 엉망진창인 노스볼트의 조달 프로세스에 있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노스볼트는 우시리드에 형편없이 작성된 모호한 사양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그들(우시리드)은 충분히 좋다고 생각하지만, 유럽에선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저렴한 전선을 설치했죠. 노스볼트 직원은 장비 허가를 위해 중국으로 가서 이를 확인하고도 ‘배송 가능’으로 서명합니다. 마감일을 놓치지 않기 위해 어쨌든 승인한 거죠.”
그는 나머지 각종 문제-도면 등을 문서로 주기를 꺼리고, 매뉴얼 번역이 엉망이고, 영어가 잘 통하지 않은 것-가 있지만, 기업 문화 차이+영어실력 부족 때문이지 ‘음모’까진 아니라고 봤습니다.
유럽 매체 ‘더 로컬’과 인터뷰한 직원 반응도 이와 비슷합니다. “노스볼트의 경험 부족으로 인해 계약서가 제대로 작성되지 않았습니다. 계약서는 아무 가치도 없었죠. 실제로 무엇을 공급해야 하는지, 일정과 요구사항이 명확하지 않았습니다.” “이건 중국 기계와는 아무 상관 없는 일입니다. 그들(노스볼트 경영진)이 진짜 기술적 실사 없이, 모든 것을 엉성하게 조립했기 때문이죠. 그저 끔찍하게 잘못 관리한 겁니다.”
거품이 초래한 비현실적 야망의 결말
과연 중국이 노스볼트를 차지하기 위한 큰 그림이 있었는지, 그 음모론을 확인하기란 어차피 불가능하니 넘어가고요. 가장 이상한 건 이 부분입니다. 노스볼트 공동창업자이자 CEO인 페테르 칼슨(Peter Carlsson)는 구매 전문가입니다. 소니 에릭슨과 NXP반도체에서 구매를 담당했고, 창업 직전엔 테슬라의 공급망 책임 임원으로 일했죠. 그런데 왜 노스볼트는 구매에 있어서 이렇게까지 처참하게 실패했을까요.
FT는 노스볼트의 너무 빠른 성장과 경험 없고 무능한 임직원을 핵심 원인으로 지적합니다. FT와 인터뷰한 익명의 직원은 이렇게 말하죠. “전 이렇게 많은 관리자와 임원이 상황에 적절하게 대처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걸 본 적이 없습니다. 모든 분야에 경험이 부족한 직원이 많아요. 관리자, 엔지니어, 생산직, 심지어 임원까지.”
노스벨트 CEO 페테르 칼슨은 야망이 크고 대담하며 공격적인 스타일의 경영자입니다. 스웨덴 첫 공장의 배터리셀 양산이 시작되자마자, 그는 바로 캐나다와 독일에 공장을 추가로 짓겠다고 나섰습니다. 또 나트륨이온배터리와 항공기용 배터리 개발, 폐배터리 재활용으로도 나아갔죠. 너무 빨리, 많은 것을 하려고 했습니다.
정작 생산 현장에선 경험 없는 인력들이 불량장비와 씨름하고 있었는데 말이죠. 이 회사는 2년 경력의 25살 대졸자가 부서 책임자를 맡을 정도로 인력난이 심각했습니다. 어찌 보면 이는 당연합니다. 유럽에서는 다룬 적 없는 완전히 새로운 제품과 공정이니까요.
그럼, 노스볼트는 능력도 부족하면서 왜 그렇게 확장에만 열을 올렸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돈이 많다고 봤기 때문이죠. ‘유럽 최대 배터리 제조사’, ‘유럽 최초 배터리셀 생산’이란 화려한 타이틀 덕분에 그동안은 돈이 쉽게 따라왔습니다. EU나 독일과 캐나다 정부의 보조금, 각종 녹색 대출, 그리고 연기금 같은 기관의 투자까지 말이죠. 배터리셀을 잘 만드는 실력보다는 녹색투자 열풍의 한가운데 서있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던 겁니다.
결국 과대포장된 일종의 거품이었습니다. 스웨덴 옌셰핑 국제경영대학원 교수인 크리스티안 샌드스트롬은 “정부가 녹색 버블을 위한 비옥한 토양을 만들었다”고 지적하죠. “노스볼트는 자본조달 대부분을 자기자본이 아닌 부채를 끌어들여 이뤘습니다. 다른 누군가가 비용을 부담하기 때문에, (기업엔) 아무 리스크가 없는 환경을 만들었죠. 터무니없지만, 정치 자본가(political capitalists)엔 기회였습니다.” By.딥다이브
노스볼트의 위기는 한국 배터리 3사엔 기회가 될까요. 그런 해석이 없진 않지만, 노스볼트가 국내 장비 제조업체 여러 곳의 주요 고객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걱정스럽기도 합니다. 주요 내용을 요약하자면.
-유럽 배터리의 희망이었던 노스볼트가 파산 위기에 처했습니다. 배터리셀 생산이 끔찍하게 부진한 탓에 납품이 지연되면서 현금이 바닥 났습니다.
-생산 부진의 원인 중 하나는 중국산 불량장비로 인한 혼란입니다. 이를 두고 스웨덴에선 ‘중국 기업이 일부러 노스볼트를 망가뜨리고, 이를 인수하려고 한다’는 식의 음모론이 판칩니다.
-하지만 노스볼트의 구매 프로세스의 허술함이 중국산 장비를 둘러싼 대혼란을 초래한 진짜 원인일지 모릅니다. 배터리셀 만드는데 집중하기보다는 너무 빨리 사업을 확장하려고만 한 비현실적 야망이 벽에 부딪혔습니다. 기업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 없는 비옥한 환경이 거대한 녹색 거품을 만들었습니다.
*이 기사는 19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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