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에 한두 달만 바짝 야근하면 되는데… ‘주52시간’ 갇혀 대목 날릴 판”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12월 27일 03시 00분


[성장판 닫힌 제조업 생태계] 〈하〉 탄핵정국에 멈춘 규제 개혁
납품일정 불규칙한 중소기업들 “연장근로 관리 분기-年 단위로”
내국인 구하기 어려운 영세업체들… “외국인 숙련공 체류기간 늘려야”
정부-정치권은 ‘기업 호소’ 뒷전

중소 제조업체들은 원청업체들의 주문이 한꺼번에 몰릴 경우 공장을 철야로 돌려야 납기를 제때 맞출 수 있다. 주 52시간제로 인한 고충을 지속적으로 호소하는 이유다. 내국인 고용이 점차 어려워지면서 이를 대체하는 외국인 노동자들도 4년 10개월이 지나면 한 차례 출국해 6개월 후에나 다시 들어올 수 있어 현장과 괴리가 크다는 지적이 많다. 뉴스1

“1년 평균을 내보면 직원들 근무시간은 주 40시간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주 52시간’ 규제에 걸리니 답답해요.”

인천 소재 A기업은 차체용 부품을 만들어 완성차 회사에 납품하는 중소 제조업체다. 계약에 따라 1년에 납품해야 할 부품 수량은 정해져 있는데, 완성차 회사의 사정에 따라 시기별로 납품량의 편차가 큰 편이다. 가용할 수 있는 인력과 공정 설비가 제한된 상황에서 일감이 몰리면 주 52시간 근로 규제 때문에 납기를 맞추기가 어렵다. A기업 관계자는 “계약대로 납품을 제때 하지 않으면 위약금을 물게 돼 있으니 결국은 근로 규제를 어겨 범법자가 될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중소기업들의 경쟁력을 회복하기 위해 걷어내야 할 규제들이 산적해 있는데도 개선 속도는 더디기만 하다. 특히 탄핵 정국에 접어든 뒤 정부와 정치권의 규제 개혁 동력이 완전히 무력화됐다는 지적도 나온다. 기업들 사이에선 “겉으로만 ‘민생’을 외치던 정부나 정치권 모두 결국 민생에서 가장 우선돼야 할 경제는 외면하고 있다”는 불만이 커지고 있다.


● “바쁠 때만 바쁜데… 52시간 규제 답답”

26일 중소기업계에 따르면 국내 제조업체들은 경영 환경을 더욱 어렵게 하는 요인들 중 가장 시급히 해결돼야 할 과제로 현실과 동떨어진 노동 규제를 꼽았다. 숙련된 인원을 무작정 많이 고용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근로시간이나 외국인 노동자 관련 규제로 인해 상당한 경영 차질이 빚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주 52시간 연장근로제다. 현행 근로기준법은 주 40시간에 연장근로 12시간을 합해 주 52시간까지 허용한다. 중소기업들은 일주일 단위로 고정된 연장근로 시간을 월·분기·반기·연 단위 등으로 확대하는 방향으로 법을 개정해 달라고 꾸준히 요청해 왔다. 시기별로 업무량 편차가 심한 기업의 경우 유연한 적용이 필요하다는 취지다. 이들은 1년 단위로 환산했을 때 평균 근로시간이 주 52시간 이하면 연장근로 관리 단위 확대를 허용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경북에서 직물 제조업체를 운영 중인 한 중소기업 대표는“우리는 중동 사람들 예복 만드는 곳이라 라마단 기간 앞두고 두세 달 바짝 공장 돌려서 1년을 먹고 살고, 나머지 기간에는 여유가 있다”며 “그런데 주 52시간 도입 이후 야근 근로가 불가능해져서 라마단 대목을 그냥 손 놓고 바라만 보게 생겼다”고 했다. 다른 제조업체 대표는 “아이스크림 공장은 여름에 바짝 일하고 겨울엔 일이 거의 없는데 주 52시간을 일괄 적용하는 게 맞냐”고 반문했다.

중소기업중앙회가 작년 4월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중소기업 3곳 중 1곳(31.2%)이 1년간 주 12시간을 초과해 연장근로가 필요했던 경험이 있었다고 답했다. 제조업은 40.8%로 비제조업(21%)에 비해 두 배가량 높았다. 또 주 12시간 이상 연장근로가 필요한 적이 있다고 응답한 업체 중 18.5%는 연장근로 한도 등 인력 운용의 어려움으로 제품이나 서비스 공급을 포기한 경험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정부는 작년 3월 주 52시간제를 업종이나 기업 특성에 맞게 유연화하는 것을 골자로 한 근로시간 개편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주 69시간제’라는 프레임에 갇혀 표류하다 결국 백지화했다. 이후 이 문제는 완전히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버렸다.


● “외국인 숙련공 겨우 키웠는데 본국으로”

인력난에 시달리는 중소 제조기업 중에는 내국인 노동자를 구하기가 힘들어 외국인 근로자에 의존하는 곳들이 많다. 이들은 외국인 숙련공을 육성하기 위해 ‘출국 후 재입국제도’를 개선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현행법상 외국인 근로자는 최장 4년 10개월까지만 국내에 머물 수 있고 기간이 다 되면 반드시 출국해야 한다. 일부 근로자에게는 한 차례 재입국 기회가 주어지지만 이때도 출국한 지 6개월이 지나야만 재입국이 가능하다. 또 재입국 후 다시 4년 10개월이 지나면 아예 영구 출국해야 한다.

경기 파주에서 판금 제조업체를 운영하는 박영환 씨(51)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미얀마 근로자 2명이 내년 10월 비자가 만료되기 때문이다. 박 씨는 “우리는 다른 업종과 달리 숙련된 노동자가 필요한 곳이라 새로 사람이 들어오면 제대로 일을 할 때까지 1년은 더 걸린다”며 “5년을 함께 일한 직원들을 내보내고 나면 빈자리를 또 어떻게 메워야 할지 막막하다”고 했다.

중기중앙회가 지난달 외국인 근로자를 고용하고 있는 중소제조업체 1225개사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 기업의 71.3%가 외국인 근로자의 체류 기간 연장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외국인 근로자를 빨리, 많이 데려오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번 채용하면 오래 일하도록 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기업인들은 말한다.

임채운 서강대 경영학과 명예교수는 “중소기업의 경우에는 인력 수급 문제가 심각한데 노동 규제 때문에 이중고를 겪고 있는 것”이라며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제조 생산성이 떨어지고 공장이 해외로 옮겨가 일자리 자체가 사라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중대재해법-외국인근로자법 등 ‘정쟁’에 밀려 상임위도 통과 못해


규제개혁 대부분 법 개정 필요
“규제는 예산 없이도 해결 가능”

중소기업들이 요구하는 규제 개혁은 결국 국회 문턱을 넘어 법 개정이 이뤄져야 하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탄핵 정국에서 정쟁에만 몰두하는 여야 정치권에 경제계의 목소리는 잘 닿지 않고 있다. 실제 22대 국회에서 이미 발의된 해당 법안들은 모두 국회 상임위원회를 통과하지 못하고 있다.

26일 중소기업중앙회, 국회 의안정보시스템 등에 따르면 중소기업이 요구하는 규제개혁과 관련해 발의된 법안은 중대재해처벌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 외국인근로자의 고용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 중소기업협동조합법 등 크게 3가지다. 먼저 국민의힘은 임이자 의원 대표발의로 6월 중대재해처벌법을 5인 이상 50인 미만 사업장에 한해 2년간 적용을 유예하도록 하는 개정안을 내놨다. 중소기업들은 사업 규모 등을 고려했을 때 현실적으로 대응하기 어렵다는 점 등을 이유로 유예를 요구해 왔다. 해당 법안은 소관 상임위인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계류 중이다.

숙련된 노동자의 체류기간을 연장하는 외국인근로자법 개정안은 국민의힘 임이자, 김위상 의원과 개혁신당 이준석 의원이 각각 대표 발의했다. 세 법안은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고용노동법안심사소위에서 계류 중이다.

중소기업협동조합법은 규모의 경제 실현을 위해 협동조합을 결성한 중소기업들에 관한 법으로, 기업들은 담합 규제 관련 조항을 명확히 해 리스크를 줄여달라고 요구해 왔다. 더불어민주당 송재봉 의원이 지난달 해당 요구를 반영한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지만 아직 상임위에 상정도 되지 못했다.

산업 규제 관련 법안은 대부분 경영계와 노동계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이슈로, 여야의 심도 있는 토론과 협의가 필요하다. 특히 중대재해처벌법 유예는 지난 21대 국회에서도 여야가 치열하게 협상했지만 끝내 합의점에 다다르지 못한 이슈이기도 하다.

중소기업들이 처한 경영 환경 상황이 좋지 않아 어느 때보다 시급한 규제개혁이 필요한 때이지만 3일 비상계엄 사태 이후 정치권의 관심은 탄핵 관련 이슈에만 쏠려 있어 민생 경제 관련 규제안 논의는 뒷전인 상태다. 중소기업계 관계자는 “여야 갈등이 첨예한데 국회가 비정쟁 민생 이슈에 관심이 있을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중기중앙회 관계자는 “(산업 현장) 규제는 예산 한 푼 들이지 않고도 해결이 가능하다”며 “불확실한 상황에서 경제가 빨리 안정화되려면 국회에서 여야를 막론하고 해당 법안들이 반드시 통과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성장판 닫힌 제조업 생태계#규제 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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