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 변화에 뒤처진 대기업은 어떤 식으로 쇄신을 이룰 수 있을까요. 혁신을 사그라들게 만드는 ‘대기업병’은 치유 가능할까요.
이 오래된 질문에 대한 답을 주는 기업이 있죠. 얼마 전 삼성전자가 연구 중이란 보도가 나오기도 했던 일본 대기업 히타치제작소(이하 히타치)입니다.
15년 전 파산 위기에 몰렸던 히타치는 그야말로 마누라·자식 빼고 다 바꾸며 새롭게 태어났죠. 특히 주목할 건 지난 15년 동안 사장이 4번 바뀌는 가운데도 구조개혁을 멈추지 않고 일관되게 실행했단 점입니다. 주인 없는 기업(소유분산 기업)은 CEO 리스크가 크다는 편견을 완전히 깨는데요. 대기업 위기 극복의 모범사례, 히타치의 혁신을 들여다봅니다.
올해 들어 주가 상승률 90%. 히타치는 이제 일본 시가총액 4위(약 166조원)로, 소니(3위)와 거의 맞먹습니다. “히타치는 문제 있는 하드웨어 제조사였지만 지금은 성장주로 변모했다.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주식”이라는 일본 펀드매니저의 평가가 나오는데요. 왜 지금 히타치인가를 얘기하기 전에 과거를 간단히 볼까요. 히타치란 브랜드에 대한 기억이 남아있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한때 TV와 에어컨이 꽤 잘 팔렸고요. 외장하드의 강자였죠. 그렇다고 순수 전자회사는 아니었습니다. 굴삭기 같은 건설기계도 비중이 컸고요. 그룹의 모태는 금속 산업입니다. 또 반도체 제조(메모리와 시스템LSI), 전동공구, 화력발전 시스템, 조선업, 물류와 금융(캐피탈)업까지 했습니다. 소비재 빼고는 웬만한 건 다 하는 그야말로 전형적인 문어발식 대기업이었죠.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모든 사업을 이제 다 안 합니다. 그럼 지금은 뭘 주로 하느냐. 크게 세 가지입니다.
1. 디지털 시스템과 서비스=아날로그 산업현장에 IT와 AI를 이용한 실시간 데이터 분석을 도입하는 사업입니다. 예를 들어 ‘스마트 공장’이 그중 하나인데요. 어떻게 스마트 공장을 구축하느냐. 사람 작업자가 손으로 조립하는 공장이라면 전자태그 수만 장과 카메라 수백 대를 달아서 현장 데이터를 수집합니다. 이를 통해 지금 어느 작업구간에서 병목현상이 벌어지는지, 뭐가 문제인지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게 하죠.
공장 작업자를 위한 교육 시스템도 제공합니다. 작업 모습을 찍은 영상을 가지고 작업자 몸의 방향, 손의 움직임 등을 AI로 분석하는 거죠. 그렇게 쌓인 정보를 가지고 신입사원들에게 ‘숙련공은 이렇게 일한다’라는 걸 가르쳐줍니다.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기술을 전수하는 데 드는 시간을 단축할 수 있죠.
이런 디지털 분야는 히타치가 가장 역점을 두는 영역입니다. 2021년엔 미국 IT기업 글로벌로직스를 96억 달러에 인수한 것도 이 분야를 강화하기 위해서였죠. 이는 일본 전자산업 역사상 최대 규모 M&A였습니다. FT는 히타치가 “IT와 데이터 과학을 적용해 유틸리티, 제조업체에 경영 컨설턴트와 같은 존재가 됐다”고 평가합니다. 이제 히타치는 “일본에서 가장 큰 AI 사업을 하는 기업”(애널리스트 펠럼 스미더스)으로 통하죠.
2. 그린 에너지&모빌리티=또 다른 축은 전력과 철도입니다. 전력과 철도는 달라 보이지만 둘 다 하드웨어 못지않게 제어·운용 기술이 중요하다는 공통점이 있죠. 히타치가 강한 분야입니다. 2020년 히타치는 스위스 기업 ABB의 송배전 사업을 인수하며(68억 달러) 전력 분야의 글로벌 강자로 올라섰고요. 마침 올해 AI 수혜주로 전력주가 급부상하면서 이 분야가 주가 상승의 큰 축이 됐죠. 철도 사업에서 히타치는 영국·이탈리아·그리스 등 유럽을 중심으로 열차 제조와 함께 신호시스템·보수사업을 잇따라 수주하고 있습니다.
3. 커넥티브 인더스트리즈=엘리베이터, 반도체 제조 장치, 산업기계를 제조·판매합니다. 전통적으로 히타치가 주로 해왔던 하드웨어 제조업이죠. 다만 제품만 덜렁 파는 게 아니라 디지털 솔루션을 함께 판매하는 방향을 추구합니다.
‘이러다 망한다’는 위기감
요약하자면 히타치는 그동안 중구난방으로 뻗어있던 가지를 대거 쳐내고, 거대한 그룹을 세 줄기로 정리해 왔습니다. 2009년 943개였던 자회사는 많은 매각, 그리고 인수를 모두 거치며 지금은 573개가 됐고요. 이제 해외 매출 비중이 61%, 외국인 직원 비중이 60%에 달하는 진짜 글로벌 기업입니다. 일본 내수 설비투자 의존도가 워낙 높아서 ‘GDP(국내총생산) 기업’(기업 실적이 일본 GDP와 비슷하게 움직인다는 뜻)으로 불렸던 과거 모습은 이제 찾아볼 수 없죠.
그럼 히타치를 이렇게 뒤바꿔놓은 건 무엇일까요. 큰 변화 이전에 ‘이러다 진짜 망하겠다’는 큰 위기감이 있었습니다.
사실 대기업의 문어발식 확장엔 장점도 있죠. 산업마다 사이클이 다르니까, 어느 한쪽이 적자에 빠져도 다른 데가 적당히 메울 수 있으니까요. 과거 히타치도 그렇게 그럭저럭 굴러갔습니다. 물론 일본이 잃어버린 30년에 빠지기 시작한 1990년부터 거의 이익을 내지 못했지만요. 그리고 2008년 히타치는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글로벌 금융위기의 직격탄을 맞은 겁니다. 이듬해 5월 발표한 2008 회계연도 적자 규모는 7873억엔. 일본 제조업 역사상 최대 기록이었습니다.
“여기서 한 번만 더 적자가 나면 도산한다.” 히타치 내부에선 이런 진단이 나왔습니다. 외부에선 ‘가라앉는 거함’이라고 불렀죠. 2009년 4월 망할 위기에 처한 회사를 이어받은 9대 사장인 가와무라 다카시 사장의 취임 일성은 “적자는 악”이었습니다. 곧바로 대대적인 사업구조 재편을 선언했죠.
“(모든 걸 다루는) 대기업에서 사회혁신 사업으로 축을 옮기겠다.” 그동안 자회사별로 제각각이었던 목표를 하나로 모아 뚜렷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룹을 하나로 묶는 경영전략이라는 게 제대로 생긴 거죠. 여기서 사회혁신이란 ‘우리는 단순히 하드웨어를 파는 게 아니라, 고객에게 디지털 솔루션을 제공해 가치 창출을 돕는 기업이 되겠다’라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물론 아무리 목표가 뚜렷해도 문제는 실행입니다. 구조 개편엔 당연히 진통이 따르기 마련이죠. 흑자인 사업은 흑자라서, 적자인 사업은 곧 나아질 테니까 자기네는 구조조정 당할 이유가 없다고 반발합니다. 그걸 헤쳐 나가야만 하죠.
11대 사장이었던 히가시하라 토시아키 현 회장은 이렇게 회고합니다. “상반기까진 모든 자회사가 ‘올해 목표 달성 가능하다’고 전망을 보고합니다. 그런데 3분기가 끝날 무렵이 되면 구름의 움직임이 수상해지죠. ‘사실은…’이라며 목표달성이 어려워졌다고 얘기하는 겁니다. ‘자기네가 적자여도 다른 곳이 만회해 줄 것’이란 나태의 구조가 여전히 뿌리 깊게 남아있었습니다.”
독립적인 이사회의 역할
이렇게 그룹과 자회사의 목표가 따로 갈 때, 중요한 건 강력한 리더십이죠. 하지만 히타치는 뚜렷한 대주주가 없고, 그룹 CEO는 자회사 수장들과 비슷하게 공채 출신입니다. CEO의 의지와 열정만으로 끌고 나가기란 어려운 구조인데요.
하지만 히타치는 놀랍게도 2009년부터 지금까지 사장이 여러 번 바뀌는 가운데도 계속 같은 방향으로 계속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럴 수 있는 건 독립성 높은 이사회가 개혁을 지지하고 동시에 견제하고 있기 때문이죠.
일본 또는 한국 모두 대기업의 이사회란 대체로 비슷한 모습이죠. 이미 하기로 거의 결정된 내용이 의안으로 올라오고요, 이사회는 사실상 거수기 역할을 합니다. 이사회 멤버는 주로 현 경영진과 가까운 사람들로 채워지고요.
히타치 이사회도 과거엔 그랬지만, 이젠 구성부터 다른 기업과 차이가 큽니다. 12명 중 9명이 사외이사이고, 이 중 5명은 외국인이죠. 회의는 치열하고 깐깐합니다. 히타치의 전 사외이사였던 관료 출신 모치즈키 하루부미는 첫 이사회부터 깜짝 놀랐다고 전합니다. 미국 3M CEO 출신인 조지 버클리 사외이사가 발언 차례가 되자 메모를 들고 기관총처럼 비판을 마구 쏘아댔기 때문인데요. “이렇게 소극적인 계획이면 미국에선 해고될 것”이라며 거침이 없었죠. M&A 같은 중요한 사항에 대한 심의는 매우 철저히 이뤄집니다. 차기 CEO를 선임할 땐 후보를 여러 차례 불러 검증하죠. 하루부미는 “진정한 의미의 감독과 집행의 분리가 뭔지 알게 됐다”고 말합니다.
독립적이고 합리적인 데다 글로벌화까지 된 이사회의 존재는 구조 개혁에 명분과 힘을 실어줍니다. 이사회가 든든히 버티고 있으니 사장이 바뀐다고 흔들리는 일도 없고요. 코지마 케이지 현 사장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CEO가 깃발을 건네주며 달리는 이어달리기 같습니다. 이사회가 마치 감독처럼 차를 타고 옆에서 함께 달리면서 ‘힘내라, 너무 빠르다’라고 독려를 해주는 느낌이죠. 감독이 대신 달리는 건 아니지만, 이사들로부터 응원과 여러 조언을 받습니다.” 그는 “사장이 교체되면서, 10년 넘게 같은 방향을 목표로 경영을 계속하는 회사는 드물 것”이란 말을 자주 합니다.
변혁은 시간을 들이는 것
2008년 히타치 그룹 자회사 중 상장사는 22개에 달했습니다. 하지만 이젠 0이죠. 이중 상당수가 아예 매각됐거나, 지분을 일부 팔아 연결 자회사에서 빠졌습니다. 일부는 합병하거나 완전자회사가 되면서 상장폐지했고요.
그럼 자회사 중 어떤 걸 남겨두고 어떤 건 팔아야 할까요. 생각보다 그 답을 내기란 쉽지 않습니다. 언뜻 보기엔 ‘시너지가 있냐, 없냐’를 기준으로 삼으면 될 것 같은데요. 사실 시너지라는 게 해석하기 나름인 경우도 많습니다. 그것만으론 조직의 불만을 뚫고 가기 어렵죠.
그래서 히타치는 그룹의 목표에 충실하기로 합니다. 히타치는 사회혁신, 즉 단순 제조가 아닌 디지털 서비스 쪽으로 나아가기로 했잖아요. 그러려면 자산을 ‘라이트’하게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봤습니다. 이때 라이트란, ‘Right’와 ‘Light’를 모두 뜻하죠.
대표적인 사례가 히타치건설기계입니다. 굴삭기 같은 건설기계는 분명 다른 자회사와 시너지 효과가 있다고 할 수 있죠. 전자부품은 물론 원격감시 솔루션 같은 IT를 결합한 디지털 솔루션도 히타치가 제공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사회는 글로벌 건설기계 시장에서 성장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느냐를 놓고 치열하게 논의했습니다. 거의 3년 가까이 말이죠. 그 논의 과정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앞으로는 건설기계는 소유하기보다는 임대해서 사용하는 기업이 많아질 거다. 금융사와 파트너십을 맺고 리스 사업을 전개해야 한다. 이는 그 기계가 히타치건설기계의 자산이 된다는 뜻이다. 그럼 이미 10조엔에 달하는 히타치의 연결 자산 규모가 한층 더 무겁게 되는데?
결국 그룹은 지분 상당 부분을 매각하는 결정을 내립니다. 2022년 히타치건설기계는 그룹과 결별했죠. 이런 식으로 상장 자회사였던 22곳 중 15곳이 그룹을 떠나게 됩니다. 돈을 잘 버는 흑자 기업이어도 방향성과 맞지 않으면 과감히 정리한 거죠.
히타치의 변혁은 현재진행형입니다. 몇 달 전에도 가정용 에어컨 제조에서 철수한다고 발표했죠. 여전히 이사회에선 변화 속도가 느리다는 지적이 나온다는데요. 본래 변화란 어렵고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기에 꾸준히 해나가는 게 무엇보다 중요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히타치의 나카하타 히데노부 CHRO의 인터뷰 발언을 공유하며 마무리합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변화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간이 걸린다’가 아니라 ‘시간을 들이는 것’을 염두에 뒀습니다. 시간을 들여 변화를 납득한 후에 일하게 하는 겁니다.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시작을 빨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By.딥다이브
뚜렷한 경영전략, 독립적인 이사회, 과감한 선택과 집중. 교과서 같은 이야기이지만, 히타치는 이 모범 답안이 정말 통한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주요 내용을 요약하자면.
-올해 주가 상승률 90%. 일본 대기업 히타치가 디지털 전환으로 환골탈태했습니다. 시작은 이러다 망할 수 있다는 위기감에 휩싸였던 2009년이었습니다.
-느슨한 자회사 연합체였던 히타치는 그룹의 공동 목표를 뚜렷하게 정합니다. 그 목표란 ‘사회 혁신’. 단순히 제품만 파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디지털 솔루션까지 함께 제공하는 기업으로 변신하겠다는 겁니다.
-이를 위한 과감한 구조재편이 이뤄집니다. 독립적인 이사회가 CEO에게 힘을 실어줬기에 가능했죠. 그동안 사장이 여러 차례 바뀌었지만, 개혁 방향엔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15년이 지났지만 히타치는 여전히 혁신 중입니다. 거대한 대기업의 방향을 돌리는 건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죠. 더 빨리 시작하는 게 중요한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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