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들이 제 명에 못죽는다.
예전엔 백혈병 같은 불치병이나 시한부 인생을 살다가 사랑하는 이를 남기고 죽는 영화속 주인공은 죄다 여자였다. ‘러브 스토리’ ‘사랑의 스잔나’ ‘라스트 콘서트’‘접시꽃 당신’에서 죽은 여자 부여잡고 우는 쪽은 틀림없는 남자였다.
그런데 이제는 남자들이 죽고 있다. 이름하여 한국영화의 ‘남자 죽이기’.
지난해 11월말 개봉된 이래 서울에서만 70만 관객을 모으며 전국에 눈물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편지’를 보라. 불치병으로 남자(박신양 분)가 죽고, 뒤따라 죽을 결심을 했던 여자(최진실)는 강인하게 살아남았다.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도 먼저 죽는 이는 남자다. 상반기중 개봉될 ‘남자이야기’ ‘투 타이어드 투 다이(Too Tired To Die)’도 마찬가지다.
왜 그렇게 남자들이 제 명에 못죽는 것일까. 우연의 일치라고? 천만에. 세상에 핑계 없는 무덤 없고, 이유 없는 현상 없다.
영화전문가들은 멜로영화 장르 내부의 변화추구를 첫 이유로 꼽는다. 한동안 여자를 죽여왔으니 변화를 위해 이제는 남자를 죽이는 것으로 방향을 틀었다는 풀이다.
둘째는 우리사회 성의 질서 변화를 영화속에서 재조정하고 있음을 들 수 있다. 여성이 사회속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늘고, 강한 여성이 아름답다는 메시지가 고개를 들면서 영화속에서도 여자가 살아남는 것으로 변화한다는 것.
그러나 1,2년전부터 머리를 들이밀기 시작한 명예퇴직부터 최근 국제통화기금(IMF)한파로 인한 경제난과 명예퇴직, 정리해고, 실직, 급기야 이로 인한 발기불능 등이 영화속 남자를 죽이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남자들이 누려오던 기득권을 위협하는 가부장제의 흔들림도 이를 부채질한다.
실제로 1950년대 미국에서는 남성 최루물(Male Weepie)의 시대가 열렸는데, 이는 전쟁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터에 나가야했던 여자들은 점점 강해지고 남자들은 남성성의 위기를 맞은 세태를 반영했다는 분석이 있다.
벌써부터 IMF의 I자만 들려도 지겹다는 사람이 많다. IMF를 극복할 때까지 우리는 ‘남자죽이기’영화를 지겹도록 봐야할지도 모른다.
〈김순덕기자〉