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기획] ‘잃어버린 30년’ 딛고 부활 꿈꾸는 日
글로벌 빅테크, 日에 대규모 투자… 오픈AI 아시아 거점으로 도쿄 낙점
웨이모도 도쿄서 자율주행 테스트… 日 정부 “반도체-AI 지원 확대”
2030년까지 91조 원 투입하고, 자율 규제로 산업 생태계 활성화
韓, 과잉 규제에 정치 혼란까지… 빅테크 CEO “당분간 방한 없다”
데이터센터 등 ‘코리아 패싱’ 우려… 국내 글로벌 지부 100곳도 안 돼
암참 “韓, 비즈니스 허브 되려면 안정적인 규제 환경 구축 시급”
《美中 갈등속 IT패권 노리는 日
일본이 파격적 지원책을 내놓으며 글로벌 빅테크의 매력적 투자처로 급부상했다. 대만은 ‘인공지능(AI) 허브’로 변모 중이다. 반면 정치 불안에 빠진 한국은 ‘코리아 패싱’ 심화로 디지털 패권 전쟁에서 도태될 위기에 처했다.
Scene #1 지난해 12월 16일 미국 플로리다주 팜비치의 마러라고 리조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은 손정의 일본 소프트뱅크 회장과 나란히 서 어깨동무를 했다. 손 회장은 이날 미국에 1000억 달러(약 143조 원) 투자를 하고 10만 명 규모의 일자리를 창출하겠다고 약속했다. 생중계 도중 트럼프 대통령이 “2000억 달러로 늘려줄 수 있겠느냐”고 농담하자 손 회장은 “그렇게 되도록 노력해 보겠다”며 웃었다.
Scene #2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지난해 11월 일본 도쿄에서 열린 ‘엔비디아 인공지능(AI) 서밋 저팬’에 참석해 손 회장과 무대에 나란히 앉았다. 황 CEO가 “많은 분들이 잘 모르지만 한때 손 회장은 엔비디아의 대주주였다”고 말하자 손 회장이 그에게 안기기도 했다. 손 회장이 “일본을 AI로 리셋(재설정)하겠다”고 하자 황 CEO는 “일본이 미국 중국에 넘겨준 기술 주도권을 회복할 기회”라고 화답했다.
Scene #3 챗GPT 개발사 오픈AI는 지난해 4월 일본 도쿄에 아시아 최초 거점을 설립하고 인력을 충원 중이다. 샘 올트먼 오픈AI CEO가 일본을 방문해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당시 총리와 면담한 지 약 1년 만의 결과물이었다. 올트먼 CEO는 지난해 1월 방한했지만 아직까지 한국 법인 설립 계획은 내놓지 않고 있다.》
1990년대 삼성전자 등 한국 기업에 밀려 전자 산업에서 쇠락의 길을 걸었던 일본이 부활의 날개를 펴고 있다. 일본 정부는 AI와 자율주행 등 최첨단 정보기술(IT) 산업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에 나선 한편 미중 갈등에 따른 반사효과까지 톡톡히 누리고 있다. 반면 한때 글로벌 IT 시장의 테스트베드로 불리며 ‘아시아 IT 허브’를 노리던 한국은 과도한 규제와 반(反)외국기업 정서 등으로 글로벌 기업들의 외면을 받고 있다. 최근에는 비상계엄 선포와 그에 따른 대통령 탄핵 국면으로 정치 혼란과 정책 공백이 이어지면서 ‘디지털 패전국’으로 전락할 것이란 우려까지 나오고 있다.
● 일본 정부의 파격적인 빅테크 러브콜
일본의 제조 기술과 IT를 결합해 확장하기 위한 글로벌 IT 기업들의 ‘일본행’은 지난해 내내 이어졌다. 마이크로소프트(MS)는 지난해 4월 일본 도쿄에 아시아 AI 연구소를 세우면서 4년간 일본에 29억 달러(당시 약 3조9000억 원) 규모로 투자한다고 밝혔다. 역대 MS의 대일 투자 중 최대 규모다.
뒤이어 미국 클라우드 서비스 기업인 오라클도 향후 10년간 80억 달러(당시 약 11조 원)를 투자해 도쿄와 오사카에 있는 데이터센터를 증설한다고 밝혔다. 아마존 역시 2023년부터 5년간 2조3000억 엔(당시 약 20조7190억 원)을 투자해 일본에 클라우드 서비스를 확충하기로 했다.
구글 모회사 알파벳의 자율주행차 개발 자회사 웨이모는 올해부터 일본 도쿄에서 자율주행차 테스트를 시작한다. 미국에서 자율주행차 개발을 시작한 이래 첫 해외 시장 진출이다. 구글은 도쿄가 자율주행 기술을 실제 환경에서 테스트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춘 점, 관련 규제가 강하지 않아 글로벌 기업들의 테스트베드로 주목받고 있는 점을 꼽았다.
빅테크들이 아시아 핵심 거점으로 일본을 점찍은 건 일본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 덕분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노재인 한국인터넷기업협회 연구원은 “미국 기업들의 대일 투자가 이루어지는 중요한 요인은 AI와 관련한 일본 정부의 정책들”이라고 설명했다. 일본의 AI 전략은 아직까지 법률에 의한 규제보다는 자율적으로 준수하게 하는 연성 규제(Soft Law)로 유연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해 3월 강한 규제 성격의 인공지능법(AI Act)을 통과시킨 유럽연합(EU)과 달리 일본은 기업에 가이드라인을 제공하고 기업의 자율적인 규제를 요구하는 정도로 대응하고 있다. 또한 일본은 미국과 유사하게 AI 산업 생태계 형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데이터센터 설립과 반도체 생산 공장 유치 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표적인 예가 대만 TSMC 유치 성과다. 일본 정부에서 조(兆) 단위 보조금을 받는 세계 1위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업체인 TSMC는 최근 일본 구마모토현 제1공장에서 반도체 시험 생산을 마치고 이달부터 본격 양산에 돌입했다.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일본 총리는 지난해 11월 반도체와 AI 분야에 2030년까지 10조 엔(당시 약 91조 원)의 공적 자금을 투입하겠다고 발표했다. 외국인 창업 규제를 완화해 해외 인재를 적극적으로 유치하고 AI 개발에 필수 인프라인 그래픽처리장치(GPU)를 정부 차원에서 구입하기도 했다.
일본 정부의 이 같은 파격적인 지원 정책은 엔비디아의 황 CEO까지 도쿄로 불러들였고, ‘엔비디아 AI 서밋 저팬’에서 소프트뱅크와 엔비디아가 ‘일본의 기술 주도권 회복’을 함께 외치게 만들었다. 손 회장은 “AI를 과잉 규제하는 나라들이 있는데, 일본 정부는 그렇지 않다”며 “일본이 새 혁명을 따라잡을 기회”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 정치-규제 불확실성에 ‘코리아 패싱’
빅테크들은 정치적 불확실성이 커진 한국과는 ‘거리 두기’를 하고 있다. 한 빅테크 임원은 “최근 미국 본사에서 비상계엄과 관련해 재난 프로토콜을 점검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며 “CEO 등 고위 관계자의 방한 일정도 당분간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또 다른 생성형 AI 분야 빅테크 관계자도 “한국 국회에서 급하게 통과된 AI기본법에 대한 우려가 크다”며 “미국 견제 의도가 강한 유럽을 제외하면 AI와 관련해 이와 같은 강도 높은 규제를 하는 나라는 전 세계에서 한국뿐”이라고 지적했다.
AI 핵심 인프라인 데이터센터 유치에서도 ‘코리아 패싱’은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일본 대만뿐 아니라 최근엔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 국가들도 데이터센터를 유치하고 있다. 빅테크들이 데이터센터 운영에 드는 전기요금과 탄소배출권, 부동산 임차료 등의 부담이 상대적으로 작은 동남아로 눈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반면 한국은 전력 관련 규제 등으로 경쟁력을 잃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한국데이터센터연합회는 최근 정부의 전력계통영향평가 제정 행정예고에 의견서를 내고 “이 제도는 경쟁 국가에서는 요구되지 않는 한국만의 규제”라면서 “(전력계통영향평가가) 한국의 투자 환경을 주변국 대비 과도하게 불리하도록 유도하고 있다”며 개선을 촉구했다.
국회가 자료를 요구하면 영업 비밀이어도 제출해야 하고, 증인으로 채택된 기업인은 해외에 체류 중이어도 화상으로 출석해야 한다는 내용의 ‘국회에서의 증언·감정 등에 관한 법률(국회증언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것도 글로벌 기업들에 충격을 안겼다. 주한미국상공회의소(암참)는 지난해 12월 16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만난 자리에서 국회증언법 개정안에 대한 강한 우려를 전달했다. 다음 날인 17일엔 미국상공회의소가 찰스 프리먼 아시아 담당 수석부회장 명의 성명을 내고 한국의 디지털 플랫폼 규제에 대한 강도 높은 우려를 재차 표명했다.
앞서 캐럴 밀러 미 공화당 하원의원이 지난해 9월 발의한 ‘미국·한국 디지털 무역 집행법안’에는 구글 애플 등 플랫폼 기업이 한국의 입법 조치로 불이익을 받으면 무역 보복을 가능토록 하는 내용이 담겨 논란이 되기도 했다. 밀러 의원은 “한국은 우리의 경제·안보 파트너지만, 미국 디지털 기업이 법의 표적이 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볼 수 없다”고 했다. 미국 빅테크의 한국 지사 관계자는 “한국 시장 상황과 뉴스 등을 보고받는 CEO는 일본이나 인도는 직접 방문해도 한국은 ‘패스’하는 이유에 대해 ‘솔직히 꺼려진다’는 언급을 할 정도”라며 “한국 특유의 반기업 정서나 규제 환경에 대한 우려가 상당히 크다”고 말했다.
● “AI 대응 실기하면 디지털 하청기지 전락”
암참은 한국의 규제 환경 개선이 가장 시급한 문제라고 봤다. 암참 회원사의 24.6%가 2022년 조사에서 국내 경영 환경상 가장 큰 어려움으로 예측이 어려운 규제 환경을 꼽았는데 불과 1년 만에 응답 비중이 42.3%로 늘었다. 암참 측은 “대한민국이 매력적인 비즈니스 허브로서 관심을 집중시키려면 안정적인 규제와 지정학적 환경이 중요하다”며 “다른 국가들이 제공하는 아태본부 지원책들과 비교하면 경쟁력이 크게 부족하다”고 평가했다.
글로벌 기업의 아시아·태평양 지역본부(RHQ)는 싱가포르에만 5000개가 자리 잡고 있다. 홍콩에는 1400개, 중국 상하이에도 500개가 포진해 있지만 한국에는 100곳도 채 안 된다.
한국인터넷기업협회 디지털경제연구원은 최근 ‘글로벌 AI 패권 경쟁과 한국의 대응 전략’ 보고서에서 “한국은 자국 AI 기업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투자 규모와 강한 규제 환경 때문에 한계에 직면해 있다”며 “한국이 글로벌 AI 패권 경쟁에서 차별화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기술 역량을 기반으로 글로벌 소버린 AI 연대를 주도하고, ‘매력적인 언더도그(underdog)’로서 포지셔닝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그러면서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전략적이고 적극적인 지원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허준영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도 “일본과 대만은 반도체뿐 아니라 AI 패권을 주도하는 미래를 그리며 국내외 기업을 가리지 않고 매우 적극적인 정부 지원을 펴고 있는 것이 특징”이라며 “한국이 이 같은 경쟁에서 도태될 경우 반도체 제조 하청기지로 전락할 수 있어 우려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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