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멍이 숭숭 난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카세트테이프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거리를 활보하던 X세대를 기억한다면 반가울 트렌드가 있다. 그 시절 교복과도 같았던 추억의 더플코트에 대한 얘기다. 단추 대신 토글과 로프로 앞섶을 여미도록 고안했는데, 바로 이 뾰족한 뿔 모양의 토글이 떡볶이를 닮았다 해서 ‘떡볶이 코트’란 별칭을 얻었다. 본래 더플코트는 혹독한 전장의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 만든 영국 해군의 군복이었다. 1887년 영국의 아우터웨어 제조업체인 존 패트리지(John Partridge)가 폴란드의 군용 프록코트 디자인을 차용해 만든 것이 오늘날 더플코트의 시초가 됐다는 게 정설이다. 매서운 바닷바람을 막아주는 질기고 튼튼한 양모 소재와 유니폼 위에 겹쳐 입을 수 있는 넉넉한 오버사이즈 피트, 두꺼운 장갑을 끼고도 쉽게 여밀 수 있는 토글 & 로프 장식으로 장병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 영국군에 의한 승리로 자유를 얻은 나라에선 나치에 대항하며 목숨을 바친 군인들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의미로 더플코트를 입는 일이 잦았다. 이에 영국 아우터 브랜드 글로버올(Gloverall)은 전쟁이 끝난 뒤 남은 군납품 코트를 사들여 민간에 팔기 시작했고, 재고 물량이 떨어지자 더 가벼운 소재와 슬림 피트로 변형한 더플코트를 출시하며 대중화에 앞장섰다. 자유와 위로의 상징이던 더플코트는 1970년대 세련된 미국 아이비리그 스타일의 대표 아이템으로 인기를 끌며 클래식한 매력을 머금은 아우터로 거듭났다.
다시 돌아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역사적인 더플코트가 소환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패션계를 강타한 Y2K 열풍은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반 인기를 얻었던 패션 아이템을 계속해서 끄집어내며 쉽사리 꺼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1990년대를 배경으로 한 인기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는 여고 시절의 추억과 함께 옷장 깊숙한 곳에 넣어뒀던 더플코트를 한 번쯤 꺼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전국을 ‘도깨비앓이’에 빠트린 드라마 ‘도깨비’(2016)에서 지은탁의 시그니처와도 같던 부드러운 캐멀 컬러 더플코트 역시 겨울이 오면 어김없이 회자되는 패션 아이템이다. 올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걸출한 스타를 배출한 ‘선재 업고 튀어’에서 임솔 역을 맡은 김혜윤은 더플코트를 활용한 프레피 룩을 선보이며 독보적인 개성을 드러냈다. 최근 막을 내린 드라마 ‘조립식 가족’의 윤주원으로 인생 캐릭터를 경신한 정채연 역시 베이식한 디자인이 돋보이는 하프 더플코트로 하이틴 스타다운 매력을 부각했다.
이번 시즌엔 차분하고 절제된 스타일 유행
이렇듯 대학생들의 낭만적인 캠퍼스 룩 정도로 인식되던 더플코트가 새로운 변곡점을 맞았다. 혹자는 더플코트가 거기서 거기지 뭐가 다르냐고 따져 묻겠지만, 이번 시즌엔 소재와 컬러 그리고 디테일까지 다양하게 변주된 디자인들이 쏟아지며 확실히 다른 인상을 남겼다. 특히 2024년을 휩쓴 드뮤어 트렌드의 영향으로 차분하고 절제된 무드의 더플코트가 주목받고 있다. 빅토리아베컴이 간결한 형태의 전통적인 디자인을 택했다면, 소재에 차별점을 둔 버버리의 무톤 더플코트는 트렌치코트를 잇는 클래식한 디자인으로 승부했다. 거추장스러운 후드를 없애고 여밈 장식을 금속 버클로 대체해 포멀과 캐주얼을 오가는 자유로운 스타일링을 선보였다. 한편 실험적인 디자인을 이어간 남성 브랜드들도 있다. 패턴의 귀재, 겐조는 패치워크 디테일을 더한 격자무늬 더플코트로 빈티지한 매력을 배가했고, 니트 카디건에 더플코트 문양을 가미한 언리얼에이지옴므도 더플코트에 대한 강한 애정을 드러냈다.
넓어진 선택 폭만큼이나 스타일링도 다채로워졌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더플코트 사랑을 실천 중인 알렉사청은 최근 SNS 게시물에 세련된 블랙 더플코트 룩을 선보이며 “더플코트보다 섹시한 옷은 없다(Nothing sexier than a duffle coat)”는 코멘트를 달기도 했다. 귀여운 쇼트커트 헤어로 변신한 나나 역시 긴 기장의 블랙 더플코트로 트렌드에 앞장섰다. 데님 소재의 슬릿 데님 스커트에 스타킹과 터프한 분위기의 청키 부츠를 더해 시크한 요소를 가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서로 상반되는 아이템과의 믹스 매치도 색다른 즐거움을 선사한다. 차분한 브라운 톤의 롱 더플코트에 카우보이모자를 써 웨스턴 무드를 한 스푼 가미한 모델 하나 크로스처럼 말이다. MZ처럼 분방한 무드를 연출하고 싶다면 부슬부슬한 부클 소재의 하프 더플코트로 눈을 돌려보자. 고글, 비니, 버클 장식 벨트 등 액세서리를 더하는 식으로 개성을 살린 패션 인플루언서 마리 메구치와 티니 레아의 스타일링을 따르면 도움이 된다.
더플코트에 대한 애착으로 유명한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 ‘더플코트에 대하여’에는 “세상은 어찌 된 셈인지 한 바퀴 빙 돌아 제자리에 온 듯, 올해 들어 더플코트를 입은 젊은이들 수가 늘어났다”는 문장이 나온다. 그의 말처럼 유행은 돌고 돈다. 시즌을 거듭할수록 트렌드 주기는 나노 단위로 빨라지고 있고, 우리는 뭔가를 쉽게 속단하기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다. 하룻밤 사이에 세상이 바뀐 것처럼, 오늘의 유행이 내일로 이어지리란 보장이 없다. 때마침 돌아온 더플코트 트렌드를 반기며, 새로운 코트를 장만하기보다 옷장 속 추억의 아이템을 꺼내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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