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국내 16곳 주요 기업 사장단이 이례적으로 공동성명을 발표한 데는 그만큼 국내외 경제 여건이 심상찮다는 위기감이 반영됐다. 내수 수요 침체 장기화와 트럼프발(發) 신냉전 리스크, 중국발 공급과잉 등 안팎의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야당이 주도하는 상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할 경우 기업들은 끝없는 소송전에 휘말릴 수 있다는 우려가 반영돼 있다.
● 야당 상법 개정안 당론 추진에 강한 반발
더불어민주당이 당론으로 지정한 상법 개정안 등 각종 규제에 대한 반발과 우려는 사장단 긴급 성명의 핵심 배경으로 꼽힌다. 한국 증시의 ‘나홀로’ 하락세 속에서 각 기업이 밸류업(가치 제고)에 나서야 한다는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이를 상법 개정으로 접근할 경우 부작용이 크다는 것이다. 법으로 이사의 충실 의무 대상을 ‘총주주’로 확대하면 소송 리스크가 크고 오히려 경쟁력을 저해한다는 주장이다.
성명에 참여한 한 대기업 사장은 “소액주주 보호는 자본시장법 개정으로도 충분히 가능한데 상법에서 지나치게 포괄적인 규정을 도입하게 되면 해외 행동주의 펀드 등의 공격에 노출되고 중장기 의사결정에 제약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다른 한 사장도 “미국을 제외하고 글로벌 경기가 모두 악화되고 있고, 이것이 수출에 의존하는 우리 경제에 또다른 문제가 되고 있다”며 “주가를 올리는 가장 근본적인 방법은 기업 경쟁력을 올리는 것인데 상법개정안은 오히려 기업 경쟁력을 낮추게 된다”고 강조했다.
국민의힘도 야당의 상법 개정안에 대해 “법적으로 충실 의무 대상에 주주를 일률적으로 포함하는 것에 대해 찬성하지 않는다”며 반대입장을 분명히 했다.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는 이날 국회에서 기자들과 만나 “1·2·3대 주주 또는 소액 주주가 있고, 이들은 이해관계가 굉장히 상충한다”고 지적했다.
● 트럼프발 신냉전 먹구름… “1년 내 금융 리스크”
이번 공동성명에는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2기 출범에 대한 기업들의 우려도 반영됐다. 트럼프 당선인의 연이은 고관세 정책 천명에 이어 ‘관세 예찬론자’인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이 임명되면서 본격적인 관세 전쟁, 제조업 리쇼어링(본국 회귀)에 시동이 걸릴 것으로 전망되기 때문이다.
이날 성명에 참여한 또다른 사장은 “미중 패권 전에서 반도체가 수단이 되다 보니 생산 시설을 자국으로 유치하려는 움직임이 더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국내외 금융·경제 전문가들도 트럼프 전 대통령 재집권에 따른 정책 변화를 한국 금융시스템의 최대 위험 요인 중 하나로 꼽았다. 이날 한국은행이 내놓은 ‘2024년 시스템 리스크 서베이’ 결과에 따르면 설문에 답한 전문가들이 1순위로 꼽은 리스크 요인은 ‘가계의 높은 부채 수준 및 상환부담 증가’(26.9%)였으며 미 대선 이후 정책 변화(20.5%), 주요국 자국 우선주의 산업정책 강화(9.0%) 등이 뒤를 이었다. 특히 미 대선 이후의 정책 변화로 인한 국내 금융 리스크는 응답자의 70.5%가 1년 이내에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경기 침체 장기화와 중국발 공급과잉으로 디스플레이에 이어 화학, 철강 등 국내 제조업을 뒷받침하던 주요 산업 분야도 흔들리고 있다. 롯데케미칼, LG화학 석유화학부문 등 주요 화학 기업이 3분기(7~9월) 적자 전환했고, 국내외 생산 설비 매각에 나서는 등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한편 이날 대한상공회의소, 한경협, 중소기업중앙회 등 경제 6단체는 상속세 개편 촉구에 대한 성명도 발표했다. 6단체는 “상속세 명목 최고세율은 50%로 OECD 회원국 중 2번째로 높다”며 “(현행 상속세율로는)경영권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어렵고, 외부 세력에 의한 경영권 탈취 또는 기업을 포기하는 일들이 발생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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