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국가부채 디폴트를 낸 나라. 선진국에서 한순간에 ‘망한 나라’로 전락해 조롱받던 나라. 어디인지 아시겠죠. 바로 그리스입니다.
그리스 경제가 10여 년 만에 되살아났다는 얘기 들어보셨을 겁니다. 요즘 그리스는 유로 경제의 최고 모범생으로 칭찬받죠. 그럼 그리스는 어떻게 기적적으로 부활했을까요. 뼈를 깎는 긴축정책이 경제를 살린 걸까요. 흔히 그렇게 생각하지만, 진짜 그리스 경제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좀 다른데요. 오늘은 그리스의 반전 경제학을 들여다보겠습니다.
먼저 과거를 좀 돌아볼게요. 2001년 유로존 가입 이후 한동안 그리스 경제는 초호황을 누렸습니다. 통화가 유로화로 바뀐 덕분에 그리스 경제력엔 맞지 않게 조달금리가 확 낮아졌거든요(6~7%→3~4%). 정부는 빚내서 공공지출 늘리기 바빴습니다. 무상 의료와 후한 연금제도도 국가부채를 키웠고요. 부동산 시장엔 대규모 투기 붐이 일어납니다. 막대한 재정을 투입해 2004년 아테네 올림픽도 치렀죠.
하지만 파티는 갑자기 끝났고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가 터집니다. 경제를 떠받치던 관광·해운 산업은 직격탄을 맞았고, 투자자들은 부채비율 높은 그리스에서 발을 빼기 바빴죠. 거품이 빠르게 꺼졌습니다.
경기침체로 나라가 뒤숭숭했던 2009년 9월, 선거 유세에서 당시 제1 야당 대표였던 요르요스 파판드레우는 역사에 남을 유명한 발언을 합니다. “돈이 있습니다.” 재정적자가 심각하다고 그리스 경제가 손가락질당하던 상황에서 ‘그거 해결할 돈 있거든’이라며 자신감을 보인 건데요.
그렇게 경제회복 열망에 힘입어 총리직에 오른 파판드레우. 취임 몇주 만에 전 세계를 경악케 할 깜짝 자백을 합니다. 집권하고 나서 까보니, 국가 통계가 완전히 엉터리였다는 거죠. 실제론 재정적자가 기존 발표치의 몇 배라며 통계를 수정 발표해 버립니다(GDP의 3.7%→12.7%로 수정, 나중에 15.4%로 최종 정정됨).
있는 줄 알았던 돈은 없다, 외부 수혈 없인 버틸 수 없다는 게 드러난 건데요. 결국 2010년 4월 파판드레우 총리가 아름다운 카스텔로리조 항구를 배경으로 유럽연합(EU)·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한다고 발표합니다. “침몰할 준비가 된 배”처럼 보이는 그리스는 “명예와 신용이 없는 나라”가 됐다면서 말이죠. 그리스 경제사의 굴욕적인 순간입니다.
이것이 총 세 차례(2010년, 2012년, 2015년)에 걸쳐 집행된 3200억 유로(약 471조원) 구제금융의 시작이었습니다. 구제금융 대가는 혹독했죠. IMF와 EU는 뼈를 깎는 듯한 긴축을 요구합니다. 공공병원은 문을 닫고, 공무원은 해고되고, 임금과 연금은 3분의 1이 깎이고, 세금은 치솟았습니다. 기업과 은행이 줄줄이 폐업했고, 실업률은 30%에 육박했고, 특히 청년(15~24세) 실업률은 54%로 뛰었죠. 이 기간 그리스 실질 GDP가 4분의 1이나 사라졌을 정도인데요. 이건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나라에선 찾아보기 어려운 수준의 타격이었습니다. 1930년 미국 대공황과 맞먹는 정도였죠.
먹고 살기 어려워진 국민은 가혹한 긴축안에 분노했고, 나라는 총파업과 시위로 조용할 날이 없었습니다. 2015년 이런 분노를 바탕으로 집권한 포퓰리즘 정당(급진좌파연합 시리자)은 EU를 상대로 벼랑 끝 전술을 펼쳤죠. 긴축을 요구하는 구제금융안을 국민투표에 부쳐 부결을 이끌어냈고요. 채무 탕감 안 해주면 ‘디폴트+유로존 탈퇴’로 가버리겠다는 식으로 협박한 건데요. 하지만 이럴수록 EU 다른 국가는 더 완고해졌고, 결국 그리스는 백기를 들고 맙니다. 전보다 한층 더 혹독한 긴축 요구를 담은 추가 구제금융안을 받아들여야 했죠.
너무 독한 약을 썼다
국제 채권단(EU와 IMF)의 그리스 경제 신탁통치 체제는 2018년 8월에야 막을 내립니다. 무려 8년에 걸친 고난의 행군은 일단락됐는데요.
그렇다고 그리스 경제가 아직 제대로 살아난 건 전혀 아니었습니다. 비유하자면 간신히 링거 바늘 빼고 입원실에서 퇴원하는 수준이었죠. 당시 국가부채는 GDP의 180%에 달했고(EU 최대), 실업률은 20%에 육박했고, 국가 신용등급은 B+(22단계 중 14번째)의 투자부적격 등급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이즈음엔 채권단도 깨달았습니다. 독한 약(가혹한 긴축)의 부작용이 너무 크다는 것을요. 재정적자라는 급한 불은 껐지만, 구조적 개혁으로 이어지진 않았고 오히려 약자의 희생만 키웠기 때문입니다. IMF에서 그리스 구제금융을 담당했던(그래서 그리스에서 엄청 미움을 받았던) 폴 톰센은 2019년 이런 반성을 담은 연설을 합니다.
“우리(IMF)는 조정(긴축)이 성장에 비우호적이고 지속 불가능한 방식이란 우려를 점점 느꼈습니다. 지출은 잠재 성장과 기본 공공서비스 제공을 방해하는 수준으로 삭감됐습니다. 우리는 재정통합이 GDP에 미치는 영향을 과소평가했습니다. 특히 지나치게 낙관적인 가정으로 인해 노동자에 과도한 부담을 줬고, 그 결과 프로그램(구제금융안)에 대한 지지가 줄어들었습니다.”
그리스 구제금융 협상을 이끌었던 장클로드 융커 전 EU 집행위원장도 2022년 인터뷰에서 비슷한 고백을 합니다. “그리스 시민들은 스스로 자랑스러워할 이유가 많습니다. 그들은 이 끔찍한 기간 동안 많은 고통을 겪었고, 존엄성을 존중받지 못했습니다. 그리스 사회에 부과된 조치는 너무 엄격했습니다. 실수의 일부는 유럽 연합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IMF, 중앙은행, 그리고 제가 몇 년 동안 위원회에서 맹목적인 긴축 예산을 시행했기 때문이죠. 그것은 실수였습니다.”
긴축의 부작용을 보여주는 대표 사례가 세금 분야입니다. 그리스 경제가 위기에 빠진 이유로 복지정책과 국유화를 많이 꼽지만, 그 못지않게 심각했던 문제가 탈세였죠. 자영업자 비중(32%)이 워낙 높은 영향인데요.
이런 상황을 바로잡지 않고 긴축을 위해 세율을 대폭 높이자 어떻게 됐을까요. 가뜩이나 낮았던 세금 징수율이 뚝 떨어집니다(2010년 65%→2017년 41%). 고소득자들이 더 적극적으로 탈세를 한 거죠. 그렇게 부자들은 이리저리 빠져나간 반면, 저소득 노동자는 실업과 최저임금 삭감으로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리스 경제의 기적이 시작됐다
2019년 그리스 국민은 더 이상 포퓰리즘 정당에 표를 몰아주지 않았습니다. 성장을 외치는 친기업 성향의 중도우파 정당을 선택했죠. 하버드 경영대학원과 매켄지 출신의 엘리트 정치인, 키리아코스 미초타키스가 총리에 오릅니다.
그리고 지난 5년간 그리스가 이룬 변화는 놀랍습니다. 전 세계가 ‘그리스의 기적’이라며 찬탄하죠. 일단 지표상으로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볼까요. 그동안의 성과는 이렇습니다.
EU 국가 중 실업률이 가장 빠르게 감소했습니다(18→9.3%). GDP 대비 공공부채 비율이 가장 크게 감소했습니다(207→153%). 임금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습니다(평균임금 5년간 20.2% 인상). 개인 소비 증가율이 유럽 평균보다 높습니다(23.4%). 1인당 실질 GDP가 5년간 7.7% 증가해 EU 평균(3.3%)을 크게 웃돕니다. 팬데믹에서 벗어난 2021년부터 관광업이 살아나면서 그리스는 3년 연속으로 양호한 성장률(2021년 8.5%, 2022년 5.6%, 2023년 2.0%)을 기록합니다. 마이크로소프트가 데이터센터를, 화이자가 연구개발 허브를 그리스에 구축 중이기도 하죠. 떠났던 투자자가 다시 돌아오고, 소득과 소비가 살아나고, 재정건전성은 강화되고 있습니다.
2019년부터는 빚도 조금씩 갚아나가고 있습니다. 몇 차례 조기 상환 끝에 IMF 대출금은 전액 상환했고요. 유로존 국가에서 빌린 ‘그리스 대출 기구(GLF)’ 대출금도 올해 말이면 다 갚을 거라고 합니다. 내년엔 만기가 아직 많이 남은 장기부채 중에서도 50억 유로어치를 조기 상환한다는 계획도 밝혔죠. 모두가 회생이 쉽지 않다고 봤던 그리스 경제가 놀랍게도 다시 살아나고 있습니다. 경제 성과를 인정받아 지난해 선거에서 미초타키스 총리는 각종 정치적 구설수에도 불구하고 재집권에 성공했고요. S&P와 피치는 그리스 국가 신용등급을 12년 만에 ‘투자 적격’으로 올렸습니다. 이코노미스트지는 ‘2023년 올해의 국가’로 그리스를 선정했죠.
성장을 위한 경제학
자, 그럼 미초타키스 정부는 그리스 경제를 살리기 위해 무엇을 했을까요. 고통스러운 긴축도, 포퓰리즘도 모두 아닙니다. 대신 이런 걸 했습니다.
①최저임금을 대폭 인상합니다. 그리스는 2019년 이후 네 차례에 걸쳐 최저임금을 인상했습니다. 그 결과 월 650유로(약 96만원)였던 최저임금이 830유로(약 122만원)로 28% 인상됐죠. 이 기간 물가상승률(16%)을 크게 웃도는 겁니다. 구제금융 기간 긴축을 한다며 최저임금을 싹둑 삭감했던 것과 비교하면 극적인 변화인데요. 그리스 노동사회보장부 장관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생산된 부가 정의에 따라 분배돼야 하기 때문에 최저임금을 인상합니다. 선거 전 공약한 대로, 재정 안정을 저해하지 않으면서 2027년까지 최저임금을 950유로로 올리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여기서 이렇게 반문할 분 많을 겁니다. 최저임금 인상? 그거 부작용 큰 퍼주기 정책 아니야?
한번 봅시다. 보통 최저임금 인상에 반대하는 논리가 뭘까요. 임금이 올라가면→고용주 부담이 늘어나니까→고용이 감소하고 실업이 늘어날 거라고 보기 때문이죠.
그런데 그리스에서 실제 나타난 경제학 작동방식은 달랐습니다. 이 기간 고용은 50만명 늘어났고, 실업률은 꾸준히 감소했죠. 최저임금을 받는 저임금 계층의 살림살이는 나아졌고요. 저소득가구는 소비성향이 높기 때문에 늘어난 소득이 소비 증가로 쉽게 이어지는 법입니다. 이로 인해 소비가 살아나고 물가도 적당히 뛰면서 GDP 증가에 기여했죠. 최저임금 인상이 가져온 선순환입니다.
사실 ‘최저임금 인상이 일자리 감소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작다’는 건 데이비드 카드 미국 UC버클리대 교수가 1992년 연구에서 밝힌 바 있죠. 이 연구는 그에게 2021년 노벨경제학상까지 안겨줬는데요. 하지만 여전히 최저임금 인상은 경제학자들 사이에서도 주장이 완전히 엇갈리는 뜨거운 주제입니다.
그래서 IMF도 그리스가 최저임금을 인상한다고 했을 때 많이 우려를 표했습니다. FT의 마틴 울프 칼럼니스트는 “정책의 후퇴는 위협”이라며 경고했죠. 하지만 그리스는 정부위원회에 참여한 런던정경대 연구팀 조사 결과를 신뢰했습니다. 당시 연구팀은 “최저임금의 신중한 인상은 임금 불평등 감소에 도움이 되고, 노동 수요에 미치는 영향은 무시할 정도일 것”이라고 결론 내렸죠.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실제로 그랬습니다.
②법인세를 포함한 세금을 깎아줍니다. 그리스 경제정책의 또 다른 큰 축은 감세입니다. 위기 시절 그리스는 재정 흑자를 위해 법인세를 대폭(20→29%) 끌어올렸는데요. 미초타키스 총리는 취임 이후 세 차례에 걸쳐 법인세율을 22%까지 끌어내립니다.
그뿐 아니라 배당소득세 인하(10→5%) 등, 긴축 시절 인상됐던 50가지 세금을 이미 없애거나 내렸는데요. “점진적이면서도 재정적으로 지속 가능한 감세는 우리의 핵심 선택”이라고 미초타키스 총리는 말합니다. 기업 활동을 장려하고 경제성장률을 끌어올린다면, 세율을 낮춰도 세수는 오히려 늘어난다는 거죠.
이렇게 세율을 대폭 낮추는 동시에 그리스 정부가 집중하는 게 있습니다. 바로 탈세와의 싸움입니다. 전자송장 의무화, POS 사용 확대 같은 ‘거래의 디지털화’를 강하게 밀어붙이고 있죠. 마치 과거 한국이 ‘신용카드 소득공제’ 정책으로 지하경제를 줄였던 것과 비슷한 발상인데요. 실제로 이런 조치의 세수 증대 효과가 쏠쏠하다고 합니다. 만약 세금 누수를 더 단단히 틀어막을 수 있다면 지금은 24%나 되는 부가가치세까지 인하할 수 있을 겁니다.
어떠신가요. 최저임금 인상과 세금 인하의 결합이라니. 진보와 보수, 양쪽 모두를 당혹스럽게 하는 정책 조합인데요. 달리 보면, 가혹한 긴축은 없었지만 재정적인 책임감을 가졌고요. 불평등을 바로잡으면서도 포퓰리즘으로 빠지진 않았습니다. 이념에 얽매이지 않고 어떻게 경제를 살릴지에만 초점을 맞췄죠.
미초타키스 총리는 올 2월 이코노미스트 기고문에서 “경제에 있어서 우리는 성장에 집중했다”고 말합니다. “포퓰리즘에 맞서는 것은 공평한 경제 성장을 창출하는 것과 관련 있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포퓰리즘 정치가 휩쓸고 있는 전 세계에 그리스 경제 부활이 주는 메시지입니다. By.딥다이브
그리스 경제에 대해 ‘어떻게 망했는지’는 자세히 다루면서, 정작 ‘어떻게 다시 살아나고 있는지’는 간단히 언급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더군요. 이젠 부활의 스토리에도 집중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주요 내용을 요약하자면.
-유로존 가입 이후 초호황기를 누렸던 그리스 경제는 금융위기 직격탄을 맞고 고꾸라졌습니다. 국가통계 조작까지 겹치며 금융시장 신뢰를 잃었고, 결국 국제 채권단의 구제금융을 받아야했죠.
-8년이나 이어진 긴축은 가혹했지만 구조개혁은 제대로 되지 않았고, 고통은 가난한 자에 집중됐습니다. 이젠 당시 맹목적인 긴축을 요구했던 게 실수였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2019년 그리스 국민은 포퓰리즘 대신 중도파를 선택했습니다. 최저임금 인상과 법인세 감면을 중심으로 한 경제정책을 펼치면서 그리스 경제는 기적적으로 살아나고 있죠. 긴축도, 퍼주기도 아닌 경제 성장에 집중한 결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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