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국제통화기금(IMF)‘격인 유럽안정화기구(ESM)의 피에르 그라메냐 총재가 한국을 찾았다. ESM은 2010년 그리스 재정위기를 계기로 조성된 유럽재정안정기금(EFSF)의 시한이 끝난 2013년 7월 공식 출범한 유로존(유로화 사용 20개국) 상설 구제금융기관이다. 7000억 유로(약 1030조 원) 상당의 구제기금을 운용하면서 채권 발행 등을 통해 위기에 처한 유럽 국가들에게 시장보다 낮은 금리로 자금을 지원한다.
ESM의 도움을 받아 그리스, 스페인, 포르투갈 등 ‘유럽의 문제아’로 손꼽혔던 남유럽 국가들은 최근 높은 경제성장률을 토대로 유럽의 경제 성장을 견인하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우크라이나 전쟁 등 큰 충격에도 유럽 경제가 다시 안정을 찾은 데는 ESM이 중추적 역할을 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2022년 12월 ESM 총재로 부임한 그라메냐 총재는 한국과도 인연도 깊다. 외교관 출신인 그라메냐 총재는 1996~2002년 일본 주재 룩셈부르크 대사로 근무하며 한국을 겸임했다. 아래는 20일 동아일보와 인터뷰에서 나눈 그라메냐 총재와의 문답이다.
―재정 위기로 국가 부도 사태까지 이르렀던 그리스가 최근 EU 전체 경제 성장률을 상회하는 등 경제 부활 조짐을 보이고 있다. ESM은 유럽 지역의 경제 안정화를 위해 어떠한 노력을 했고, 앞으로 유럽 경제를 어떻게 전망하나.
“유럽 경제의 회복력(resilience)은 강하다. 많은 이들이 유럽의 경기 침체를 예상했지만 침체는 오지 않았다. 유럽의 경제 성장률은 1%대로 높진 않지만 여전히 성장하고 있고, 상황은 갈수록 나아질 거라 믿는다. ESM은 그리스, 스페인, 포르투갈, 사이프러스, 아일랜드 등 5개국에 구제금융을 지원했다. 이후에도 우리는 각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부채 비율을 면밀히 주시하며 부채 부담이 각국에 어떻게 작용하는지 관찰한다. ESM이 없었다면 일부 국가는 유로존에서 이탈했을 수도 있다고 본다. ESM은 위기가 발생할 경우에 대비해 늘 준비가 돼 있다.”
―앞으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당선인의 재집권이 유럽을 비롯한 세계 경제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거라고 보는가.
“트럼프 당선인의 공약대로 실제 관세가 인상된다면 세계 무역량은 줄고 특히 유럽 일부 국가를 비롯해 한국, 중국 등 ‘수출 대국’(export champions)들은 더 큰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 현재 우리는 평소보다 더 많은 경제적 변동성과 불확실성에 대비해야 하는 시점인 건 맞다. 특히 지정학적 분열이 심화되면 유럽 국가들의 방위비 부담이 늘어날 수 있다는 점은 우리도 주목하고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원칙에 기반한 양자간, 또는 다자간 무역 협력 관계는 결코 깨지지 않는다는 것을 세계에 보여줘야 한다.”
―트럼프 당선인에 의한 인플레이션 자극 우려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일부 경제학자들의 분석대로 트럼프 당선인의 정책들이 인플레이션을 다시 자극할 수 있고, 이는 다른 나라에도 파급 효과를 미칠 것이다. 중요한 건 속도다. 트럼프 2기가 시작되고 얼마나 빠르게 물가가 오르는지는 지켜봐야 한다.”
―앞으로 유럽 경제에 미칠 주요 글로벌 메가트렌드는 뭔가.
“지정학적 분열과 기후변화, 인구변화 등을 꼽을 수 있다. 세계화가 둔화되면서 ‘슬로벌라이제이션(Slow+Globalization)’ 현상이 등장했다. 이는 트럼프 당선인의 관세 인상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전쟁 등 지정학적 긴장에 의해 촉발됐다. 유엔(UN)에 따르면 현재 지구에는 공식적으로 47건의 전쟁이 진행 중이고, 이 수치는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긴장 상황 속에서도 ‘무역의 지역화(regionalization of trade)’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다. 유럽과 한국 간 협력 관계가 대표적 예다. 이달 한국과 EU가 안보·방위 분야 협력을 강화하기로 약속한 사실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번 방한을 통해 한국과는 어떤 협력 관계를 모색하고자 하나.
“우리는 진심으로 다자주의를 신뢰한다. 최근 몇 년 사이 다자주의는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방한은 매우 중요한 시점에서 이뤄졌다고 믿는다. 한국은행과 반기문 전 UN 사무총장 등과의 만남을 통해 ESM이 구제금융기관으로서의 역할 외에도 다자주의가 미래로 나아가는 가장 옳은 방법이라는 점을 주장하는 기회를 갖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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