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 꺼지는 산단 “계엄이 탈출 러시에 기름 부어”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12월 24일 03시 00분


[성장판 닫힌 제조업 생태계]

한국 경제의 한 축을 지탱해 온 산업단지의 불이 꺼져 가고 있다. 각종 규제와 중국, 베트남과의 가격 경쟁력 열위까지 겹치며 공장 가동률이 낮아지거나 아예 산단을 떠나고 있어서다. 일부 지역에선 이달 초 비상계엄 선포 이후 이어진 정치 불안에 ‘탈(脫)산단 러시’가 가속화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23일 한국산업단지공단에 따르면 경북 구미 산단의 3분기(7∼9월) 가동률은 62.4%로 전 분기 대비 4.2%포인트 하락했다. 과거 90% 이상 가동률로 전국에서 가장 활발하게 돌아갔던 구미의 활력이 눈에 띄게 떨어진 것이다. 이 외에도 전남 대불국가산단(73.0%), 충북 오송생명과학단지(74.8%) 등 전국 국가산업단지 33곳 중 ‘가동률 80% 미만’은 17곳으로 절반이 넘는다. 경북 지역에서 15년 가까이 자동차 부품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최모 씨는 “가격 경쟁력과 인력 수급 문제로 안 그래도 힘든 지방 제조업체들에 최근의 정치 상황은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했다.

이종우 아주대 경영학과 교수는 “산업단지와 입주업체들은 근로자와 그 가족들까지 있어 지역 경제의 큰 축”이라며 “현재의 혼란스러운 정치 상황이 길게 이어질 경우 비단 산단뿐 아니라 지역 경제까지 위기에 빠질 수 있다”고 말했다.

“계엄사태에 환율 급등-소비 위축… 거저 준대도 산단 안들어와”
〈중〉 정치혼란에 지방산단 아우성
구미 산단 3분기 가동률 62% 그쳐… 3년새 20%P 가까이 낮아져
“공장서 일하는 사람들이 없다보니, 주변 당구장-노래방 죄다 폐업 위기”
외국인 인력 공급 등 규제 완화 시급

지난달 하순 방문한 구미 산단 거리에 공장 매매 현수막이 걸려 있다. 과거 내륙권 최대 규모 산단으로 꼽혔던 구미 산단은 제조업 침체와 지방 산단 기피 현상 등으로 올해 3분기(7~9월) 가동률이 62.4%까지 떨어졌다. 구미=정서영 기자 cero@donga.com
“구미서 40년간 부동산을 했지만 여기는 이제 (잘나갈 때의) 절반도 안 됩니다. 큰 공장들은 해외로 나가고 작은 공장들은 문 닫아서 앞으로 공실이 더 나올 것 같네요.”(구미국가산업단지 인근 공인중개사 A 씨)

지난달 하순 찾은 경북 구미시 국가산단 1단지 도로변은 지나는 화물차 한 대 없이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공장 임대·판매’처럼 새 주인을 찾는 공고가 빛이 바랜 채 곳곳에 붙어 있었다. 18만2000㎡(약 5만5000평)에 달하는 해당 부지는 과거 대우그룹 계열의 디스플레이 회사가 있던 곳이다. 2005년 공장이 청산된 후 몇 번의 손바뀜을 거친 해당 부지는 2021년 공매에 들어갔다. 대규모 부지를 한 번에 가져갈 업체가 없어 1000∼2000평씩 나눠 매각해 왔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고 했다. 인근 공인중개사 B 씨(65)는 “초기에 공매를 통해 들어온 기업 몇 곳마저 폐업하거나 해외로 나가 지금은 체감상 공실이 더 심해졌다”고 했다.

23일 한국산업단지공단에 따르면 구미 산단의 분기별 가동률은 2021년 2분기(4∼6월) 81.7%에서 올 3분기(7∼9월) 62.4%로 3년여 만에 20%포인트 가까이 낮아졌다. 구미 산단은 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 속에서도 70∼80%대 가동률을 유지했던 곳이다. 하지만 2022년 4분기(10∼12월) 이후 줄곧 60%대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자연스럽게 지역 경제도 침체됐다. 구미 산단 인근 한 김밥집 사장은 “여기서 장사한 지 7년 됐는데 이 정도로 손님이 없는 건 처음”이라며 “올해 들어 20% 정도가 빠지더니 11월부터는 10%가 더 빠졌다”고 했다. 이어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없다 보니 구미역 근처 당구장과 노래방 등도 죄다 폐업 위기”라고 전했다. 배후 주택단지 매력도 낮아져 7월 현대건설이 분양한 ‘힐스테이트구미더퍼스트’는 현재 계약률이 약 50%에 그치고 있다. 태영건설이 지난해 10월 분양한 ‘구미 그랑포레 데시앙 1단지’는 1년 넘도록 미분양이 남아 있다.

수도권이나 대도시 인근 산단보다는 구미와 같은 지역 산단들의 어려움은 더 크다. 실제 3분기 수도권(서울, 경기, 인천)과 주요 광역시(대구, 대전, 부산, 울산, 광주) 336개 산단의 총생산액은 540조1550억 원으로 각 산단의 평균 생산액은 1조6076억 원이었다. 반면 이들 지역을 제외한 지방 988개 산단 생산액은 총 474조3881억 원에 그쳤다. 평균 4801억 원으로 수도권 및 광역시 주변 산단의 3분의 1이 채 되지 않는다.

상업용 부동산업체 관계자는 “지방 산단의 경우 3.3㎡ 당 7만∼8만 원에 ‘거저 준다’고 해도 입주가 안 되는 경우가 부지기수”라며 “수도권은 ‘입지발’로 겨우 버텨왔지만 지방은 그런 것도 없다”고 했다. 이정희 중앙대 경제학과 교수는 “지역 산단들은 수도권에 비해 인력도 구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며 “외국인 수급이라도 이뤄지도록 규제 완화 등 대책이 필요하다”고 했다.

문제는 탄핵 정국까지 경제계를 덮치면서 수도권이나 대도시 인근 산단에서도 기업들의 아우성이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산단 입주업체들은 수출을 주력으로 하는 곳들이 많아 피해가 더 직접적이다. 부산의 한 제조업체 대표는 “적지 않은 해외 거래처에서 한국의 정치 혼란이 잠잠해질 때까지 계약을 지연시키자고 요청했다”며 “어쩔 수 없이 공장 일부 가동을 멈춘 상태”라고 했다. 중소기업중앙회 부산·울산본부가 지역 중소기업 326개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내년 1월 경기전망지수(SBHI)는 67.6이었다. 팬데믹이 한창이던 2020년 9월(68.1)보다 낮다. 허현도 중기중앙회 부산울산회장은 “비상계엄 사태에 따른 환율 급등과 소비 심리 위축으로 지역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의 체감경기는 팬데믹 시절보다 어려운 상황”이라고 했다.

국내 중소기업들은 수도권, 비수도권을 망라하고 국내 산단들이 점차 경쟁력을 잃어가고 있다고 호소한다. 인천 남동공단에서 30년 가까이 건축용 자재를 생산해 온 윤은수 NSV 대표(68)는 “얼마 전 베트남 흥옌성 산단의 평당 임대료가 127달러(약 17만 원)라고 들었다”며 “인건비도 국내 대비 훨씬 저렴한데 부지까지 쉽게 구한다면 국내 어지간한 산단들은 상대가 될 수 없다”고 했다.

#산업단지#계엄#탈출 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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