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A 씨(36)는 올 7월 새집을 마련하면서 10년 넘게 납입해 6000만 원가량이 모인 개인형 퇴직연금(IRP)을 깼다. 경기권의 아파트를 팔고 서울 아파트를 사려 하는데 새로 구입하는 집이 6억 원가량 더 비쌌다. 고금리 속에 대출 규제까지 강화되고 있어 모아둔 돈과 은행권 대출로는 매매 자금 마련이 힘들었다. 그는 “IRP 계좌를 중도에 해지하면서 6000만 원 가운데 1000만 원가량의 수익금은 고스란히 세금으로 뱉어내야 했지만 주택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말했다.
지난해 주택 구입, 주거 임차 등 ‘주거 관련’ 사유로 퇴직연금을 중도 인출한 가입자가 전체 중도 인출의 80%를 넘어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A 씨처럼 주택 구입을 위해 퇴직연금을 중도에 뺀 인원이 전체 중도 인출 인원 중 53%가량을 차지하며 역대 최대치를 보였다. 고금리 장기화로 이자율이 높은 시중은행 대출을 이용하는 대신에 퇴직연금 등 노후 자금을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아 대출)하는 직장인이 급증한 것으로 풀이된다.
● 퇴직연금 중도 인출 53% ‘주택 구입’ 목적
통계청이 16일 발표한 ‘2023년 퇴직연금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퇴직연금 중도 인출 인원은 6만3783명으로 전년보다 28.1% 증가했다. 인출 금액도 2조4404억 원으로 40.0% 급증했다. 중도 인출 인원과 금액은 2019년 이후 4년 연속 줄곧 감소하다가 올해 다시 늘어났다.
지난해 퇴직연금 중도 인출 인원 가운데 52.7%인 3만3612명(1조5217억 원)은 ‘주택 구입’ 목적이었다. 해당 인원과 중도 인출 금액은 관련 통계를 집계하기 시작한 2015년 이후 가장 많다. 보증금 등 주거 임차 때문에 퇴직연금을 중간에 뺀 인원도 전체 중도 인출 인원의 27.5%인 1만7555명(6158억 원)으로 역대 최대치였다. 이어 회생 절차(13.6%), 장기 요양(4.8%) 순이었다.
통계청 관계자는 “지난해 고금리 현상이 장기화되다 보니 이율이 높은 시중 대출보다는 퇴직연금을 중도 인출해 주택을 구입하거나 임차 보증금 등을 마련한 경우가 늘어난 것으로 추측된다”고 말했다.
퇴직연금 중도 인출자를 연령별로 보면 30대가 42.4%로 가장 많았다. 이어 40대(33.3%), 50대(15.0%) 순이었다. 20대 이하에서는 주거 임차가, 나머지 연령대에서는 주택 구입 목적의 중도 인출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일각에선 부동산 가격이 떨어지면 이들이 자금난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김진웅 NH투자증권 100세시대연구소 연구위원은 “우리 사회는 연금보다는 부동산 투자가 더 수익률이 좋을 것이란 고정관념이 있는 편”이라며 “그런데 만약 부동산 가격이 하락세에 접어들면 노후 자금인 퇴직연금을 헐어 부동산에 투자했던 이들은 심각한 자금난에 빠질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 IRP 가입자, 1년 전보다 7%↑
지난해 전체 퇴직연금 적립액은 381조 원으로 1년 전보다 13.9% 늘었다. 반면 지난해 기준 가입 대상 근로자 1272만2000명 중 53.0%가 퇴직연금에 가입해 가입률은 1년 전보다 0.2%포인트 줄었다.
제도 유형별로는 확정급여형(DB)이 53.7%를 차지해 가장 많았으나 전년보다 비중은 3.6%포인트 감소했다. 확정기여형(DC)은 25.9%, IRP는 20.0%를 차지해 전년보다 각각 1.0%포인트, 2.6%포인트 늘었다. 특히 IRP 가입 증가세가 두드러졌다. 지난해 IRP 가입 인원은 321만5000명으로 전년보다 7.0% 증가했고, 적립 금액도 전년보다 30.9% 늘어난 76조 원으로 나타났다.
적립금 운용 방식별로 보면 원금과 이자가 보장되는 원리금 보장형(80.4%)이 여전히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지만 전년보다는 5.1%포인트 감소했다. 반면 원리금이 보장되지 않는 방식인 실적배당형 비중은 12.8%로 전년보다 1.6%포인트 증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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