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성서공단에서 중동 전통 의복용 직물을 만들어 수출하는 한상웅 한신특수가공 대표(72)는 18일 이렇게 말했다. 그는 “정치 불안이 빨리 해소되지 않으면 우리 같은 중소기업들은 버텨낼 재간이 없다”고 했다.
중소기업계가 이달 초 비상계엄 사태부터 이어진 불안한 정치 상황 속에서 치명상을 입고 있다. 해외 수출에 차질을 빚는 데다 환율이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인 달러당 1450원대까지 치솟았기 때문이다. 과도한 인건비, 값싼 중국산과의 출혈경쟁 등으로 고사 위기에 몰린 중소 제조업체들은 “탄핵 정국이 불 난 집에 기름을 부은 격”이라고 하소연한다.
중소 제조업 생태계는 곳곳에서 위험 신호가 켜지고 있다. 22일 지지옥션에 따르면 올해 10월 전국 공장 경매 건수는 327건이었다. 2021년 3월(386건) 이후 3년 7개월 만에 가장 많다. 경매로 나온 공장들이 새 주인을 찾은 낙찰률도 30%를 밑돌았다. 망한 곳은 많은데 사업을 새로 시작하거나 확대하는 이들이 적다는 얘기다.
지난달 경기 포천시에서 만난 김모 씨(60)는 2022년 섬유 공장 문을 닫았다. 외환위기 직후인 1999년 세워 연매출이 한때 200억 원까지 올랐던 공장이다. 그는 “최저임금, 주 52시간제로 인건비가 베트남보다 너덧 배는 비싸다”면서 “주변 공장주들이 먼저 폐업한 제게 ‘너무 부럽다’고 하는 데는 이유가 다 있다”고 했다. 그가 약 10년간 조합장으로 활동했던 경기북부 섬유조합 회원사는 2020년 237개에서 올해 160개로 줄었다. 4년 새 3곳 중 1곳이 사라진 것이다.
창고에 쌓인 장난감 금형 18억어치… “먼저 폐업한 中企 부럽다”
〈상〉 한계상황 中企, 정치혼란 치명타 환율 급격한 상승에도 속수무책 “제품 만들때마다 되레 손해” 울상 전문가 “업종별 지원 세분화 필요”
“저희도 망하기 일보 직전이죠.”
지난달 29일 경기 화성시의 한 완구업체. 1974년 창업한 완구 1세대 박규식(가명·78) 씨의 공장이다. 그가 손으로 가리킨 물류창고 한쪽에는 장난감 생산을 중단하면서 쓸모가 없어진 금형 180여 개가 어지럽게 쌓여 있었다. 금형회사에서 “제품도 안 만드는데 그냥 갖고 가라”고 통보해 올해 초부터 차례차례 실어 왔다고 했다. 박 씨는 “구조가 복잡한 장난감을 만드는 금형은 개당 2000만 원까지도 한다”며 “저것만 해도 거의 18억 원어치는 된다”고 푸념했다. 이 회사 매출액은 10년 전 24억 원에서 현재 7억 원으로, 직원은 같은 기간 20명에서 6명으로 줄었다. 이 회사 임원 이모 씨는 “팬데믹 때보다 지금이 더 힘들다”며 “이제 ‘메이드 인 코리아’ 장난감은 사라지고 값싼 중국산만 남을 것”이라고 했다. 실제 2021년 146개였던 한국완구공업협동조합 회원사는 지난해 133개로 줄었다. 그나마 조합비도 못 내는 곳이 허다하고, 다수는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라는 게 조합 측 설명이다.
국내 중소 제조업체들이 경쟁력을 빠르게 상실하면서 한국 경제의 저성장 기조가 더 심화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전체 제조업체 중 중소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97.7%에 이르기 때문이다. 중소기업들은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상승한 인건비에 ‘주 52시간제’와 같은 노동규제에 발목이 잡혀 있다고 호소한다. 여기에 국내 정치 불안으로 인한 해외 수출 차질과 환율 급등이 기업들을 절벽으로 내몰고 있다는 지적이다.
경기 파주시에서 인조가죽(레자) 공장을 34년간 운영해 온 주성진(가명·64) 씨는 폐업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다. 그는 “3년 전에 비해 매출이 30%로 쪼그라들면서 인력도 4분의 1을 줄였다”며 “외환위기 때보다 힘들다”고 했다. 주 씨는 정부와 정치권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다고 했다. 그는 “천연자원이 없는 나라에서 밤새 공장 돌려서 경제가 이만큼 커졌는데, 이젠 우리 같은 사람들이 망하든 말든 윗사람들은 신경도 안 쓰는 것 같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경기 포천시에서 2년 전 폐업한 김모 씨(60)에겐 주변 공장주들이 “너무 부럽다”고 할 정도다.
중소기업이 체감하는 경기 상황인 중소기업건강도지수(SBHI)도 계속 낮아지고 있다. 통계청 국가통계포털(KOSIS)에 따르면 올해 1∼11월 중소제조업 경기전반 실적 SBHI 평균치는 77.9로, 코로나19로 전 세계가 셧다운됐던 2020년(70.6)을 제외하면 2019∼2024년 중 가장 낮았다. 중소기업중앙회 관계자는 “고금리·고물가·고환율 영향으로 중소기업은 코로나19 때보다 힘든 실정”이라고 말했다.
최근의 불안한 정치 상황으로 인한 중소기업 피해도 커지고 있다.
한상웅 한신특수가공 대표(72)는 1987년부터 37년간 대구 성서공단을 지켜왔다. 3일 비상계엄 사태 이후 보름간 사우디아라비아 바이어들의 제품 발주 요청이 뚝 끊긴 건 그로서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이다. 한 대표는 “바이어들에게 ‘한국 상황이 괜찮아졌고 제품 제조도 문제가 없다’고 설명해도 발주를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며 “계속 전화하고 메일을 보내도 ‘기다려 보라’는 답변만 돌아온다”고 한숨을 쉬었다.
중기중앙회가 실시한 수출 중소기업 긴급 현황조사에 따르면 수출 중소기업 513곳 중 최근 국내 정치 상황의 불확실성으로 인해 직간접적인 피해를 입었다고 답한 곳은 26.3%였다. 주요 피해 사례(복수응답)는 ‘계약 지연·감소·취소’(47.4%), ‘해외 바이어 문의 전화 증가’(23.7%), ‘발주 지연·감소·취소’(23.0%), ‘고환율로 인한 피해’(22.2%) 등이었다.
김기문 중소기업중앙회장은 “내수가 침체된 것도 크지만 수출시장에서 중소기업들이 예상보다 훨씬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탄핵 결론이 날 때까지 한국 내 정치 불안이 계속될 것이란 해외 시각이 많아 수출 기업 피해는 계속 불어날 것”이라고 했다.
비상계엄 사태 여파로 원화 가치가 하락하면서 환율은 1달러에 1450원대를 넘나들고 있다. 환헤지 등 대비책을 세워둔 대기업들과 달리 중소기업들은 갑작스러운 환율 변동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한 수출 중소기업 관계자는 “지금처럼 환율이 올라간 상황에서 원재료를 수입하게 되면 제품을 만들 때마다 손해가 난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중소 제조업체에 대한 지원을 업종별로 세분화해서 차별화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예를 들어 최근의 고환율 상황 등에서 일시적으로 유동성 위기를 겪는 기업엔 중장기 자금 대출 등을 서두르고, 시장 경쟁력을 잃은 곳들의 경우 생산성 향상이나 업종 전환 등을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세돈 숙명여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는 “현재까지의 중소 제조업 정책은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돈만 대주는 식이었다”며 “각 지역 대학 등과 연계해 사업 재편이나 구조조정, 업종 전환 등을 체계적으로 지원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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