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 백양로길.
87년 늦가을, 캠퍼스에 부는 바람은 차가웠다. 두꺼운 전공서적을 팔에 낀 운동복 차림의 한 청년이 그 길로 들어섰다. 땅만 내려다보는 그의 눈가에는 미처 닦아내지 못한 이슬이 남아 있었다.
월드컵과 함께 스타로 떠오른 선수 아닌 선수. 마이크 하나로 세상 사람을 TV 속으로 빨아들였던 축구해설가 신문선(39).
10년전 프로팀에서 활약하던 그는 점박이 공이 골네트를 흔들 때마다 포효를 터뜨렸지만 그라운드 밖을 나서면 힘들고 서러워 그렇게 자주 울었다.
『공 차는 놈이 공부는 무슨 공부냐』
고교 때부터 귀가 따갑게 듣던 소리다. 연세대 1학년 때는 수업에 들어갔다가 선배로부터 『주제를 모른다』는 훈계와 함께 뺨까지 얻어맞기도 했다. 프로에 진출한 뒤에도 계속해온 공부와 운동의 갈림길을 맞은 것이다.
결정했다. 태극마크에 20년의 애증이 담긴 유니폼을 벗고 공부에 매달리기로. 중풍으로 쓰러진 아버지의 손길이 그를 잡았고 아내도 고개를 저었다. 4,5년은 현역으로 더 뛸 수 있었고 대학원을 마쳐봐야 아무런 보장도 없었기 때문이다.그때 어린애처럼 눈물을 뿌렸던 그 청년은 결국 연세대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아르바이트로 라디오 해설도 시작했다.
세월이 흘렀다. 입이 유난히 커 생긴 「하마」라는 별명은 「그라운드의 음유시인」 「오바맨」으로 바뀌었다. 팬들이 그에게 달아준 훈장들이다. 눈물로 익힌 스포츠학문은 그가 해설할 때마다 탄탄한 이론으로, 때로는 심금을 울리는 시로, 무릎을 치게 만드는 비유로 터져나왔다.
지난 9월28일. 일본 도쿄에서 벌어진 98프랑스월드컵 한일전. 『골인 골인 골인』 무언가에 감전된 사람처럼 떨리는 그의 목소리가 경기 종료를 앞두고 계속 이어졌다. 2대 1 극적인 역전승. 일본의 골네트를 두번 가른 4백g 남짓의 작은 「요물단지」는 그의 인생을 또다시 바꿔놓았다.
MBC해설위원과 국제상사 판촉부장, 연세대 체육학과 강사, 어린이축구교실의 운영자. 한일전이후 대통령 후보만큼 바쁜 사람이 됐다. TV 프로의 단골 초대손님이 됐고 『CF를 찍자』 『책을 내자』는 제의가 빗발치고 있다. 또 PC통신에는 팬클럽 「골이예요」가 생겼고 각 정당에서도 『함께 일하자』는 제안을 했다. 그의 아내는 직장에서 더이상 『혹시 남편이 하일성씨 아닌가요』라는 질문을 받지 않는다. 얼마 전에는 젊은 여성팬들의 전화 때문에 아내와 얼굴까지 붉히는 해프닝도 있었다.
왜 이렇게 난리인가. 대한민국에 축구해설가가 신문선만 있는 게 아닌데.
분석적이면서도 감상적인 그의 해설은 선수와 축구공만 움직이는 게 아니다. 경기 해설은 물론 스포츠과학과 심리학, 경영이론이 튀어나온다.
『축구공은 그냥 둥근 공이 아니다. 선수의 땀과 정신은 물론 그 나라의 경제와 사회가 배어 있다. 단순히 공의 물리적 움직임을 알려주는 해설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의미를 팬들과 나눠야 한다』
유니폼을 입고 20년, 다시 마이크를 잡고 10년을 뛰어온 「축구교(蹴球敎)」의 메신저 신문선.「마이크 인생」의 절정기에 오른 그는 그때 백양로에서처럼 갈등하고 있다. 두가지 갈림길 때문이다. 야구해설가보다 단 한푼이라도 더 받아 축구의 자존심을 지켜야 할지, 정상의 위치에서 물러나 대학 교단에서 「축구교」를 발전시켜야 할지. 스타덤에 올랐다는 이유로 돈갖고 줄다리기 한다는 비난을 들을까봐 두렵기도 하다.
그가 자주 하는 말처럼 축구공은 둥글다. 그래서 공은 찰 만한 것이고 세상은 살 만한 곳인지도 모른다.
〈김갑식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